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패스트볼 경계령 (4)
루카스 파간.
본래는 세인트루이스의 산하 트리플A팀 레드버즈 소속으로 메이저리그의 로스터가 비게 되면 콜업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내려오기를 반복하는 전형적인 AAAA형 선수였다.
2m가 넘는 키와 그에 어울리는 거대한 체구에서 찍어내리 듯 뿌려대는 어마어마한 구위의 포심 패스트볼.
머리 높이에서 훅- 떨어지는 느낌이 나는 날카로운 슬라이더와스플리터까지.
체격 조건이나 공의 질을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선수였지만, 이상할 정도로 메이저리그 특유의 분위기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겨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았다.
그렇다고 해도 5, 6년 차까지는 나름 괜찮았다.
스스로가 좋은 경험을 한 것이고, 그런 시간들이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7년이 되고, 8년이 되고, 9년 차에 이르자 어느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제는 콜업 기회를 잡기 힘들겠구나.'
밑에서는 날고 기는 유망주들이 치고 올라오고 있었고, 매번 콜업과 강등을 반복하는 그에게 어느 순간부터 구단에서는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었다.
그때 떠올린 것이 바로 한국이었다.
지나가던 투수코치의 말로는, 광주라는 도시에서 온 스카우트가 시즌 중반부터 합류할 용병 투수를 구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큰 고민 없이 스카우트에게 접촉했다.
'가자. 이 이상 마이너리그에서 시간 낭비를 하고 있을 순 없어.'
메이저리그를 아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혹여나 그곳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한다면 다시 메이저리그로 돌아온 케이스도 상당했으니까. 심지어 마이너리거로서는 상상도 못 할 거금을 번 채로 말이다. 자금 사정이 안정된다면, 지금보다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야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다행히 계약서에는 해외 리그에 진출할 시 조건 없이 풀어준다는 조항이 존재했고, 한국행은 일사천리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은 옳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루카스 파간! 시즌 중반부터 합류한 이 투수가 시작부터 완봉승을 기록하며 팀에 승리를 안겨줍니다!]
7경기 7승 0패 50.1이닝 62탈삼진 ERA 0.88.
한국으로 넘어온 두번째 날, 정신없이 마운드에 올랐을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까지 해낼 줄은 스스로도 몰랐다.
KBO의 타자들은 큰 키에서 뿌려오는 그의 구질에 하나같이 적응을 하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평범한 구속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공은 이곳에서는 강속구 취급을 받았다.
포식자.
그 말 그대로였다.
그는 KBO라는 생태계에서 먹이사슬의 정점에 올라선 선수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그의 눈앞에, 그를 위협하는 상대가 살아 숨 쉬고 있었으니까.
천적.
도장 깨기라도 하듯 팀들을 하나하나 부수어 나가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던 포식자는, 드디어 자신의 천적을 만나고야 말았다.
+++
투수와 타자 간에는 상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절대적인 실력 차를 비껴가는, 말 그대로 천적 관계.
덕분에 1할 타자가 리그 에이스급 투수를 두들겨대기도 하고, 장타율이 바닥을 기는 타자가 특정 투수만 만나면 홈런을 뻥뻥 쳐대기도 하는 것이 야구판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투수의 리듬과 타자의 리듬이 우연히 맞아떨어지거나, 스윙 궤적과 공이 날아오는 궤적이 일치한다거나.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는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관계도 존재한다.
강해준과 루카스가 그랬다.
리그를 압살해버리다시피 하며 모두의 두려움을 사고 있던 루카스. 약점이 드러나며 그 앞에서 철저히 짓이겨질 것 같았던 강해준.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1회 말, 강해준에게 홈런을 허용한 후 압도적인 구위로 세오레즈 타선을 짓누르던 루카스.
하지만 3회 말 2사, 강해준이 타석에 들어서자 루카스는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치 이미 호구가 잡히기라도 한 듯이.
"볼"
"볼"
"볼-"
정신을 차려보니 카운트는 어느새 3-0이 되었다. 연이어 볼을 내준 루카스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bullshit! 이건 말도 안 돼. 도대체 왜 안 들어가는 거야!'
한국에 온 뒤 처음 허용한 홈런. 그래서 유독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온 힘을 다해 던진 공을 때려내는 1회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게 그의 뇌리에 박혀있었다.
루카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대와 자신을 매치시켜보았다.
