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고척의 밤하늘 (4)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자, 보세요. 슬라이더가 몸쪽으로 향하다가 스트라이크존 아래로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휘어 들어갑니다. 그런데 보세요. 여기서 어떻게 했죠?]
[억지로 끄집어내서 쳐냈군요.]
[네, 바로 그겁니다. 예전의 강해준 선수에게서는 볼 수 없던 모습...]
분석하거나.
"약이라도 한 거 아니야?"
"넌 약한다고 며칠 만에 없던 타격 스킬도 생기냐? 저건 그냥... 어우, 나도 모르겠다."
부정하거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지난 6년간 백한타 강해준이라는 편견의 늪이 너무나도 깊었다.
"...저거 봐. 저게 어떻게 예전 강해준하고 같은 사람이야?"
몇몇 팬들의 중얼거림대로, 1군에 올라온 해준은 모두의 예상을 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강해준에게 안타를 내주며 무사 1, 2루에 몰린 신정율.
2번 타자 장건우를 삼진으로 처리했지만 3번 유장천에게 스리런 홈런을 허용해버린다.
신정율이 4, 5번을 차례로 범타 처리하며 3회를 끝냈을 때의 스코어는 3-0.
그 순간부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세오레즈가 끈질겨졌는데?"
"타선에 짜임새가 돌아온 것 같기도 하고.. 예전처럼 붕붕 대다가 죽진 않네."
안 그래도 불어난 투구수에 더해, 신종율의 구위는 끈질기게 달라붙는 타자들 덕에 급격히 떨어져 갔다.
결국 주자를 들여보내는 일 없이 꾸역꾸역 넘기긴 했지만 5회 1사, 9번 타자 채태욱을 삼진 처리했을 때의 투구수는 110개.
꾸깃-
서울 레나프의 오정태 감독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로 손에 들려있던 메모지를 구겨버렸다.
경기 시작 전, 강해준이 라인업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적어왔던 간략한 공략 포인트. 이제는 쓸모가 없어졌다.
'2군 막판 경기에서 슬라이더에 약점을 보였다고? 내 눈을 속일 순 없어. 3회 타석에서 정타는 아니었지만 확실하게 끝까지 공을 보고 휘둘렀다.'
5회 말, 오정태 감독은 미리 몸을 풀게 해둔 불펜을 투입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투수코치는 불펜에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벽에 걸린 전화기를 들었다.
오정태 감독의 깊은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태한이라면 강해준을 막을 수 있을 거다.'
프로 1년 차 추격조 방태한.
레나프가 작년 드래프트 1순위로 뽑은 이 투수의 최고 구속은 150.7km/h. 별다른 변화구는 없지만 어마어마한 패스트볼로 상대를 요리하는 구위형 투수였다.
'간혹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는 제구가 흔들려 터프한 이닝을 못 맡긴다는 점이 흠이지만, 지금처럼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는 방태한만큼 믿을 만한 불펜이 없지.'
퍼어어엉-!
[151km/h]
"스트라이크!"
그리고는 마운드에 오른 방태한은 그 기대에 보답하는 듯했다.
전광판에 찍히는 최고 구속. 날이 더워지며 스스로의 최고 구속을 경신하는 모습을 보인 것.
강해준도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고는 한번 타석에서 벗어나며 타이밍을 점검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오정태 감독은 속으로 낮은 웃음을 흘렸다.
'쉽지 않을 거다 이놈아. 공 끝만 따졌을 때 1선발 데빈을 제외하면 단연 돋보이는 놈이야.'
심지어 컨디션조차 물이 오른 상태.
오정태 감독은 흐뭇한 모습으로 공을 던지고 있는 방태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강해준은 의외로 호락호락하게 아웃을 허락하지 않았다.
딱-!
"파울!"
따아악-!
"파울!"
끈질기게 공을 걷어내며 물고 늘어지는 강해준. 오정태 감독은 공개수가 10구째를 넘어서자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기 시작했다.
'제발 좀 죽어라. 이제 좀 죽어!'
게다가 방태한이라고 해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포심으로 밀어붙이는 투수가 기세 싸움에서 지면 끝장이니까.
선수들의 상성은 의외로 첫 승부를 기점으로 갈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강해준을 처음 상대하는 방태한은 기세를 선점하기 위해 있는 기합을 내지르며 힘껏 공을 뿌렸다.
"악!"
11구, 바깥쪽으로 낮게 깔리며 들어가는 최상의 코스.
오정태 감독은 그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라인드라이브를 그린 공의 궤적이 전광판을 강타하고 있었다.
강해준의 솔로 홈런, 그리고 스코어는 4-0.
승부의 추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
"정신들 안 차릴 거야!"
