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선 넘은 사람들.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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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잘되면 여기저기서 출연섭외가 오게 마련이다.
그것도 같은 방송사 예능에서나 가능했다.
자사 드라마도 아닌데 타 방송사에서 주인공들을 섭외해서 홍보를 해줄 리가 없다.
따라서 드라마가 종영된 후에나 주목 받은 신인배우들에게 방송사 가리지 않고 섭외가 많이 들어온다.
암튼 <비객>이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더라도 홍보를 게을리 할 수 없었다.
MBS 간판 토크쇼에 류성룡으로 특별출연한 손진풍 배우와 감초배우가 출연했다.
매니저가 주인공인 예능에는 손민아가, 시청자들을 대신해 집을 알아봐 주는 프로그램에는 안건우가 출연했다.
그리고 서브 남주로 출연했다 드라마에서 멋지게 퇴장한 이온은 역사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서양사학과 유럽답사를 가기 전 하루 시간을 내서 촬영한 예능은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MC부터 기존 패널들의 호흡이 워낙 좋았고, 특별 게스트 한국홍보전문가와 역사 강사출신 패널의 티키타카도 매끄러웠다.
자타공인 한국 알리미로 유명한 특별 게스트는 지긋지긋한 일본에 이어 중국까지 우리 역사 왜곡이 날로 심해지고 있어서 그와 관련해 곳곳에 항의를 하느라 바빠진 근황을 이야기했다.
덧붙여 역사 전문 패널은 중국, 일본이 우리 역사를 훔치려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들의 황당한 주장에 맞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자신만의 견해를 풀어 놓았다.
그렇다고 이온이 꿰다 놓은 보릿자루는 아니었다.
MC가 퀴즈를 낼 때마다 이온이 망설이지 않고 척척 맞췄다.
이온에게는 어떠한 큐시트나 대본도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리얼로 이곳저곳 다니며 돌발적인 질문에 대답했다.
서양사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조선 역사까지 꿰고 있자 출연진은 물론 제작진도 놀라는 눈치다.
“점점 주변 어떤 나라가 선 넘는 게 너무 지나친 것 같아요.”
“맞아요.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흑우 되는 거예요.”
“가만히 안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죠?”
“뭔가 해야 죠.”
“그 뭔가가 뭐예요?”
“뭐든지요.”
“그러니까 그 뭔가가 뭐든지가 뭐냔 말이에요?”
“......”
기존 출연진들끼리 개그를 치기도 했다.
예능에서 바보 캐릭터로 굳어진 패널이 특유의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위기를 넘겼다.
“이온씨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우리 역사가 아니라 서양의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이긴 하지만.”
“근대유럽사를 강의하는 어떤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지금까지의 역사 저작권은 모든 인류가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누구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고. 인류 모두에게 저작권 사용 허락을 받을 수 없으니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역사가 승리자의 기록이라고 하는 거예요. 승리자가 쓴 기록은 몇 세대까지 통할 수 있지만 백 년 이백 년 흐르면 결국 진실은 다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몇 년 전 페루에서 워크캠프를 했었어요. 당시에 중국인 동료가 있었는데.... 참 답답하더라고요. 불쌍하기도 하고. 그 친구들은 정말 진실을 모르니까요. 제가 안타까운 점이 그것이에요.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 중국이나 일본이 지금처럼 계속해서 역사를 잘못 다루다보면 나중에 그와 관련해 큰 후유증을 겪을 것이라 생각해요.”
갈라파고스가 심화되는 일본.
중진국 함정에서 오랜 시간 허우적거릴 중국.
이미 잘못되어가고 있다.
본인들은 못 느끼는 것 같지만.
물론 잘 못 된 역사를 가르치는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 문화, 경제, 정치 모든 분야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그렇게 될 것이다.
다만 잘못된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왜곡된 가치관이나 윤리까지 함께 주입된다는 사실이다.
좋은 점은 계승·발전시키고 나쁜 점은 반성했을 때.
어제 보다 더 나은 오늘이 그리고 미래가 만들어 질 수 있다.
따라서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의 기록을 열람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 ✻ ✻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
조선시대에는 해유령(蟹諭嶺)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임진왜란이 벌어지고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도성까지 밀린다.
선조는 도성을 떠날 때 총사령관인 도원수에 김명원, 부원수에 신각을 임명한다.
도원수 김명원은 문관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당시 최고위직 군사 직책까지 모조리 문관이 차지했으니까.
조정은 군사 지식을 갖추고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으로 바꾼다면서 전라, 경상, 충청 3도의 감사를 교체했는데, 하삼도의 군사권을 쥔 경상감사 김수, 전라감사 이광, 충청감사 윤선각 3인도 모두 문관이었다.