준비 자세, 타격 리듬, 스윙 궤적 등.
어딜 살펴도 상대가 자신의 공을 잘 때려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집중하자. 집중해. 이대로 볼넷을 줄 수는 없어. 침착하게... 보더라인에 집착하지 말고 있는 힘껏 집어넣자. 상대는 못 친다. 다른 타자들과 다를 건 없어. 조금 전의 타석이 운이 좋았던 것뿐이다.'
다시 한번 숨을 몰아쉰다. 그리고, 한참 동안 뚫어져라 포수의 미트를 바라본 뒤에야.
'좋아.'
루카스는 다시 한번 마운드를 박찼다.
투구판을 밀어내는 느낌도 완벽했고, 중심이동에도 걸릴 것 없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허리가 역동적으로 회전하나 싶더니 불식 간에 팔 스윙이 이루어지고, 손끝의 감각을 집중시켜 문고리를 돌리듯 공에 회전을 먹였다.
그리고, 임팩트. 있는 힘껏 공을 때려냈다.
'좋았어!'
루카스는 생각보다 좋은 코스로 공이 향했음을 깨달았다. 보더라인 안쪽으로 정확히 감겨 들어가는 공.
하지만 타자의 반응을 확인한 루카스의 초점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흔들렸다.
'fuc....!'
강해준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놓치지 않고 있는 힘껏 잡아당기고 있었다.
따아아악-!
그라운드에 울려 퍼지는 경쾌한 타격 소리. 공의 궤적은 순식간에 3루 선상을 따라 내야를 벗어났다.
루카스의 고개가 황급히 꺾여 따라갔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텅 비어있는 3루수의 글러브뿐.
[잡아당긴 타구! 3루심의 손이... 안쪽을 가리킵니다! 루카스 선수를 상대로 다시 한번 장타를 뽑아내는 강해준 선수!]
"fuck!!"
루카스는 결국 울분을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질렀다.
한편, 테이블 석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저스의 국제 스카우트 크리스 배그웰. 그의 회색빛 홍채 위로 흥미로움이 드러났다.
'약점을 또 극복해냈군.'
생각지도 못한 대어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것도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는 대어.
'야수로서만 바라봐도 충분히 데려갈 가치가 있는 선수였다. 타격은... 솔직히 전혀 기대하지 않았어.'
하지만 갑작스럽게 포심을 쳐내기 시작하더니, 이어서 체인지업. 그리고 이제는 슬라이더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모두가 고개를 젓게 만들던 타자가 고작 보름도 안 되는 기간동안 저렇게 변해버리다니.
"저 투수. 루카스로군. 이제 기억났어. 세인트루이스 산하 트리플A팀에서 뛰던 녀석이지?"
그때 옆에 앉아있던 파이어리츠의 스카우트 존 배쉬가 입을 열었다. 크리스 배그웰이 되물었다.
"아는 투수입니까?"
"알다마다. 저래 봬도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로 지명받았던 녀석이야. 잠깐 아마추어 스카우트 노릇을 하고 다닐 때 눈여겨 봤던 녀석이지. 슬라이더와 스플리터가 쓸만한 거로 기억했는데... 한국에서 뛰는 걸 보니 포텐셜을 제대로 못 살려낸 모양이군."
"그렇다면 저보다는 당신의 평가가 더 정확하겠군요. 저 투수가 던지는 변화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크리스 배그웰의 물음에 존 배쉬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슬라이더 40, 스플리터도 40."
20-80스케일로는 BA(Below-Average)급 변화구라는 소리다. 크리스 배그웰은 혀를 찼다.
"KBO를 호령하고 있는 투수의 주구종이 평균 이하 평가라니. 평가에 인색하시군요."
"글쎄.. 수준 자체가 높아서 통한다기보다는 타자들이 적응을 못 해서 일어난 현상으로 생각되네만. 어느 나라나 2미터를 넘길 정도로 장신인 투수는 보기 힘드니까. 아마 적응이 되면 지금 같은 성적은 유지하기 힘들겠지."
하지만 그 말에 크리스 배그웰의 표정이 묘해졌다.
"...처음 보는 장신 투수. 생소한 궤적. 게다가 평균 이하라 해도 어디까지나 메이저리그 기준. 한국에서는 어딜가도 먹힐만한 변화구 레벨이죠. 그런데..."
그리고는 2루에 서 있는 강해준을 바라보는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저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쳐내는군요."