5회가 끝난 뒤 그라운드를 재정비하는 클리닝 타임.
평소라면 5분간의 짧은 휴식을 틈타 담배, 혹은 화장실로 볼일을 보러 가는 가벼운 시간이지만 레나프의 벤치 분위기는 한껏 가라앉아있었다.
이길 때는 침묵하지만 지고 있을 때는 헐크가 되는 남자. 오정태 감독의 외침에 벤치에 앉아있던 타자들이 움찔했다.
"어떻게 올라온 4위야! 니들 7월까지 치고 올라갔다가 또 고꾸라지면 팬들이 뭐라고 할 것 같아? DTD, DTD 신나는 노래. 그런 소리라도 들을래!"
그 말에 몇몇 베테랑 타자는 이를 악물었다.
'아니, 시발. 나보고 어쩌라고. 지가 쳐보던가.'
'당겨치는 족족 걸리는데 아오, 저 강해준 개새끼.'
'오늘만 강해준한테 걸린 안타성 타구가 4개인가? 아오, 미쳐버리겠네.'
설상가상이라고, 오늘따라 이상하게 강해준 쪽으로 타구가 많이 향하고 있었다. 일부러 의식하고는 반대로 보내려고 하면 치는 족족 땅볼이다.
"어떻게든 1점이라도 뽑아내! 그것부터 시작한다."
이럴 땐 어떻게 해서든 물꼬부터 터야 한다. 오정태 감독의 말에 동감한 타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경기에서 지면 다시 5위다. 그 말은..'
'6위인 세오레즈가 오늘 경기를 이기면 더 악착같이 달라붙을 거란 말이지.'
6위가 4위를 상대하는 기세와 5위를 상대하는 기세는 다를 수밖에 없다. 프로라면 항상 승리를 추구해야 하지만, 그런 사소한 차이에 승리에 대한 동기가 강해지는 것은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이를 박박 가는 레나프의 타자들. 그리고 곧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해낸다.
---투웅!
[갑니까? 갑니까? 갑니다! 1번 타자 박웅! 서울 레나프가 드디어 득점을 기록합니다!]
1번 타자 박웅이 불펜 투수 안하성의 공을 받아쳐 우월홈런을 기록한 것.
답답하게 막혀있던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자 그 뒤로는 파죽지세였다.
연이은 연속 안타에 안하성이 내려가고, 이어 올라온 박철하마저 차례대로 무너트리며 대거 점수를 뽑아내는 데 성공.
서울 레나프는 6회를 빅이닝으로 만들며 5점을 대거 뽑아냈다.
순식간에 4-5으로 역전된 전세.
그리고, 7회 말. 3연타석에 안타를 기록하던 강해준을 상대로 오우중이 1루 땅볼을 끌어내자 오정태 감독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슬슬 내 생각대로 게임이 풀린다.'
그러나 그런 오정태 감독의 활짝 펴진 표정은 9회 말이 되자 다시 일그러졌다.
+++
"볼- 베이스 온 볼스"
9회 말, 심판의 존이 급격하게 좁아지기 시작했다.
7번 문찬용의 안타, 그리고 9번 채태욱의 볼넷.
연이은 볼 선언에 레나프의 셋업 김동운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스트라이크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 오정태 감독은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항의를 시작했다.
"아니, 심판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저게 어떻게 볼.. 아니, 잠깐 놔봐. 김 코치!"
그와 동시에 우르르 몰려 오정태 감독을 만류하는 코치진.
'저 양반은 뛰쳐나오면 바로 퇴장당할 테니까.'
현역 감독 중 심판에게 항의하다 퇴장당한 숫자로는 압도적 1위인 오정태 감독이다.
결국, 잠시의 지체 끝에 레나프 측은 셋업 김동운을 내리고 4일 연속 등판으로 휴식을 주기로 했던 주전 마무리 정우혁을 마운드로 올렸다.
해준은 타석에 들어서며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까지 5연투... 하지만 고무팔로 유명하니 구위가 그리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야.'
레나프의 마무리 정우혁. 151km/h의 포심과 146km/h의 슬라이더. 해준은 상대의 정보를 복기하며 자세를 잡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선발이었던 신종율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해볼 만 하다는 자신감이 가슴 속에 충만하다.
여러가지 투구 플랜을 세워두고는 이닝을 오래 끌고 가려는 선발 투수보다, 오히려 뒤를 생각하지 않고 압도적 구위로 밀어붙이는 투수들이 오히려 상성이 좋았으니까.
5회에 승부했던 방태한이 그 케이스였다. 평소보다 압도적인 구위를 뽐내며 151km/h에 이르는 포심을 뿌려댔던 방태한.
