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22화 (22/137)

22. 고척의 밤하늘 (3)

-한국프로야구 1군은 트리플A급 선수부터 싱글A급 선수까지 모여있는 특이한 리그다.

한 외국인 스카우트에게서 흘러나온 이 멘트는 한국 야구의 수준을 말할 때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말이었다.

물론 저 수준을 뛰어넘는 이레귤러적인 존재가 튀어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2020년 들어서는 메이저급은 씨가 말랐다고 봐도 됐다. 최근 들어 40홈런 유격수 유장천, 50홈런 조병민 등이 급부상하며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고 해도, 결국 가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결과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해준은 저 말의 뜻을 이렇게 풀이했다.

'1군에서 싱글A급이 뛰고 있다면 2군에서는 싱글A급도 안되는 선수들이 득실댄다는 소리지.'

그리고 지금, 그 사실을 피부 위로 느끼고 있었다.

'1군은 1군이다.'

자신은 능력을 얻고 난 뒤, 2군에서만 뛰었다. 덕분에 뒤늦게 체감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뻗어오는 공 끝이 확실히 달라.'

덕분에 배트 끝이 살짝 밀렸다. 2군이었다면 문제없이 홈런을 만들어낼 수 있던 코스와 구속. 그런 만큼 자신감을 가지고 휘둘렀지만, 결과는 2루타.

해준은 밀려오는 아쉬움에 살짝 쓴웃음을 삼켰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

턱-

그런 생각을 하며 2루 베이스를 밟았을 때.

[Double!]

[타구질 분류 Hard 판명]

[속도 159.58km/h]

[발사 각도 24.4˚]

[캐치 확률 13.9%]

평상시처럼 눈앞에 떠오른 타구의 데이터에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2루타면 1점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폭발하듯 시야를 점령해오는 메시지들이 우르르 떠올랐다.

[상대 투수의 수준에 따라 포인트 지급을 위한 보정 계수를 산정합니다.]

[투수 신정율]

[카운트 0-0, 초구 타격 시 데이터]

[해당 피칭존 타격 허용율 45.88%]

[해당 피칭존 라인드라이브 허용율 30.75%]

[해당 피칭존 피장타율 0.662]

[...]

[데이터를 종합한 보정 계수 7.8배를 적용합니다.]

[7.8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현재 보유 포인트는 170포인트입니다.]

+++

세오레즈 타선진은 레나프 선발 신정율의 호투에 시작부터 발이 묶였다.

강해준이 선두 타자 2루타로 출루에 성공했지만, 2번 타자 장건우가 삼진. 이어 3번 타자 유장천을 고의볼넷으로 내보낸 신정율은 후속 타자에게서 병살을 끌어내며 1회를 무사히 넘기는 데 성공한다.

세오레즈의 선발 임우주 또한 강해준이 가세한 수비진의 도움과 함께 150에 가까운 포심과 싱커, 커터로 땅볼을 양산해내며 호투.

0-0.

아직은 팽팽하게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경기가 3회 말에 접어들었다.

타석에 들어서는 9번 타자 채태욱.

대기 타석에 들어선 해준은 타석에 서 있는 채태욱을 바라보았다.

"후웁..후웁.."

숨을 몰아쉬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채태욱. 누가 봐도 잔뜩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1년 만에 콜업됐었나? 그런데 3경기 연속 무안타... 긴장이 안 되면 그게 이상하지.'

오늘마저 망쳐버릴 수 없다는 일념 하나로 자세를 잡는 채태욱.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올 것만 같은 압박감에 그가 자신도 모르게 한차례 벤치를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해준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이 양반아. 이 상황에서 사인을 바라면 어째?'

당연히 아무런 사인도 없다. 주자가 출루한 것도 아니고, 아직 3회.

무언가를 지시할 상황이 아니다.

'그냥 제가 말한 대로만 하세요.'

채태욱을 바라보는 해준의 눈빛이 깊어졌다.

'채 선배가 출루해야 나도 타격이 한결 수월해지니까.'

1회에 초구를 타격해 2루타를 기록했지만, 3회부터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승부를 걸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슬라이더로 무자비하게 파고들어 오겠지.'

슬라이더를 아예 쳐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타이밍을 흐트러트리는 체인지업과는 다르게 슬라이더는 어느 정도 타이밍이 맞아들어가니까.

'하지만 이왕이면 못 던지게 하는 게 가장 베스트.'

해준은 투수와 사인을 주고받고 있는 포수 송현국을 힐긋 바라보았다.

'분석에 의하면 신정율은 주자가 진루할수록 슬라이더 구사율이 떨어진다. 단, 저 송 선배랑 함께 출전할 때만.'

이미 전력분석원 오광녹이 전해준 전력분석집을 통째로 머릿속에 넣어놨다. 그중 가장 최선의 방안을 끄집어낸다.

