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28화 (28/137)

28. 별이 빛나는 밤에 (1)

금요일 오후 10시 45분 고척돔.

이미 경기 시간이 4시간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워! 어! 워! 어! 오우우우우! 홈! 런! 워! ...."

관중들이 목이 터져라 외치며 극적인 상황을 끌어내고자 하는 세오레즈 특유의 홈런콜. 최근 들어 드물었던 그 광경이 근래 들어 계속해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 함성들 사이로,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따아아아아악-!

와아아아아아아!

순간 앉아있던 팬들조차 벌떡 일어서게 만드는 타구.

모두의 고개가 허공을 유영하는 궤적을 따라 돌아갔다.

하지만 결과는 우측 폴대를 살짝 빗겨나가는 파울 홈런.

오우우우우!

아쉬움 섞인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강해준.

타석을 벗어나며 공을 쳐 냈을 때의 감각을 되새겼다.

그리고는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방망이를 몇 번 휘둘러보며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죽어라 소리를 지르며 자신에게 기대를 보내는 관중들.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 그 열기를 그대로 받아들이자 호흡이 가빠진다.

"...후.. 후읍."

6회, 루카스에게 또 한 번 일격을 가하며 멘탈을 무너트리는 데 성공했다. 그 덕에 연속으로 볼넷을 내준 루카스는 5번 타자 김지훈에게 동점 적시타를 허용하며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때부터 세오레즈와 이칼코메드의 팽팽한 접전이 시작되어 결국 연장까지 접어들고 있었다.

[자.. 강해준 선수, 10회 말 1사, 주자는 1, 2루. 초구를 노려봤으나 우측 폴대를 아쉽게 빗나가는 파울 홈런을 쳐냅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특별 해설로 출연한 전직 메이저리거 이도헌.

그는 흥미 어린 눈빛으로 강해준을 바라보았다.

저런 선수는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모두의 예측을 깨부수고, 보내는 기대에 족족 부응하는, 보는 것만으로 관중들을 미쳐버리게 만드는 스타 플레이어.

타석에서 자세를 취하는 강해준을 물끄러미 관찰하던 그는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칼코메드 입장에서는 앞선 7, 9회처럼 볼넷으로 거르는 게 최고의 선택일 겁니다. 지금의 강해준 선수는 감각이 아주 날카롭게 서 있어요. 저런 선수한테는 쉽게 승부를 들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하하, 하지만 정작 이도헌 씨는 벤치의 사인도 무시하시고 정면 승부 하는 장면으로 또 유명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땐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강해준 선수라면...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야구 머리라고들 하죠? 수싸움에서 상대 배터리를 앞서고 있어요. 6회 초구 포심 패스트볼을 두드렸을 때는 솔직히 저게.. 아, 죄송합니다. 저 선수가 사람인가 싶었습니다. 누가 봐도 받쳐놓고 쳤거든요. 들어올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소리죠. 그렇지 않으면 저런 스윙 궤적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앞선 두 타석에서 철저히 변화구 승부를 했고, 결과가 좋지 않았으니 패턴에 변화를 줘야 할 타이밍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초구부터 저렇게 확신했다는 듯이 과감하게 휘둘러 홈런을 만들어냈다는 건.. 타고난 거죠.]

[수 싸움에서 말이죠?]

[그것만이 아니라 배짱, 확신, 예측에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까지. 앞서 말했다시피 저런 선수는 걸러버리는 게 최선이에요. 오늘의 강해준 선수는 뭘 해도 되는 날입니다.]

그 말대로 이칼코메드의 배터리는 강해준과 승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퍼어억-!

"볼-"

이번에는 확실하게 배트가 닿지 않는 거리로 공을 빼는 박지수. 강해준은 한숨을 쉬며 이제까지의 결과를 확인했다.

[게스히팅 보상권 장타율 순위 현황]

1.포심 패스트볼 4.000

2.슬라이더 3.000

3.스플리터 0.000

4.체인지업 0.000

'...이거, 너무 몰입해서 생각도 못 했네.'

6회에 기록한 홈런 덕분에 폭등해버린 포심 패스트볼 상대 장타율. 최선은 슬라이더, 차선은 스플리터 모듈을 얻어내야 하는 해준으로서는 난감한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모듈은 가장 높은 장타율을 기록한 단 하나의 구종에 관련된 것으로 지급된다.

'그렇다고 프로가 경기를 뛰는데 일부러 안칠 수도 없고..'