자신이 계속해서 파울로 걷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심 패스트볼 승부를 고집했다.
결국 로케이션이 기가 막혔던 149km/h 포심 패스트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지만.
'정우혁 또한 분명 포심 패스트볼 몇 개쯤은 던져올 거다.'
앞선 방태한과 마찬가지로, 이런 마무리들의 장점이자 단점이라면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투구패턴에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거다.
'힘으로 눌러버려도 상대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는 탓일지도 모르지.'
정우혁의 경우는 포심으로 카운트를 잡고 슬라이더를 위닝샷으로 마무리하는 스타일. 어이가 없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대다수의 타자들은 정우혁이 무슨 공이 던질지 70%정도는 확신하고 배트를 휘두른다.
'물론 포심이 올 걸 알고도 헛치거나 파울이 나오기 일쑤지.'
하지만 더블A에서 악독할 정도로 포심 패스트볼을 물어뜯었던 블랑코와 링크되어있는 해준이다. 포심 패스트볼에 일방적으로 밀릴 것이라고는 본인 스스로도 상상하기 힘들었다.
'초구를 노린다.'
해준이 배트 그립을 있는 힘껏 잡아 쥐자 귓가에 끼익- 마찰음이 들려왔다. 자존심 강한 마무리. 분명 스스로의 공에 대한 믿음도 강할 것이다.
부드러운 투구폼으로 마운드를 박차기 시작하는 정우혁.
슈우우욱-!
대포알처럼 쏘아지며 홈플레이트를 꿰뚫을 것처럼 날아오는 직선에 가까운 궤적. 리그 최상위급의 V-movement를 자랑하는 공다웠다.
보통이라면 헛스윙이 나오는 궤적.
투수 정우혁조차 확신을 가진 듯 보였다.
"흡!"
하지만 그 순간 더 패스트볼 긱과 링크된, 강해준의 진면모가 발휘됐다.
숨을 들이켜며 타격 자세에 들어간 해준.
탑포지션에 머물러있던 손은 굳이 테이크백에 집착하지 않으며 반응 할 수 있는 시간을 단축했다.
몸을 간결하지만 깔끔하게 중심이동을 만들어냈고.
따아아악-!
최적의 궤적을 그린 배트의 스윗 스팟이 그대로 공을 때려냈다.
경쾌하게 울리는 타격음.
그 순간, 해준은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찼다.
'각도가 너무 높다!'
생각보다 공이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었고, 블랑코의 야성적인 감각이 각도를 살짝 수정했다.
스스로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저 이렇게 쳐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으니까.
해준은 순식간에 치솟아 오르기 시작하는 타구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거, 아슬아슬하지만 천장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
'그래, 차라리 부딪혀라!'
천장에 부딪힌 타구는 고척돔의 로컬룰에 의해 인정 2루타로 처리된다.
'..잠깐.'
하지만 경기장 내 모든 관중, 기자들, 관계들의 시선은 생각보다 오래 하늘을 향해 머물렀다.
답답했던 천장이 사라진, 차분한 느낌이 가득한 고척의 밤하늘.
해준은 아무런 장애물 없이 날아가는 공을 보며 온몸이 짜릿해지는 착각 속에 빠져들었다.
[...어, 어어어! 갑니다! 갑니다! 오늘 고척의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공중을 유영하는 강해준의 타구!]
평소보다 선선한 날씨, 미세먼지 한점 없는 드문 날.
오늘의 고척돔은 천장을 오픈한 상태였다.
그리고 한참이나 날아간 그 공은.
-텅!
펜스 상단에 부딪혔다.
이미 외야수가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한 끗 차이로 벗어난 글러브.
그 사이 3루에는 해준이 들어서고 있었다.
[세오레즈의 강해주우우운, 강해준 선수! 본인의 1군 복귀전을 끝내기로 장식합니다!]
그리고, 승부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어느새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실감했다.
[9회 말, 서울 레나프의 숨통을 끊어내는 대역전극의 3루타! 그리고 사이클링 히트! 2026 KBO의 첫번째 사이클링 히트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강해준 선수의 손에서 완성되는 역사적 순간입니다!]
세오레즈의 선수들은 이미 1루 더그아웃에서는 뛰쳐나오고 있었다.
"와아아아악! 사이클링 히트야, 사이클링이라고 이 미친 자식아!"
"이 또라이 새끼!"
그 말들대로, 해준은 1군 복귀전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내가 사이클링?'
그 순간 떠오르는 홀로그램들 떠올랐지만, 해준은 그 모든 내용을 내팽개쳤다.
[타구질 분류 Hard 판명]
[속도 138.9km/h]
[발사 각도 .....]
그저 축하를 위해 달려오는 동료들 사이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