59. 슈퍼스타 (1)
8월 말.
여름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대구 더히트 파크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리그 1위 대구 더히트. 그리고 리그 3위 서울 세오레즈.
그들의 격돌이 보기 드문 극과 극의 충돌로 번지며 경기장을 만석으로 가득 메운 팬들의 심장을 두들기기 시작한 것.
1차전에서는 극한의 타고투저 시즌에서 보기 힘든 명품 투수전.
2차전에서는 타고투저의 정점에 이른 경기를 만들어낸 더블 스코어의 타격전.
특히 2차전에서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진 세오레즈가 기죽기는커녕 오히려 어마어마한 장타력을 쏟아내며 유례없는 타격전을 만들어내자, 언론의 시선이 다시 쏠리기 시작했다.
[핵폭탄급 타격전! 세오레즈와 더히트의 2차전. 사상 최대 스코어 갱신]
[타고투저 시즌의 축소판. 때리고 또 때려낸다. 관중석을 두들기는 끊임없는 홈런포!]
[서울 세오레즈 vs 대구 더히트 2차전. 올 시즌 프로야구 공중파 시청률 최고 수치 기록.]
[운집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 그 앞에서 만들어낸 장타의 소나기.]
그리고, 그중 가장 주목받은 선수는.
"강해준이 또 터트렸군."
"시즌 2번째 3연타석 홈런인가?"
"조용하다 싶더니 마지막 3타석에서는 그냥..."
세오레즈의 야수, 강해준이었다.
[7타수 7안타 3홈런 8타점. KBO 역대 두 번째 한 경기 7안타.]
[정규 이닝 사상 최초 7안타! 또다시 폭주하는 비스트!]
[다시 보는 강해준의 악마 같은 안타 생산 능력.]
[37경기 타율 0.574.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강해준의 압도적 정확성.]
[마지막 타석 타구 속도 189.1km/h. 한국프로야구 타구 속도 측정 이래 가장 높은 수치 기록.]
장타들의 행진 속에서 처음에는 조용히 단타를 뽑아내나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타구 속도가 미친 듯이 올라가며 담장 너머로 넘겨버린 괴력의 스윙.
해준과 세오레즈의 타자들을 보기 위해 운집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저런 선수가 한국에 있었다고?"
"이 리그의 투수들의 구속을 고려한다면... 메이저리그에서는 120마일(193.12km/h)도 넘길 수 있는 스윙이군."
"왜 여태껏 조용했던 거지? 말도 안 돼. 저런 선수는 어느 리그에 있어도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을텐데..."
"일본에서 금맥이 발견되나 싶더니, 정작 한국에서는 아프리카의 별 같은 선수가 있었어."
하지만, 더욱이 그들이 믿지 못한 것은 해준의 이번 시즌 성적이었다. 올 시즌 타율 0.203 출루율 0.330 장타율 0.411 OPS 0.742. 타고투저의 한국리그에서는 백업에도 들지 못할 처참한 타격 성적.
"저런 스윙으로는 이런 성적이 나올 수 없을텐데...?"
"이제 기억났군. 일본의 구단 관계자가 말해준 적이 있어. 수비는 신과 같지만, 타격은 지렁이와 같다. 강이라는 선수가 저 선수였을 줄이야!"
"후반기 성적이 어떻게 되지?"
주로 일본에서만 활동하던 스카우트들은 급하게 넘어온 탓에 해준의 자세한 기록을 알고 있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해준의 후반기 성적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31경기 타율 0.541 출루율 0.677 장타율 1.036 OPS 1.713
리그는 다르지만, 2004년의 배리 본즈를 떠올리게 하는 괴물 같은 성적. 이런 성적은 대만, 일본, 미국. 그 어느 리그를 뒤져보아도 수준을 막론하고 찾아보기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KBO의 배리 본즈라 봐도 되겠어."
"그가 147경기를 뛰고 14할의 OPS를 기록했다는 걸 떠올려보자고. 그에 반해 이 강이라는 선수는 고작해야 31경기."
"...그렇다 해도 놀라운 건 마찬가지지. 잠깐, fuck... 뭐야 이거. 1군에 다시 콜업 된 전반기 6경기를 합친다면 성적이 더 올라가잖아?"
더욱 놀라운 점은, 다시 타격 사이클이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점. 스카우트들의 눈빛이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반짝였다.
'이건... 무조건 영입이다.'
'리그 수준을 고려할만한 성적이 아니야. 메이저리그에서도 무조건 통한다!'
'메이저리그 최고 타자가 온다고 해도 이런 성적을 기록할 수 있을까? 글쎄. 4할이라면 몰라도 5할을 훌쩍 뛰어넘는 타율은 힘들겠지.'
'타격에만 시선을 뺏기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야. 이 선수의 진짜 장점은 수비다.'