'아무래도 노쇠화가 오니 그럴 수밖에 없긴 하지.'

전성기를 넘어 선수로서 황혼기에 접어든 송현국. 작년에는 무릎 수술까지 받았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프레이밍만 보자면 아직 포수로서 생생한 것 같지만 실체 수치를 살펴본다면 전체적인 수비툴이 급감한 지 오래.

'반응 속도, 팝타임, 송구 속도, 블로킹 성공율. 전부 포수로서 평균 이하까지 내려갔어.'

이제는 주전 포수의 양영웅의 체력 분배를 위해 이렇게 간간이 출전하는 상황이었고, 그 사실이 자신에게 행운으로 작용했다.

투수가 주력 구종의 구사율을 줄인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상당한 메리트니까.

'슬라이더 구사율이 무사에서는 32%. 1루에서는 24%. 2루에서는 18%. 3루라면 10% 아래까지 내려간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스트라이크존 바깥으로 구사하는 슬라이더를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욱여넣기 시작한다는 것.

'그 정도라면 충분히 승부해볼 만 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드디어 마운드 위의 투수 신정율이 투구판을 박찼다.

[최근 3경기 무안타 채태욱 선수. 1년 만에 2군에서 올라왔지만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정율 선발 투수, 망설임이 보이지 않는 초구!]

퍼억-!

"스트라이크!"

몸쪽으로 틀어박히는 슬라이더. 채태욱은 타석에는 속으로 죽을상을 짓고 있었다.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순간 몸으로 날아온다 생각하고 등을 돌렸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공은 포수미트에 박혀있다. 이건 컨디션 이전에 상성의 문제였다. 신정율이 뿌려대는 팔각도와 타이밍이 채태욱에게는 너무나 안맞았으니까.

'후우.. 진정하자. 진정해. 일단 해준이가 말한 카운트만 만들어내면 된다. 지라고 계속 이런 공만 던질 수 있겠어? 그랬으면 메이저 갔지.'

채태욱은 숨을 고르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생각대로 신정율이라고 그런 공을 꾸준히 던지는 것은 아니었다.

"볼!"

이번에는 바깥쪽으로 크게 휘어나가는 볼. 채태욱은 그 공을 보고는 침을 꿀걱- 삼키며 목울대를 한차례 크게 울렁였다.

순간 허리를 숙이며 공을 따라갔던 그의 얼굴에 살짝 기쁨이 떠올랐다.

'됐다!'

카운트는 1-1. 드디어 강해준이 말한 순간이 왔다.

'주자가 없는 상황, 이 순간 가장 안전하게 카운트를 잡으러 들어오는 공은 포심 패스트볼.'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레나프의 벤치에서 다른 사인을 낼 수도 있고, 포수 송현국이 채태욱이 슬라이더를 꺼린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그대로 슬라이더 사인을 낼 수도 있다.

결국은 확률의 문제였다.

오느냐, 마느냐.

'와라, 와라, 와라, 와...'

마음속에서 마법의 주문을 외우는 채태욱. 신정율이 3구째 공을 뿌렸을 때 그는 쾌재를 불렀다.

'왔다!'

그리고는 재빨리 번트 자세를 취했다.

[카운트는 1-1. 채태욱 선수를 상대로 3구째를 뿌립니... 엇, 채태욱 선수가 기습 번트를 시도합니다!]

딱-!

손에 느낌이 왔다. 이건 반발력을 제대로 죽였다.

하지만 채태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눈을 질끔 감은 채 전력을 다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릴 시간조차 아까웠으니까.

그 사이 매우 절묘하게 1루를 따라 데구르르- 흐르는 공.

레나프의 내야는 어느 쪽도 대응하지 못한 채 채태욱이 1루 베이스를 밟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세이프!"

1루심의 콜을 듣고는 간신히 참았던 숨을 내뱉는 채태욱.

"....푸하!"

뒤늦게 고개를 돌리니 1루를 한참이나 지나쳤다.

"허억..허억..."

채태욱이 호흡을 진정시키며 1루로 돌아오자 1루 코치 이영만이 기특하다는 듯이 등을 한차례 두드렸다.

"이야, 우리 태욱이. 많이 컸다? 그 상황에서 머리도 굴릴 줄 알고?"

"네? 아, 네. 그렇죠 뭐."

하지만 채태욱은 출루를 했다는 기쁨도 잠시, 타석에 들어서고 있는 해준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귀신 같은 자식. 진짜잖아?'

레나프의 내야는 삼진형 투수이면서도 인터벌이 긴 신정율이 등판했을 때 번트 대비에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다.

'특히 주자가 없는 상황일 때 더욱 그렇다고?'

그러니 포심이 날아올 만한 타이밍에 한 번 시도해보라 했다. 채태욱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제안을 받아들였고, 기어코 성공시켰다.