어쨌든 도원수가 된 김명원은 1천의 군사를 이끌고 한강 북쪽 높은 강둑에 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그리고 선조가 도성을 벗어나고 이틀 후 왜군이 한성으로 몰려온다.
무려 2만의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이 한강변을 뒤덮는다.
왜군의 규모와 기세에 놀란 김명원이 엉뚱한 명령을 내린다.
[무기를 모두 강물에 집어던져라!]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오? 무기도 없이 어찌 왜적과 싸운다는 게요?]
부원수 신각이 김명원을 가로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명원은 관복을 벗어던지고 일반 백성이 입는 평복으로 갈아입는다.
[나는 연(輦)을 지키러 가겠소. 임금께 무슨 일이 생기면 나라가 망한단 말이오.]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를 호위하러 가겠다는 말이다.
신각이 만류하지만, 도원수라는 작자는 말을 타고 혼자 도주해 버린다.
일반 군졸들도 이미 잔뜩 겁을 먹고 있던 상황이다.
그 판에, 최고 책임자가 민간인 옷으로 바꿔 입고 달아나려는 꼴을 보였으니 병사들의 마음에 전투 의욕이 솟아날 리가 없다.
군졸들 역시 도원수의 명령에 따라 무기를 한강에 냅다 던져버리고 제각각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너무나 황당한 일이라 어느 누구도 상황을 수습할 수가 없다.
무관 출신 부원수 신각은 몇 안 되는 잔류 병력을 이끌고 한성으로 들어간다.
한성에서 지금의 수도경비사령관에 해당하는 전 유도대장 이양원을 만난다.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떠나버리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이양원도 거느린 군사가 없기는 마찬가지.
두 사람은 흩어진 군사들을 조금이나마 수습해보기 위해 양주로 이동한다.
때마침 한성을 지원하기 달려오던 함경도 남병사 이혼을 만나 합세한다.
인천부사 이시언까지 합류하면서 장차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를 한다.
그때 일부 왜적들이 양주 일대에 나타나 노략질을 일삼는다는 소식을 듣고 매복작전을 준비한다.
해유령에서 매복하고 있던 신각의 부대는 조선군의 기습 공격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고 완전 무방비 상태인 왜군 소부대를 몰살시키는 쾌거를 이룬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군이 이룬 최초의 승전이다.
여기까지는 피가 끓어오르는 무용담이다.
헌데 수하들을 버리고 홀로 평양으로 도주한 김명원은 조정에 가서 '부원수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바람에 대패했습니다' 하고 신각에게 터무니없는 누명을 덮어씌운다.
결국 임란 최초의 승전을 기록한 주역 중 한 명이었던 신각은 누명으로 처형되는 신세가 된다.
반면에 비겁자 김명원은 아무런 벌도 받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임진강 방어선을 지키는 총책임자의 지위를 지킨다.
그때는 명칭도 더 화려해져서 그냥 도원수가 아니라 팔도 도원수라는 감투가 된다.
문관 출신의 김명원이 지키던 임진강이 무사히 지켜질리 없다.
임진강 방어선은 왜군에게 처참하게 무너지게 된다.
몇 달 뒤 도원수 자리를 이항복의 장인 권율에게 물려준 김명원은 호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를 거쳐 정유재란(1597년) 때에는 병조판서를 역임하게 되고, 병조판서를 이항복에게 물려준 뒤에는 다시 이조판서가 된다.
그 뒤 이항복이 영의정이 된 때에는 그의 추천에 힘입어 우의정 자리에 오르고, 1601년에는 좌의정으로 더 올라서게 된다.
김명원이란 역사적 인물은 공과 과가 모두 있었다.
임란 초기 신각과의 이 일화는 김명원을 부정적으로 보는 측의 먹잇감이 되곤 하며, 한편으로는 행정가로서는 꽤나 유능한 인물로 칭송되기도 한다.
“....흠.”
이온이 노트북 키보드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거둬들이고 팔짱을 꼈다.
고도 3만 5천 피트 상공을 날고 있는 유럽행 비행기 안이었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탑승수속을 하기 직전, <비객> 조연출로부터 메시지가 한통 왔다.
대본을 보냈으니 확인해보라는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확인해보니 <비객> 17회라는 제목의 이메일이 와 있었다.
주요 내용이 바로 앞 서 서술한 해유령 전투다.
악동은 함경도 남병사 이혼의 수병(手兵) 즉 수하로 데리고 다니는 약간의 병사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여한다.
이후 신각이 처형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썩어빠진 조정의 처사에 환멸을 느낀다.
