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레이저! (2)
경기 시작 전.
세오레즈의 라인업이 발표됐다.
1 강해준 RF, R
2 유장천 SS, R
3 조병민 3B, R
4 김지훈 1B, R
5 이완석 DH, R
6 장건우 2B, L
7 정이수 LF, L
8 한민곤 CF, L
9 조진웅 C, R
P 잭 갤런
평소와는 살짝 다른 라인업을 가져간 서울 세오레즈.
지명타자를 소화했던 조병민이 어깨 부상에서 벗어나며 본래 포지션인 3루로 돌아갔고, 길어진 부진으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던 장건우 또한 라인업에 복귀하며 자연스럽게 내야에 자리가 사라진 상태였다.
"송 감독님, 강해준은 우익수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어느 포지션에서나 뛰어난 수비를 자랑하는 해준은 우익수로 나설 예정이었다. 코쿤스 측 또한 그 변화를 알아차렸다.
"원래 우익수가 채태욱이었지?"
송진수 감독의 말에 허창민 코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목 부상으로 이탈했던 중견수 한민곤이 복귀하면서 다시 2군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강해준이 중견수, 채태욱이 우익수로 출장했을 겁니다."
"...흐음. 그런가."
송진수 감독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꿈치를 툭툭 치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중견수 한민곤은 송구가 좋은 편이지만 부상 여파가 남아있을 테고.. 정이수야 원래 주자억제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 그렇다면 남은 건 강해준인데..'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강의 야수라는 평가를 받는 그라운드 위의 괴물. 라인업이 좌타자 일색인 코쿤스로서는 부담스러운 사실이었다. 당겨치는 족족 그런 선수의 앞으로 공이 간다는 소리니까.
송진수 감독이 물었다.
"강해준이 외야수로 나설 때 송구 속도가 어느 정도였지?"
"어디 보자.. 여깄네요. 최고 150.3km/h입니다."
강해준은 외야 어디를 맡든 간에 어마어마한 수비 범위와 캐칭, 그리고 정확한 송구 실력을 뽐내는 선수였다.
어디 하나 모자란 곳 없는 S급의 외야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진수 감독의 말투에는 여유가 깃들어있었다.
"뛰기 딱 좋은 속도로군."
허창민 코치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외야수 중에 충분히 상위권에 속하는 속도긴 합니다. 그래도 우리 애들 발을 막기엔 부족하죠."
코쿤스의 공격 테마는 한 베이스씩 더 가는 야구.
도루는 그중 일부일 뿐, 전문가들은 코쿤스의 진정한 강점을 베이스런닝 그 자체에서 찾곤 했다.
외야수의 커버 범위, 송구의 속도, 외야수 위치에 따른 루상과의 거리, 그 외의 수많은 경우를 조합해 어떻게든 진루 확률을 높인다.
"어디서 메이저리거라도 데려오면 모를까. 오늘 세오레즈의 주자억제력으로는 우리 애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감을 내보였다.
공이 외야로 향하는 순간, 코쿤스가 가진 진정한 무기가 아무런 장애물 없이 위력을 발휘할 것을 알았으니까.
"...음 좋아. 좋아."
이제 주자에게 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남은 포지션은 투수와 포수. 송진수 감독은 마운드에 올라가 있는 장신의 투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오레즈의 2선발 잭 갤런.
그는 날카로운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평소보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퀵모션 느리고, 견제 능력 떨어지고. 거기다 우완투수. 어때, 오늘은 몇 개나 훔칠 수 있을 것 같아?"
허창민 코치가 말했다.
"포수 조진웅의 송구 능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죠. 프레이밍이 쓸만하긴 해도 어디까지나 공격형 포수니까요. 저는 최소 5개 이상 봅니다."
극타고투저의 흐름이 지배하는 근래 한국프로야구리그.
타자들은 벌크업에 몰두했고, 힘을 키우며 타격 기술을 진보시켰지만 그만큼 도루에 대한 관심도는 나날이 떨어져만 갔다.
그렇기에 투수와 포수들 또한 타자의 출루 자체를 막는데 기량이 집중되기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10년 전과 비교하여 도루를 억제하는 기술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떨어진 상황이 된 지 오래.
그 속에서 코쿤스의 역발상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스갯소리라 할지라도, 한국 육상의 미래가 모였다는 서울 코쿤스의 야수진이다.
지금 이 한국프로야구에서 이 폭발적인 스프린터들을 막아낼 수 있는 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송진수 감독은 자신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시작해보자고."
그렇게, 서울 세오레즈와 서울 코쿤스의 1차전이 막을 열었다.
