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47화 (47/137)

47. 전설의 대주자 (6)

3위 자리를 두고 벌이는 치열한 순위 다툼.

해준의 과감한 주루플레이로 분위기를 가져온 세오레즈의 공세는 매서웠다.

3번 유정호의 우익수 앞 안타로 무사 1, 2루를 만드는가 싶더니.

따아아아악-!

[결정적인 순간에 터진 조병민 선수의 빅 플라이! 우익수와 중견수 사이로 타구가 떨어집니다!]

호쾌하게 방망이를 돌린 4번 조병민이 싹쓸이 2타점 2루타를 터트린 것.

시작과 동시에 상대의 가드를 뚫어내고 선제 유효타를 먹인 세오레즈.

하지만 코쿤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1루 주자 정흥련 선수, 리드폭을 조절하다가... 이를 악물고 스퍼트!]

출루에 성공하자마자 적극적으로 도루를 감행하는 코쿤스.

그들의 무서운 점은 여기서 드러났다.

촤아아악-!

[2루심의 판단은.. 세이프, 세이프군요!]

끈질긴 견제에도 걸리지 않고, 투구에 들어가면 귀신같이 베이스를 훔쳐내는 스틸 능력.

[볼넷! 3번 노재석 선수가 끈질긴 승부 끝에 하중수 선수를 상대로 볼넷을 얻어냅니다!]

방망이를 짧게 쥐어 잡고 출루에만 집중하는, 욕심을 내지 않은 팀배팅.

따아아악-!

[2루타! 백호준 선수가 2루타를 뽑아냅니다. 그 사이 정흥련 선수, 그리고 뒤이어 노재석 선수가 홈플레이트를 밟습니다. 2타점 2루타 백호준 선수!]

그리고 그 모두를 불러주는 타자의 존재.

1회 말, 백호준의 2루타로 세오레즈를 1점차로 따라잡은 코쿤스.

그에 더해 3회에 들어서도 7번 허찬의 연속 도루, 그리고 9번 김지원의 희생 플라이로 동점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3-3의 치열한 기세 싸움이 이어지던 6회 초.

그 팽팽한 줄다리기 판을 다시 한번 뒤집은 것은 세오레즈였다.

따아아아아악-!

올림픽돔을 크게 가르는 대형 타구.

[이완석 선수! 배트를 집어 던지며 포효합니다! 경기를 리드하는 솔로 홈런!]

"좋았으으으으으! 봤냐, 아가들아!"

오랜만에 부활한 베테랑 이완석의 역전포가 터져나왔다.

"저 형까지 쳤는데 내가 죽을 순 없지."

"어디 나도 한 번.."

이어 7번 정이수의 볼넷과 8번 조진웅의 안타까지.

최근 컨디션이 좋지 않은 9번 한민곤이 삼진을 당하지만.

"후읍!"

해준의 배트가 다시 한번 경쾌한 파열음을 만들어냈다.

따아아아악-!

[큽니다! 큽니다! 갑니... 펜스에 부딪힙니다! 급히 튕겨 나간 공을 쫓아가는 우익수! 뒤늦게 잡아 송구하지만 강해준 선수를 잡기엔 늦었습니다!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는 강해준 선수의 2타점 3루타!]

"좋았어!"

좋은 흐름을 이어가는 장타를 폭발시킨 해준.

주자 일소의 3루타였다.

6회 초, 경기 스코어는 6-3.

다시 한번 세오레즈 측으로 넘어간 승기.

하지만 코쿤스라고 포기할 리가 없었다.

7회 말.

촤아아아아악-!

"세이프!"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립니다! 이것이 코쿤스의 진짜 모습이죠. 2번 정흥련 선수가 다시 한번 홈을 밟는 데 성공합니다!]

세오레즈 팬들을 경악시킨 과감한 도루들이 활화산처럼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투수를 흔들고, 베이스를 훔치며, 한 발자국 더 앞서가는 주루로 승부의 균형추를 되돌려버리는 코쿤스.

치열함을 넘어 독기마저 서려 보이는 물고 물리는 추격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광경을 바라보던 관중들의 심장이 거칠게 박동하며 경기장을 가득 메우는 열기를 토해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몇몇은 그 열기가 만들어내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탄식하듯 소리쳤다.

"그래, 끝까지 한 번 가보자 오늘 게임!"

"치고 박고 아주 난리네 난리! 투수들은 자동문이냐!"

"슬슬 끝내라! 보고 있는 내가 숨이 다 막힌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답답함을 느끼는 측은 코쿤스였다.

평소보다 한껏 끌어올린 페이스로 세오레즈를 상대했지만, 승기를 굳히려 할 때마다 같은 상대에게 번번이 가로막혔으니까.

"그리고 일단 쟤 좀 어떻게 해봐!"

이 시점에서 해준의 성적은 4타수 3안타 2도루 1득점 2타점.

해준은 치고, 달리는 것도 모자라.