그만큼 6회에서 때려낸 홈런에는 확신이 있었다.

'박지수 선배는 두 타석 정도에서 결과를 좋지 못하면 볼배합을 바꾸는 경향이 있으니까.'

KBO 1군 소속 포수들의 선호 볼배합, 로케이션 위치, 변화 패턴까지. 모든 것을 머릿속에 때려 박고 다니는 강해준이었다. 메이저리그처럼 서른 개의 팀이 득실거리며 허구한 날 새로운 선수들이 올라오는 곳이라면 몰라도, 겨우 10팀인 KBO는 가능하다.

'이대로는 볼넷이다.'

물론 승부를 걸어온다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슬라이더를 쳐낸다 하더라도 이미 장타율을 결정하는 타수가 너무 늘어났다. 덕분에 슬라이더의 장타율은 40할에 이르는 포심 패스트볼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

머리가 아파 오는 상황.

그때, 경기에 관여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박이인 감독이 10회 말에 이르러서야 움직임을 보였다. 주의 깊게 벤치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초청 해설위원 이도헌이 그것을 먼저 발견했다.

[세오레즈. 대타를 투입하는 것 같습니다]

[어? 정말이네요. 대기 타석에서 몸을 풀던 장건우 선수가 벤치로 돌아가고.. 아! 조병민! 조병민 선수입니다. 경미한 어깨 부상으로 출장을 하지 않던 조병민 선수. 박이인 감독이 세오레즈가 낼 수 있는 최고의 패로 승부를 거는군요.]

전 시즌 152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0.352 출루율 0.445 장타율0.689를 기록하며 50홈런의 경지를 정복한 세오레즈의 간판 강타자이자 KBO 홈런왕 조병민.

그가 대기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칼코메드 측의 벤치가 부산스러워졌다.

강해준은 그 광경을 바라본 순간, 전류가 등골을 타고 찌르르 흐르며 한 기록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 선배의 셋업 주창민 통산 상대 전적은 21타수 14안타 5홈런.'

6할 6푼 6리에 이르는 무지막지한 타율.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도저히 정면 승부를 택할 수준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돌아버린 상성 관계였으니까.

그렇다고 투수를 교체하기엔, 그동안 이칼코메드의 불펜진에 쌓인 피로도가 너무 높다.

앞으로 한참이나 남은 시즌을 바라보며 운영해야 하는 이칼코메드의 감독 박상한으로서는 선택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쾌조의 컨디션을 보이는 강해준이냐, 상대 전적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이는 조병민이냐, 아니면 무리한 투수 교체냐.

고민을 길지 않았다.

벤치의 사인을 받은 박지수는 곧바로 작전을 변경했다.

퍼어어어억-!

"스트라이크!"

'좋았어!'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보더라인 승부로 다시 싸움을 시작하는 투수. 카운트는 1-2로 불리한 상황에 몰렸지만, 해준은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워! 어! 워! 어! 우오오오오! 홈! 런! 워! 어!

둥! 둥! 둥! 둥!

경기의 긴장감이 서서히 고조되며 절정에 이르기 직전.

타석의 모래 알갱이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스파이크 끝을 배트로 툭툭 치던 해준은 고개를 들었다.

홈런콜에 맞춰 단체로 발을 구르기 시작하는 관중들.

일치된 응원소리가 경기장을 진동시키며 그라운드 곳곳에 내려앉아 퍼지고 있었다.

모두가 꿈꾸는 광경 속에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른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해준다면 보답해야겠지.'

반면 압도적인 홈 관중들의 응원 모습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상대 투수 주창민.

퍼어억-!

"볼-"

덕분에 흔들림 없을 것 같았던 제구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카운트는 2-2.

고척돔을 가득 메운 열기가 타석에 서 있는 해준의 얼굴 위까지 후끈- 전해지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는 투수, 땀범벅이 되어 침묵한 채 조심스럽게 미트 위치를 조정하는 포수, 그리고 타석의 강해준.

이곳이 승부를 가르는 경계선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칼코메드의 여우 박지수는 한가지 모험을 걸었다.

'이대로 조병민을 상대하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그렇다고 해서 강해준에게 쉽게 들어갈 순 없어.'

박지수는 그동안 강해준에 대해 파악한 자료들을 재빠르게 다시 한번 검토했다.

'배트가 나올 확률이 가장 높았던 건 포심 패스트볼.'

타율도 가장 높게 기록했지만, 박지수는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다시 한번 포심 패스트볼을 택했다.