+++
먼저 포문을 연 곳은 코쿤스였다.
따아아악-!
[추정빈 선수가 초구를 건드립니다. 내야 땅... 앗! 송구가 빠지는군요. 투수 실책으로 출루하는 추정빈 선수.]
주자의 빠른 발을 의식하고 있던 투수 잭 갤런.
그가 황급히 송구한 공이 1루수의 글러브를 벗어나 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크게 빠지진 않은 탓에 2루까지 가는 것은 막았지만, 시작부터 일이 꼬여버렸다.
[너무 성급했네요. 잭 갤런 선수. 주자의 발을 너무 의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좌타에 발이 빠른 추정빈 선수인 만큼 서두른 모습을 보였는데, 투수는 저래서 안 됩니다. 항상 침착해야죠.]
"...fuck!"
수염을 거칠게 한차례 헤집은 후 욕설을 내뱉은 잭 갤런. 자신의 실책에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벌써 저래? 앞으로 어쩌려고.'
그 모습이 1루 주자 추정빈의 시선에 잡혔다. 그는 보호구를 벗어 1루 코치 오승만에게 넘기며 눈짓으로 물었다.
'흔들어볼까요?'
올해 한국프로야구 1년 차 잭 갤런.
지난 코쿤스와의 등판에서 그는 이미 3이닝도 견뎌내지 못하고 강판당한 전적이 있었다. 그만큼 주자억제력이 떨어지는 그에게 있어 코쿤스의 주자들은 악몽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벤치의 사인을 확인한 오승만 코치의 허락이 떨어졌다.
'리드폭을 넓게 잡으면 분명 종으로 떨어지는 변화구 구사에 부담을 느낄 거야.'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커터와 스플리터를 구사하는 잭 갤런. 그가 스플리터를 요구하는 포수의 사인을 거부하며 포심패스트볼과 커터를 위주로 게임을 풀어나가기 시작한 것.
당연히 어느 정도 구종을 한정시킨 코쿤스 타자들은 수월하게 타격에 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타가 나온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강해준 선수! 다이빙! 라인드라이브성 타구가 글러브 속으로 빨려들어갑니다!]
기분 좋게 잡아당긴 타구가 해준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가는가 싶더니.
부우웅-!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nice!"
해준의 수비를 보고는 심리적 변화라도 있었는지, 잭 갤런이 곧바로 스플리터를 구사하기 시작한 것.
그 모습에 1루 주자 추정빈은 플랜을 빠르게 변경했다.
'진짜 뛴다.'
1루보다는 2루에서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더 효율적으로 잭 갤런의 신경을 분산시킬 수 있다. 실제로 지난 등판에서도 잭 갤런은 1루보다는 2루 주자에게 더 신경을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을 정리한 추정빈은 스텝 템포를 본격적으로 조절해나갔다.
'하나...두울...세엣.'
거북이라도 하품이 나올 것 같은 잭 갤런의 투구. 그만큼 위력적인 공을 뿌리고 있었지만, 주자 입장에서는 저것보다 손쉬운 먹잇감이 없었다.
그렇게 2구와 3구째. 완전히 타이밍을 잡았다는 확신이 든 추정빈은 4구째에서 발을 박찼다.
'훔쳤다!'
수많은 경험이 말해왔다. 이건 세이프라고.
하지만 우연하게도, 그 순간 커다란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이근석의 배트에 가운데로 몰린 스플리터가 걸려든 것.
따아아아악-!
[쳤습니다! 이근석 선수의 타구!]
그 순간 추정빈은 움찔하며 속도를 늦췄다. 우익수라면 그 괴물 강해준이 수비를 보는 곳. 타구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다행히도 글러브 속으로 공이 빨려 들어가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쏜살같이 쏘아져 나가 우측 담장을 직격합니다!]
'좋았어, 이건 갈 수 있다!'
다시 빠르게 그라운드를 박찬 추정빈. 내심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도루는 사라졌어도 3루까지 갈 기회가 왔으니까.
워낙 총알 같은 타구였지만 자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한 상태.
거기다 강해준의 위치와 3루까지의 거리, 그리고 자신의 주루 속도까지 고려한다면 3루 베이스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높았다.
추정빈은 빠르게 2루를 돌았다.
[추정빈 선수! 거침없이 2루를 돌아 3루로 향합니다. 하지만, 강해준 선수! 이대로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때 해준은 막 송구 자세에 들어간 상태였다.
으드득-
이를 악물며, 도움닫기를 시작한 해준.
오른발을 왼발로 가져가며 전진력을 만들어내고, 오른발 한 차례 더 밀어냄과 동시에 왼발이 앞으로 뻗어 나가며 밸런스를 안정시킨다.