다시 초야로 숨어들려고 하다가 의병 봉기한 한때 연적 송우준을 만나게 된다.
송우준은 원수 가문의 여식 안여실과 혼인해 아이를 낳아 기르며, 시골에서 훈장 노릇을 하는 걸로 연명하고 있었다.
가문에서 두 사람의 혼인을 결사적으로 반대해서 숨어 지내는 것이다.
과거 삼각관계(?)였던 세 남녀가 시간이 흘러 재회하고.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는지, 그 동안 무얼 하고 살았는지 등에 관해 회포를 푼다.
악동이와 송우준은 의병이 되어 전쟁에 참여하기로 의기투합한다.
그러나 안여실과 어린 아들이 발목을 잡는다.
결국 안여실의 설득으로 두 사람은 임진왜란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렇게 <비객>의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대본을 읽기 전에는 깜짝 등장 정도 일 것이라 추측했었다.
아니었다.
일종의 에필로그라고 할 수 있는 한 회분에서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출연분량이 많았다.
<비객>의 진짜 주인공이 악동이었나 할 정도다.
이온이 출연한 역사 예능 프로그램에서 임진왜란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인 해유령 전투를 새롭게 조명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도 아니면, <비객> 제작진과 사전에 논의가 된 부분일까.
이온으로써는 알 수 없지만, 매우 공교로웠다.
예능에서 해유령 전투를 다뤘고, 에필로그 격인 에피소드도 해유령 전투를 떠올리게 하는 시퀀스에 악동이가 활약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MBS 예능국과 드라마국 간의 어떤 협조가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암튼 한 회 더 출연하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고민 되는 것은 다른 부분이다.
비행기 모드가 되자마자 확인한 스마트폰 메시지에는.
- 온아~ 내년 봄에 스케줄 비워놔. <비객> 시즌2 갈 수도 있어. 어쩌면 악동이를 중심으로 스핀오프 갈 수도 있고. MBS랑 안 하고 OTT 독점 논의 중이야. 그렇게 알고 있어. 미리 침 발라놓는 거야. 배신하면 죽을 줄 알어~ 다음에도 또 나랑 할 거지?♡♡♡
이렇듯 황혜경 작가가 보낸 것도 있었다.
한창 <비객>을 촬영하고 있을 때, 촬영장에서 점심을 함께 먹으며 황 작가가 넌지시 말을 흘리긴 했었다.
OTT 독점 6부작 드라마로 악동이를 주인공으로 한 스핀오프를 궁리 중이라고.
그래서 <비객>에서 악동이의 전사를 다루지 않았고, 대동계 부분도 압축한 것이라 설명했더랬다.
만에 하나 시즌2가 제작된다거나 스핀오프 시리즈가 제작된다면 그를 위해 아껴 둔 것이다.
사실 MBS 드라마국장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황혜경은 대본을 전반적으로 뒤집어엎으면서 에필로그 성격의 보너스 방영을 염두에 뒀다.
이온이 악동이 캐릭터를 생각 이상으로 잘 소화해 주기도 했고, 캐릭터에 대한 시청자 반응도 좋아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스케줄이 안 될 것 같은데......”
“뭐가요?”
옆 좌석에서 홍수진이 멀뚱멀뚱 쳐다봤다.
공교롭게도 이온의 양옆으로 수진과 효정이 나란히 앉았다.
“아냐. 아무것도.”
“새로 들어가는 드라마에요?”
탁.
이온이 노트북을 덮었다.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고요.......”
수진이 얼른 사과했다.
“<비객> 대본.”
“예?”
“한 회 더 출연할 것 같아.”
“악동이는 죽었는데......”
중얼거리던 수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스포 해도 되요?”
“우리가 유럽답사 하고 있을 때 기사 나갈 걸? 너하고 효정이가 따로 한국으로 소식을 전하지만 않으면 당장 문제없어.”
“엄마한테도 전화 안 하는데 한국에 누구와 연락을 하겠어요. 그치 효정아?”
효정이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가 지퍼 채우는 시늉을 해보였다.
“포털에 팬카페가 몇 개 있던데, 오빠도 들어가서 글 읽고 그래요?”
“가끔. 따로 글 남기거나 특별히 자주 방문하는 곳은 없어.”
“그렇구나...... 아참! 대본 보세요. 말 안 시킬게요.”
수진이 안대로 눈을 가리고 고개를 젖혔다.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눈을 붙일 생각이다.
사실 좀 더 이온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11박 12일의 일정 동안 그럴 기회는 많았다.
뒤척뒤척.
키가 큰 편인 이온은 이코노미 클래스에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오랜만에 해외에 나가는 터라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