투포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최상위급 레벨로 소화하는 탑 티어의 멀티 유틸리티. 그러면서도 타격에서마저 한국 야구 역사를 뒤바꿔가고 있는 괴력을 발휘한다.
일본의 괴물들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이 선수가 가지는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피지컬도 훌륭하단 말이야..'
'잔 부상 기록조차 없군. 타고난 철인이야.'
'메이저리그의 혹독한 이동 거리를 충분히 견뎌낼 만한 재목이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퍼펙트 플레이어 그 자체.
이번 겨울,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영입 리스트 0순위에 해준의 이름이 도배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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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오레즈와의 3차전을 앞둔 8월 25일 오전.
대구 더히트의 라커룸.
더히트의 선수들, 특히나 오늘 경기에 출전하는 선발투수와 출전 가능성이 높은 불펜 투수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즌 2번째 3타석 연속 홈런포!]
[3경기 5홈런. 되살아나는 강해준의 핵폭탄급 장타력.]
[10할이 넘는 장타율. 강해준의 유례없는 폭주 페이스!]
[8연타석 안타. KBO 역대 신기록까지 남은 숫자는 4.]
경기를 앞두고 포털 사이트 스포츠란에 쏟아져 내리는 기사들. 그 주제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전 경기에서 3연타석 홈런포를 때려낸 해준을 다루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볼넷과 안타, 홈런이 쏟아진 지난밤, 그중에서도 해준의 활약은 특출났으니까.
하지만.
[강해준, 5연타석 홈런 정조준!]
[5연타석 홈런포, 다시 한번 탄생하는 대기록?]
[괴물의 멈추지 않은 장타 행진. 역사에 새겨질 페이스.]
이건 아니었다.
오늘 경기의 첫 두 타석에서 홈런을 쳐낸다면 더히트의 살아있는 전설, 이신우와 어깨를 나란히 할 해준.
말도 안 되지만 세 타석에서 홈런을 친다면..
'기록이 깨진다.'
'대선배의 대기록. 그걸 깨버리는 홈런을 우리가 허용한다고?'
'말도 안되지만... 정말 그렇게 된다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한국 최고의 단일 프렌차이즈 스타이자, 국민타자, 대구 더히트의 넘버 9. 그런 사람이 불혹의 나이에 세운 기록이 한 해도 가지 않아서 다른 타자의 손에 깨지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욱이 그것이 자신들에 의해서라면 필사적으로 막아야 한다.
물론 가능성은 희박한 일이었다.
전 경기에서 홈런을 쳤다 해서 다음 경기에서도 홈런을 칠 가능성이 높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괴물 자식이잖아.'
'다른 놈들이라면 몰라도..'
'그 자식이라면 모른다.'
상대가 그 강해준이었다.
KBO 역사상 다시는 나오지 않을 괴물.
한국프로야구의 투수들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흉포한 야수. 더히트의 선수들은 라커룸 한 곳에서 묵묵히 배트 그립을 다시 감고 있는 이신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결심했다.
'거르자.'
'무조건 걸러야지.'
'비난은 잠시지만, 기록은 영원하다.'
강해준을 거르는 것.
하지만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더히트의 넘버 9 이신우, 1904경기 1498타점. 최소 경기 1500타점 경신 초읽기에 들어가다.]
[49홈런. 오늘 경기에서 홈런 추가 시 최소 경기 50홈런 고지 정복!]
[두 개의 대기록이 걸려있는 3차전. 이신우, 불혹에 맞이한 제 2의 전성기.]
바로 같은 팀의 선배이자, 전설인 양상엽의 최소 경기 1500타점 기록. 그리고 세오레즈 조병민의 최소 경기 50홈런 기록.
그 두 기록의 향방이 오늘 세오레즈와의 3차전에 달렸던 것.
그 사실이 깨닫자, 대구 더히트의 투수들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우리가 거르면, 그 쪽도 거를텐데?'
'그렇다고 승부를 들어가면...'
'높은 확률로 쳐맞는다. 어제 그 괴물의 스윙을 보면 이건 무조건 맞을 수 밖에 없어.'
강해준을 피하자니, 이신우가 대기록을 달성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승부하자니, 이신우만이 가지고 있는 대기록에 해준이 이름을 올릴까 두렵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
그렇기에 대구 더히트의 투수들은 제발 자신의 차례에 해준의 타석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더 나아가.
'오늘 선발투수가 태준인가?'
'태준아, 힘내라. 이 형은 널 믿는다.'
'조기 강판만큼은 안 된다. 제발 막아줘!'
오늘 경기의 선발투수 정태준이 해준을 막아주길 간절히 기도했다. 정태준은 더히트에서 가장 촉망받는 선발 유망주로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35경기 등판, 89와 1/3이닝 7승 3패 8홀드를 기록하고 있는 우완 투수.