그렇게 발생시킨 힘이 폭발적으로 돌아가는 허리를 타고 올라 어깨로 전달.
휙- 어깨가 휘둘러지며 공이 빠르게 해준의 손끝을 떠났다.
---와아아아아아아!
그 모습을 보며 몇몇 관중들이 기립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해준의 송구가 그라운드를 갈라버릴 듯 어마어마한 기세로 날아가기 시작 한 것.
그 궤적을 확인한 3루 코치 오승만의 동공이 급속도로 확장됐다.
예상과는 다르게 공 끝이 죽지 않고 계속해서 쭉쭉 뻗어 나가며 어느새 3루 베이스 근처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가 다급히 사인을 보냈다.
'오지 말라고?'
한창 2루를 통과하고 3루를 향해 내달리던 추정빈.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와서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이대로라면 세입일텐데 왜..'
그 순간, 귓가에 희미하게 잡히는 한 소리.
그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이건 뭐..'
공기와 맹렬하게 마찰을 일으키는 공의 회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벌써 도착했다고?'
순간 등줄기가 오한에 적셔지는 착각 속에 빠져들 정도.
추정빈은 자신의 오른쪽 공간이 통째로 밀려오는 압박감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날렸다.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 부상확률이 높은 자세였지만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촤아아아악-!
유니폼이 그라운드 위를 스치며 베이스에 빠르게 도달하는 그의 오른손.
'...제기랄!'
하지만 추정빈은 손끝에서 베이스가 닿기도 전에, 또 다른 것이 그의 손끝을 스치는 감각을 느꼈다.
눈을 질끔 감는 추정빈.
이미 공은 3루수 조병민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간 채로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태그한 뒤였다.
3루심의 확신에 찬 콜이 울려 퍼졌다.
"....아웃!"
와아아아아아아-!
믿을 수 없는 수준의 송구.
그 광경에 경기장 전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흡사 메이저리그에서만 보던 경기 장면에 캐스터 또한 흥분한 기색으로 외쳤다.
[아웃, 아웃입니다! 강해준 선수가 믿을 수 없는 송구를 보여주며 코쿤스의 발을 봉쇄해버립니다!]
"...후우."
[ASSIST!]
[송구속도:157.75km/h]
해준은 그 장면을 보고서야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고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공을 던졌을 때의 그 짜릿한 감각.
속도도 속도지만, 그 궤적이 지금까지의 송구와는 그 궤를 달리했다. 자신의 시야에서 보았을 때는 그냥 레이저처럼 쏘아져 나간 것만 같았으니까. 게다가.
'몇 킬로가 늘어난 거야?'
속도가 폭등했다.
자신의 기존 최고 송구 속도 보다 7킬로는 늘어난 송구. 어깨가 평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강렬하게 전해져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첫 번째 보살을 기록하였습니다.]
[특수모듈 - '더 레이저 맨The Laser man'의 출력 스택이 증가합니다.]
[보살을 기록할 때마다 스택이 증가합니다.]
[출력 한계 스택 수치는 5입니다.]
[해당 스택은 경기가 끝나면 초기화됩니다.]
[현재 레이저 출력 스택: 2]
눈앞에 떠오른 홀로그램.
그와 동시에 자신의 어깨 근육에서 한 차례 더 질겨지고 탄력 있게 변하는 느낌이 전해져오고 있었다.
"...후아."
해준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미쳐버리겠네."
그 짜릿한 공의 궤적 다시 한번 보고 싶었으니까. 방금도 믿기지 않았는데, 다음번은 어떨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궁금했다.
거기서 다시 성공시킨다면?
그리고 3번째 보살에 성공한다면?
자신의 손끝에서 던져질 공은 분명 지금보다 더더욱 비현실적인 궤적으로 그라운드를 갈라버릴 것이다.
"내가 바란 게 바로 이거라고! 좋았어! 더 안 바래. 앞으로도 그렇게만 부탁할게, Did you get it?"
잠시 뒤, 해준이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더그아웃으로 향하자 해준이 오기를 기다리던 잭 갤런이 말을 걸어왔다.
'별일이네.'
무뚝뚝하고 거칠기로 유명한 잭 갤런이다. 해준 또한 그와는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 잭 갤런의 말에 직원이 통역을 해주려는 순간, 해준이 유창한 억양과 발음으로 대답했다.
"더 빨라질 것 같은데?"
"뭐?"
하지만 해준은 대답보다는 그저 씨익- 웃어 보이며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개만 잡아보자.'
오늘은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