퍼억-!

[오늘도 강해준 선수는 그라운드 위를 납니다! 2루타성 타구를 뺏어내는 야수의 호수비!]

수비마저 평소와 다름없이 야수와 같았다.

당연하게도 코쿤스 팬들의 입장에서는 해준의 존재 자체가 악몽, 그 자체.

그렇게 끊임없이 코쿤스를 괴롭히며 게임을 이끄는 해준.

그 흐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8회 초.

따아악-!

[중전 안타! 다시 한번 출루에 성공하는 강해준 선수!]

마지막이라 볼 수 있는 역전 찬스마저 스스로 불러들였다.

+++

[보는 제가 다 숨이 막힙니다. 게임이 몇 번을 뒤집히는지 모르겠네요. 이도훈 해설위원은 어떻게 보십니까?]

[...어. 솔직히 생각 없이 보다 보니까 8회라서 딱히 드릴 말씀이 없네요. 타격전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스피드하게 진행된다는 느낌이에요. 호흡을 붙잡고 방심할 틈을 주지 않는... 그런 게임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도훈의 돌발 발언에 당황한 한재오 캐스터. 그가 재빨리 단어 선택을 수정했다.

[아.. 정신없이 보셨군요. 정신없이.]

[네? 아, 하하. 그렇습니다. 생각 없이 보다 보니까 말이 헛나왔네요.]

[...하..하하..그렇습니다! 시청자분들의 긴장을 놓고 놔주질 않는 어마어마한 주루전! 이게 최근 모습을 감추고 있는 주루의 진정한 묘미 아니겠습니까?]

한재오 캐스터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는 채팅창의 반응 또한 나쁘진 않았다.

본래 털털한 성격의 이도훈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분위기 그랬다. 사소한 해설의 실수 같은 것보다는, 경기에 집중해야 하는 몰입감.

그만큼이나 이번 경기는 시청자들을 빨아들이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강해준 선수. 언제부터 이런 카리스마를 가지게 됐지?'

한재오 캐스터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해준을 바라보았다. 숨을 몰아쉬며 1루 베이스를 밟고 있는 해준.

발로 끊임없이 점수를 내는 코쿤스에 홀로 대항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주는 유일한 선수였다.

오늘 세오레즈 타자들의 성적은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모두가 끈끈하게 타선을 이어가며 각자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상황.

하지만 이미 경기장 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강해준에게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갈 때마다 무언가 해줄 것 같은 느낌이야.'

어쩌면 KBO 역사 이래 다시 없을 슈퍼스타의 탄생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재오 캐스터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구 더히트의 넘버 9. 이신우 선수의 전성기와 비견되는 분위기라..'

한재오 캐스터만이 아니었다.

프레스룸에서 경기를 바라보는 기자들, 경기장 어딘가에서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메이저리그 스카우트 3인방, 전력분석원, 이름 모를 구단의 관계자들까지.

'강해준. 확실히 성장했어.'

'예전과는 다르다. 이제는 경기 자체를 휘어잡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워.'

'근래 들어 희미했던 슈퍼스타의 계보를 잇는 사람이 강해준이라고?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누가 이런 광경을 상상했을까.'

들끓어 오르고 있는 관중들의 함성에 비례해, 그들의 사무적이던 대화 소리는 오히려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일이었던, 생계의 수단으로 변질된 야구 경기.

하지만 이번 게임만큼은 달랐다.

한 명의 팬으로서, 모든 것을 잊고 몰입할 수 있었기에.

'슈퍼스타? 그렇다면 이번에도..'

'무언가 보여줄 거다.'

'저 분위기. 억눌린 무언가가 폭발 하기 직전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시선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한편, 강해준에 이어 2번 타자로 나선 장건우.

그가 있는 힘껏 몸쪽 공을 당겨 쳐 외야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

따아아악-!

날카롭게 울리는 타구음에 한재오 캐스터가 급히 시선을 돌렸다.

텅-!

펜스를 직격으로 때려내는 타구.

[....타! 안타! 하지만 튕겨진 타구가 그대로 우익수의 글러브로 들어옵니다! 2루로 향하던 장건우 선수, 황급히 1루로 귀루하는군요! 1루 송구... 세이프! 하지만 그사이 3루를 밟은 강해준 선수! 세오레즈가 다시 한번 게임의 판세를 뒤집을 기회를 잡는 데 성공합니다!]

한재오 캐스터 가슴 속 깊이서 끌어 오르는 열기를 토해내며 상황을 중계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심정만큼이나.

해준의 호흡 또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후우...후욱."

달리고 또 달리다 보니 체력이 평소보다 빠르게 방전되는 느낌. 해준은 땀을 훔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네.'

그동안 누적된 피로도 피로지만, 한껏 끌어올린 익숙지 않은 감각이 신경을 쉽사리 지치게 만든다.

하지만 아직은 그 날의 예리함을 잃지 않은 상태.