부드러운 투구폼에서 나오는 안정적인 제구와 경기 운영 능력은 앞으로 더히트의 10년을 이끌 재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 사실이 부담되는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마인드 컨트롤에 전념하는 정태준.
시간이 되자 포수 전용진이 그런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가자."
"...후. 알겠습니다."
그렇게, 호흡을 가다듬은 정태준이 마운드에 오르자.
"플레이볼!"
경기가 시작됐다.
+++
툭-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헬맷 아래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해준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차례 바라보고는 마운드를 바라보았다.
대구 더히트의 선발투수 정태준.
글러브로 얼굴을 가린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록은 절대 안 내주겠다는 눈빛인데..'
더히트의 정신적 지주이자 전설 이신우.
그 대선배의 기록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
해준은 평소 루틴대로 스파이크 끝을 배트로 툭툭- 치며 생각했다.
'그대로 올까?'
조건은 갖춰졌다.
서로의 대기록을 인질처럼 잡은 세오레즈와 더히트.
이신우가 최소 경기 1500타점과 50홈런을 기록할 기회.
그리고 자신이 5연타석 홈런을 쳐낼 기회.
두 팀 중 한 곳이 피해가기 시작한다면, 이 세 기록은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경우라면 보통은 승부가 정석이다.
"...후우."
숨을 고른 해준이 자세를 잡았다.
꿀꺽-
한편, 대구 더히트 파크의 프레스룸.
평소보다 더 붐비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곳은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승부?'
'피해 가면 비난을 피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피해가지 않으면..'
'지금의 강해준이라면 상당히 높은 확률로 갱신할 수 있겠지.'
지금 이 순간의 결정에 따라, 오늘 경기의 향방이 정해질 것이 분명했다. 대기록이 모두 사라진 시시한 게임이 될 것인가, 방어를 포기하고 서로의 목덜미만을 노리는 박진감 넘치는 게임이 될 것인가.
그리고, 기자들은.
'승부해라!'
'남자라면 물고 뜯어야지. 그래야 기삿거리도 쏟아지고.'
'한껏 기대를 모아놓고 피해버리면 이야기가 안돼지. 무조건 승부해!'
당연하게도 승부를 원했다.
반면, 경기장을 가득 메운 다른 이들의 속내는 다들 제각각이었다.
이신우가 기존의 기록을 지키면서, 새로운 기록마저 달성하기를 원하는 더히트의 팬들.
반대로 강해준이 모든 기록을 박살 내버리길 원하는 세오레즈 팬들.
누가 이기든 일단 붙길 바라는 기자들.
해준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는 스카우트들.
그 모든 이들의 시선이 마운드 위의 투수를 중심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후우..."
그 속에서 정태준이 투구판을 박찼다.
퍼엉-!
그리고, 결과는.
"...볼!"
모두의 기대를 벗어난 듯 보였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쏟아져 나오는 경기장. 더히트 팬들은 일단 기록이 안전해짐에 대해 안도했고, 세오레즈 팬들은 벌써부터 욕설을 내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자들 또한 실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거르는 건가?"
"아니지, 대놓고 거르진 않을 걸. 어떤 욕을 먹으려고."
"그럼?"
"승부 하는 척하면서, 배트가 닿으면 범타가 나올 정도로만 살짝살짝 빼는 거지. 정태준 특기잖아."
"혹시 모르잖아. 그냥 실수로 빠진 걸수도. 일단 보자고."
하지만 이제 고작 초구.
아직 성급한 판단보다는, 지켜보자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담감이 가중되는 듯,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정태준. 하지만, 빠르게 사인 교환만큼은 신속했다. 교환이 끝나자 정태준은 망설임 없이 다시 한번 투구판을 박찼다.
퍼어엉-!
"볼!"
하지만 결과는 연이은 볼.
그 모습에 기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기록을 포기했어."
"새로운 대기록을 달성은 못 해도, 기존의 기록은 확실히 지키겠다는 거지."
"원래 사람들은 이득보다는 손해에 민감하니까. 가진 거라도 잃지 않길 바라지."
"오늘 인터넷 좀 뜨겁겠는걸."
"뭐, 비난은 잠시지만 기록은 영원하다. 이런 말도 있잖아?"
누가 보아도 해준을 거르려는 분위기를 풍기는 정태준. 해준은 타임을 부르고는 타석을 벗어났다.
"답답하겠지."
"승부를 안 해오는 투수만큼 까다로운 것도 없으니까."
"그런데 완전히 빼는 것도 아니고 저 정도면 칠 만하지 않아?"
"원래 저렇게 조금씩 빼는 공을 건드리다가 타격폼이 망가지는 거야. 타격 사이클이 올라오고 있는 강해준 입장에서는 굳이 건드리고 싶지 않겠지."
기자들은 그런 해준을 보며 서로의 생각을 교환했다.