공이 날아와야 할 위치는 바깥쪽 높은 곳.

배트에 맞추더라도 범타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맞추는 걸 피할 수 없다면 맞추도록 만든다. 단, 안타는 내줄 수 없어.'

떨리는 호흡을 진정시킨 투수가 다시 한번 마운드를 박찼다.

슈우우우욱-!

'..좋았어!'

그 순간 확신한 박지수. 타석의 강해준이 뒤늦게 시동을 건 것이 느껴졌다.

'범타다!'

다만, 박지수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강해준의 포심패스트볼 커버 에어리어. 그 한계는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음을.

까드득-

입을 악물며 배트를 휘두르는 강해준.

한참이나 바깥쪽을 향해 날아드는 공을 쳐 내기 위해, 온몸의 근육이 비정상적인 움직임에 비명을 질렀지만, 배트의 헤드만큼은 포심 패스트볼을 사냥하기 위한 궤적을 충실하게 따라 쏘아졌다.

따아아악-!

[아아아아아아! 강해준 선수! 쳤습니다! 1루수는 있는 힘껏 점프! 하지만...]

고척돔이 뒤흔들렸다.

+++

고척돔의 라커룸으로 향하는 내부 통로.

보기 드물었던 강해준의 끝내기 안타가 작렬한 후, 팀의 모든 선수들은 눈을 까뒤집은 채 환호했다.

덕분에 해준은 온몸에서 찐득찐득한 음료수의 잔재를 느끼며 히어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팬들에게 일일이 감사 인사를 전한 뒤에야 라커룸을 향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소 흥분이 진정됐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당연히.

[게스히팅 보상권 장타율 순위 현황]

1.슬라이더 3.000

2.포심 패스트볼 2.500

3.스플리터 0.000

4.체인지업 0.000

보상이었다.

물끄러미 홀로그램을 바라본 해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았다.'

1위였던 포심 패스트볼 장타율이 마지막에 1루타를 때려내며 훅 내려갔다.

[보상으로 A급 슬라이더 모듈이 지급됩니다.]

곧바로 지급되는 보상.

해준은 망설이지 않고 모듈을 소켓에 결합했다.

[연결된 아웃라이어(Linked Outlier)]

-토니 디에고 블랑코 (Double A) *포심 패스트볼

-브랜드 맥케이(Double A) (5/10) *체인지업

-A급 슬라이더 모듈(0/10)

'이제 시작이다.'

다른 선수들이 들으면 경악을 할 소리를 태연하게 한 해준.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소리였다. 모듈은 변화구를 잘 치게 해줄 '기회'를 제공해줄 뿐이지, 기회를 모두 놓쳐버린다면 예전하고 달라질 게 없었으니까.

'체인지업 모듈은 사용 기회는 앞으로 5번인가? 그 안에 대응 구종 레벨을 BA급까지 끌어올려야 하고.. 슬라이더는 어떤 사람이 나올지 모르겠는데.. 뭐, 써보면 알겠지.'

A급이라면 20-80스케일에서는 50점을 뜻한다. 즉, 메이저리그에서도 평균 이상의 수준급 변화구란 소리. 모듈에서 주어질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한다면 더이상 한국 내에서는 해준을 상대로 슬라이더를 자신 있게 구사할 수 있는 투수가 없게 된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고민을 이어가는 사이 어느새 해준은 라커룸에 들어섰다.

"이야~ 진짜 분위기 한번 쥑이네!"

"나는 항상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내가 결승 득점하는 거 다들 봤어? 봤지? 내가 거기서 딱 홈플레이트를 밟는..."

"애초에 해준이가 안타 친 순간부터 너 같은 건 관심 밖이었다. 다들 1루로 뛰어가느라 바빴는데?"

6연승. 근래 들어 최고의 페이스에 밝은 표정을 지은 선수들이 두런두런 짐을 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해준은 평소와는 다른 점을 발견했다.

"웬 보충제?"

커다란 보충제 통을 스포츠백에 넣고 있는 2루수 장건우. 그 모습에 해준은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장건우가 대답했다.

"집에 가져가서 먹으려고요."

"집? 그거 집에도 있잖아."

장건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가양동에 위치한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기숙사 말고 집이요. 본가."

"...본가?"

여전히 어리둥절한 해준. 그 모습에 장건우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되물었다.

"형 진짜 모르세요?"

"뭘?"

"내일부터 올스타 브레이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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