'이번이 거의 마지막 기회다.'

해준은 마운드에 서 있는 투수를 바라보았다.

'린 로메로.. 비록 용병이 불펜까지 내려왔지만 쉽지 않은 상대야.'

일반적으로 구단에서는 용병이 1선발급 활약을 해줄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강력한 구위에도 불구하고 정작 제구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며 불펜으로 내몰린 린 로메로.

에이스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용병의 말로는 뻔하다.

퇴출.

그리고 그전까지 임시로 내려간 불펜.

여기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압도적인 구위로 상대 타선을 짓누르며 언터쳐블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더니, 코쿤스가 새 용병 영입에 난항을 겪으며 그대로 눌러앉아 버린 것.

게다가 용병인 만큼 그 활용도에 제한이 없었고, 국내 투수들보다 혹사 논란에서 자유로운 만큼 어느 상황에서나 소방수로 투입할 수 있었기에 코쿤스는 린 로메오를 그대로 끌어안고 가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용병답지 않게 퀵모션과 견제 동작 또한 훌륭하다.

'어디 볼까..'

그렇기에 경계심을 바짝 끌어올린 해준은 자세를 낮추며 슬금슬금 베이스에서 발을 떼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3루수.

우완투수인 린 로메로 또한 정면에서 발을 굴리는 해준을 쏘아보았다.

'이대로라면 홈스틸은 무리겠지만...'

구해형의 주루 감각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안다.

이런 상황에서 홈스틸은 자살행위일 뿐이라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준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2도루. 어떻게든 도루를 한 개 더 추가해야 한다.'

[아웃라이어 인스트럭터 파트]

........

*이번 경기 목표

-3도루 이상 기록 시, 주루 기법 수치가 상승합니다. (진행 중..)

-평균보다 효율적인 주루를 기록 시, 주루 센스 수치가 상승합니다. (완료)

8회 초인 만큼 타순이 한 번 더 돌기에는 남은 이닝이 부족했다. 결국 주루를 더욱 향상 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소리.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대로 홀로 무언가를 해내기엔 너무나 제한적인 환경.

그렇기에 해준은 생각을 달리했다.

'지금까지 이만큼 날뛴 것도 활용해 먹어야겠다.'

투수, 포수, 내야수, 심지어 관중들까지.

그 모두가 호흡 하나까지 놓치지 않을 기세로 온전히 자신에게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순간, 누구도 예상치 못한 빈틈이 발생한다.

게다가 해준은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는 사전에 장건우와 계획을 맞춰둔 상태였다.

'내가 출루하고. 건우 너도 출루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무조건 뛰어라.

그리고, 장건우는 그 말을 잊지 않았다.

린 로메오가 해준의 리드폭을 줄이기 위해 견제구를 던지려는 순간.

"로메오!"

포수 양창섭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장건우 선수! 모두의 시선이 강해준 선수에게 집중되는 순간을 파고듭니다!]

포수의 외침에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린 로메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2루를 향해 있는 힘껏 내달리고 있는 장건우.

그 모습에 린 로메오는 본능적으로 2루를 향해 송구를 해버리고 말았다.

파앗-!

그리고, 그 순간이.

'지금!'

해준이 만들어낸 빈틈이었다.

[아아앗! 강해준 선수, 그 사이를 노려 홈스틸을 시도합니다! 세오레즈의 더블 스틸!]

폭발적으로 그라운드를 짓눌러나가며 쑥쑥 몸을 전진시켜나가는 해준.

"이런 제기랄!"

양창섭이 뒤늦게 자책 어린 혼잣말을 내뱉었지만, 린 로메오는 이미 2루를 향해 공을 던진 상황이었다.

"세이프!"

곧이어 2루심의 세이프 콜이 울려 퍼졌다.

해준만큼은 아니더라도 장건우 또한 도루라면 만만치 않은 주력을 자랑하는 선수.

투수가 뒤늦게 알아차린 시점에서 이미 끝난 게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2루에서의 판정 여부는 양창섭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2루수, 어서!"

어서 홈을 향해 공을 던지라는 포수 양창섭의 외침.

2루수 김지원이 이를 악물며 홈을 향해 세차게 공을 뿌렸다.

그 사이 어느새 홈플레이트의 지근거리까지 다가간 해준.

'잡혀라!'

양창섭은 그런 해준의 방향으로 오던 공을 잡아채며 글러브를 끌어당겼지만.

촤아아아아악-!

있는 힘껏 왼쪽 어깨를 비튼 해준의 몸이 아슬아슬하게 글러브를 비껴갔다.

우와아아아아아아-!

그와 함께 경기장 내부에 휘몰아치는 뜨거운 열기.

턱-!

어느새 해준의 손이 홈플레이트에 닿아있었다.

동시에 심판의 양팔이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펼쳐졌다.

"....세이프!"

-----------!

그리고, 경기장이 뒤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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