하지만, 정작 해준의 속내는 이들과 완전히 달랐다.
'승부할 생각이구나.'
경기에 나서기 전 분석하는 것은 투수의 투구폼이나, 투구 버릇, 볼 배합뿐만이 아니다.
심판의 스트라이크 판정 성향. 수비의 영향으로 데이터를 신봉하다시피 하는 해준은 그마저도 머릿속에 박아놓고 사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리고.
'김재기 구심이라면 아슬아슬하지만 스트라이크 콜을 얻어낼 수 있는 코스였어'
해준은 지금의 볼이 투수가 아닌, 심판의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구심이 왜 볼을 선언했는지조차 간파했다.
'오늘 경기가 그냥 경기가 아니라는 거지.'
대기록이 3개나 걸려있는 경기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시선이 쏠린 경기. 김재기 구심은 이런 경기에서 극도의 보수주의자로 변모한다.
평소 자신의 존을 고집하지 않고, 교과서적인 스트라이크존을 꺼내 드는 것.
'평상시에나 그렇게 하시면 욕은 좀 덜 드실텐데.'
해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아무튼 카운트는 2-0.'
정말로 승부할 생각이라면, 이제는 한 구쯤은 들어와야 했다.
콰직- 소리와 함께 축발의 스파이크로 단단히 몸을 고정하는 해준. 오늘따라 배트 손잡이를 휘감은 고무그립의 꺼끌꺼끌함이 손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느낌은 좋다.'
온몸의 신경 세포가 바짝 일어나 솜털 하나하나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관중석, 프레스룸, 사진 기자석.
어느 곳 하나 가릴 것 없이 그곳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들.
그것들이 그라운드 위에서 얽히고, 스치며 뜨거운 열기를 쏟아낸다.
"후우.."
해준은 다시 한번 호흡을 조절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살짝은 짧은 호흡. 폐간을 휘감은 뜨겁게 달궈진 공기가 빠르게 몸속을 들락날락하며 감각을 일깨웠다.
'천천히 타구 속도를 높일 생각 따위 없다.'
끼이익-
손아귀에 힘을 주자 배트 그립이 기분 좋게 압박되는 소음이 귓가에 울린다.
5연타석 홈런까지는 오로지 2개.
인생에 다시 없을 기회를 여유를 부리며 날려버릴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먹잇감을 덮칠 시기를 노리듯, 숨을 죽이며 집중력을 고조시킨다.
그 순간, 머릿속에 배트가 휘둘러지는 궤적이 그려졌다.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온 첫 번째 공.'
동시에 몸은 극도의 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근섬유 속 근육 세포 하나하나마저 짜내, 그 속에 깊숙이 숨어있던 에너지들이 있는 대로 긁어모은다.
스으윽-
집중력이 미친 듯이 날뛰며,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기 시작하자 해준의 동공이 확장됐다.
상대의 숨통을 끊을, 단 한 번의 스윙.
그 준비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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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극도로 차분해지는 머릿속. 아무것도 꺼려지는 것 없이, 모든 것이 확연해졌다.
'이건..'
최근 들어 이런 감각이 잦아졌다.
평소와의 자신과는 다른, 무언가를 해내야 할 때마다 극도로 끌어올려 진 집중력이 자신을 끌어들이는 무음의 영역.
초일류의 운동선수들만이 간헐적으로 들어선다는 플로우(flow) 상태.
해준은 그 속에서 시선의 끝에 서 있는 마운드 위의 투수를 바라보았다.
정태준은 와인드업에 들어가고 있었다.
"..흐읍."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잠겨지며 허파의 움직임이 멎었다. 의식보다 먼저 반응하는 행동들.
해준은 자신의 움직임이 미묘하지만, 투수의 리듬을 잡아채고 앞선 상태에 돌입했음을 깨달았다.
'이건..'
하지만 더이상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는다.
그저 본능처럼 숨 쉬듯 이루어지는 후속 동작들.
그 시작은 투구판을 박차는 투수를 본 순간이었다.
축발이 몸을 밀어내며, 디딤발이 허공에 떠 있는 장면마저 세세하게 눈에 잡힌다.
콰짓! 소리와 함게 땅에 닿는 디담발.
허리가 빠르게 회전하며 닫혀있던 왼쪽 어깨가 휙- 돌아가며 투수의 가슴이 새처럼 부풀어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뒤에 이루어지는 부드럽게 채찍처럼 넘어오는 팔스윙.
'..패스트볼.'
그리고, 분명 보일 리 없는 그립이 보였다.
동시에.
콰짓- 소리와 함께 자신의 오른발 스파이크가 어느새 몸을 밀어냈다.
끼이이익-!
이어지는 어마어마한 손아귀의 압박에 배트 손잡이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곧.
------------!
해준은 손끝에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각만이 어렴풋이 남아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