어차피 안타를 쳐내기는 버겁다고 느꼈으니, 출루만으로 대성공이다.

'...하긴 저 녀석은 지금 당장 은퇴해도 굶어 죽지는 않는다고 했지. 팀에서 어떻게 해서든 전력분석원으로 데려갈 거라고.'

해준에게 고맙다는 듯이 뻔히 바라보는 채태욱. 그런 채태욱의 시선을 느낀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생각대로다.'

신정율의 주무기는 날카롭게 휘어져 나가는 고속슬라이더.

솔직히 투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구사된다면 쳐낼 방법은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지.'

주루 상의 주자를 염려한 신정율은 슬라이더 구사율을 줄이면서도, 스트라이크존 안에 넣으려고 할 것이다.

'그럼 이제 보험 좀 들어볼까.'

벤치에서 봐두었던 아이템 하나를 떠올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아웃라이어 스토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Z-Contact% UP]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오는 공에 대한 컨택률을 크게 상승시킵니다.

*한 타석으로 제한됩니다.

도매가: 30P

[30P를 사용합니다.]

[남은 포인트는 140P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슬라이더 모듈을 사고 싶지만..'

아직은 포인트가 많이 부족하다.

[A(Average)레벨 슬라이더 모듈]

[해당 특성권은 800P입니다.]

'BA레벨 슬라이더 모듈은 왜 없어?'

A레벨이라면 스카우팅 리포트에서 쓰이는 점수로는 50점. 메이저에서도 평균 수준의 변화구라는 소리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레벨. 당장 저 신정율의 슬라이더만 하더라도 스카우팅 리포트에서는 BA레벨, 즉 40점으로 평가되고 있었으니.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도 아니고. 당장 필요한 건 50점짜리가 아니라 40점짜리 슬라이더를 쳐낼 모듈이라고.'

해준이 투덜거리자 설명이라도 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해당하는 아웃라이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없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 급한 대로 컨택률이라도 높여놔야지.'

[Z-Contact% UP을 사용합니다.]

그 순간 배트가 조금 더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거, 생각보다 해볼 만하겠는걸?'

그와 함께 해준은 타격 자세를 잡았다.

"야, 해준아. 너 포심을 그렇게 잘 친다며? 아까 혹시나 하고 던지게 해봤더니 진짜 칠 줄은 몰랐다 야."

그때 포수 송현국이 말을 걸어왔다. 해준과 송현국은 2번이나 국대에서 한솥밥을 먹은 선후배 관계.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한번 던져주시게?"

송현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배 사랑하면 또 이 형님 아니겠냐. 난 포심 사인 보낸다. 자, 봐라. 봐. 지금 보내고 있지?"

"아, 네네. 잘 부탁합니다. 전 안 봐도 선배를 믿으니까 포심이라 생각하고 휘두를게요."

해준은 자신을 흔들려는 송현국의 트래쉬토크를 대충 넘기며 투수의 동작에 집중했다.

'주자 1루 상황. 초구는 커터 아니면 슬라이더. 포심 패스트볼은 일단 머릿속에서 지우자.'

마운드의 신정율은 1회에서의 복수라도 하려는 듯, 이를 악물며 온 힘을 모아 투구판을 박차고 있었다. 순간, 해준은 그 모습을 보며 살짝 억울함을 느꼈다.

'왜 나한테만 맞으면 다들 이를 악물어?'

전설의 1군 0할 타자. 아무래도 그 명성(?)의 영향이 커 보인다. 해준은 투수의 동작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집중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어디 언제까지 이를 악무나 보자...!'

투수의 허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그리고 뒤늦게 어깨 뒤에서 슉-하며 넘어오는 채찍 같은 팔스윙.

어느새 쏘아진 공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해준의 몸을 맞출 것 같이 날아오는 궤적.

'..슬라이더다!'

하지만 오히려 해준은 그것을 보고 그것이 슬라이더임을 알아차렸다. 몸은 공을 맞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뻣뻣해지려 하지만, 이를 악물며 억지로 몸통을 회전시킨다.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은 팔이 그대로 회전을 같이하며 최적의 경로로 휘둘러진 배트. 뒤늦게 휘어져 몸쪽 스트라이크존 한구석으로 빠르게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걷어냈다.

딱-!

[강해준 선수, 이번에도 초구!]

손끝에 전해지는 시큰한 감각. 히팅포인트를 억지로 끌어당겨 당겨친 만큼 배트 스팟에 제대로 맞추질 못했다.

'...아니, 애초에 아이템을 안 썼으면 헛스윙이었겠지!'

그리고 그렇게 당겨진 공은.

[안타, 강해준 선수가 다시 한번 안타를 뽑아냅니다!]

유격수의 키를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