+++
2번의 타석에 들어선 강해준의 성적은 2타수 2안타 1홈런, 그리고 1개의 2루타.
이칼코메드의 포수, 박지수는 유유히 2루 베이스를 밟고 있는 강해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경기 시작 전까지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냥 무작정 질러본 것이 아니다.
레나프와의 경기에 출전한 강해준의 타격 영상을 낱낱이 해부했고, 정면으로 맞붙은 1, 2차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확신했다.
이 강해준이라는 타자는 미완성 상태라는 것을.
비록 지금은 누구보다 독보적인 페이스 기록하고 있지만, 분석을 끝낸 박지수의 시선에는 강해준의 타격 자세가 너무나도 불완전해 보였다.
그를 간단히 표현하자면.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변화구를 아예 배제하는 리스크를 짊어지는 대신, 포심 패스트볼을 확실히 때려내는 데 집중하여 그만큼의 리턴을 얻어낸다.
단지 그뿐이었다.
'분명 포심패스트볼에 모든 것을 집중한 타격이었어.'
타이밍, 스윙 궤적, 수 싸움.
강해준의 어디에서도 그동안 변화구를 커트해내겠다거나, 담장 너머를 넘겨버리겠다는 의중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건 두 번의 승부.
루카스와 박지수는 두 번 모두 장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평소보다 구위가 떨어진 건가? 그걸 나와 투수코치님, 감독님 그 누구도 눈치를 못 챘고?'
그건 확실히 아니었다.
부우우웅-!
"스트라이크- 아웃!"
3회 2사 2루, 2번 타자 장건우의 방망이가 연이어 헛돌며 이닝이 종료됐다. 박지수는 스스로의 의심을 상대 타자들을 잡아냄으로써 씻어버렸다.
'이렇게 뛰어난 구위다. 궤적도 기존의 KBO 투수들과는 달라서 처음 만나는 타자들은 좀처럼 적응을 못 해.'
그 뒤로도 박지수는 사전에 구상해둔 볼배합으로 루카스를 능숙하게 리드하며 세오레즈의 타선진을 성공적으로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따아아악-!
"파울!"
오우우우우!
4회 말, 3번 타자 유장천이 커다란 파울 홈런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야구계에는 이런 격언이 있지. 파울 홈런 다음은.'
삼진을 뺏어냄으로써 강해준 다음으로 위협적인 타자를 막아낸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저 강해준만 뺀다면.
'어떻게 하지?'
박지수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졌다.
하지만 그런 점점 깊이 패여가는 그의 미간과는 별개로, 루카스는 이닝을 거듭할수록 눈부신 역투를 뽐내고 있었다.
퍼어어엉-!
포수의 미트를 부술 듯 파고드는 하이패스트볼. 타자의 방망이가 다시 한번 헛돌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KKKKKKKKK
5이닝 2피안타 1피홈런 3볼넷 9삼진 1실점.
강해준에게 허용한 홈런 하나가 유일한 옥의 티였을 정도로 오늘의 루카스는 도저히 범접이 불가능해보였다.
그에 반해 세오레즈의 선발 임우주는 이칼코메드의 타선에게 난타를 당하며 4와 2/3이닝 7피안타 2볼넷 4실점으로 마운드를 내려간 지 오래.
스코어는 1-4로 이칼코메드를 향해 승기가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박지수는 강해준을 막아내는 방법을 떠올리는 것에 더더욱 집중하고 있었다.
강해준만 막는다면, 오늘의 세오레즈 타선은 모두 봉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어떻하지?'
그리고, 6회.
타석에 그의 생각들을 단단히 얽히게 만든 원흉이 들어섰다.
'...강해준.'
미간을 있는 대로 좁힌 박지수는 오랜 고민을 이어오던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당할 순 없다. 먹히지도 않는 투구 패턴을 앵무새처럼 반복해봐야 상대방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패턴을 바꾼다. 애초에 변화구만 던진다는 게 실수였어. 변화구의 위력을 살리는 건 언제나 패스트볼이다.'
루카스 파간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포심 패스트볼. 그것을 배제한 채 승부 한 것이 실수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포심 패스트볼, 홈플레이트 바깥쪽.'
그런 박지수의 사인을 확인한 루카스 또한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방법 말고는 강해준이라는 타자를 잡아낼 마땅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곧, 루카스의 포심 패스트볼이 그의 손끝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