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배우 말고 스턴트를 해야 되는데...(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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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영화사에서 최초의 스턴트맨은 미국 기병대 출신의 프랭크 하나웨로 알려져 있다.
프랑크 하나웨는 그리피스 이전에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영화라고 평가받는 <대열차강도>(1903)에서 말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연기했다.
그것이 영화에서 세계 최초로 스턴트를 촬영한 장면으로 기록되었다.
할리우드 영화 초창기에는 서부영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따라서 실제 카우보이나 기병대 출신이 많이 영화계로 유입되었다.
그들은 주로 말을 타고 달리다가 떨어지는 장면에서 스턴트를 도맡아서했다.
세계영화사에서 스턴트 연기 최고액 기록은 영화 <하이포인트>(1979)에서 무려 356m 높이에서 뛰어내린 스턴트맨 달 로빈슨이 받은 15만 달러였다.
그가 기록한 1회 스턴트 연기 최고액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반면에 한국영화의 스턴트 역사는 참으로 눈물겹다.
으악새!
영화에서 ‘으악, 으악!’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1990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액션영화에 출연하는 연기자나 관련 스태프(무술연기자)를 그렇게 조롱하듯 별칭으로 불렀다.
또한 방망이로 때리면 빵빵 나가떨어져야 한다고 해서 ‘방망이’라고도 불렸다.
영화현장에서 가장 밑바닥 대접을 받는 엑스트라와 똑같이 사람 취급 못 받고 천대를 받았던 이들이 액션배우들이었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촬영현장에서 스턴트맨을 보호할 수 있는 장비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차량 스턴트 장면을 할 때마저 제대로 된 안전장비도 갖추지 않고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식이었다.
이온의 대선배들은 그런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숱하게 겪어야 했다.
그런 천대 속에서도 한국액션영화는 한때 찬란하게 빛나던 때가 있었다.
바로 1953년 <최후의 유혹>으로 데뷔한 이래 30여편의 액션영화를 연출했던 정창화 감독 같은 이들로 인해 한국영화의 독립된 하나의 장르로서 액션영화 전통을 만들었던 것.
참고로 정창화 감독은 1960년대 홍콩으로 건너가 쇼브라더스에서 <천면마녀> 등으로 무협영화에 도전, 미국과 유럽까지 이름을 알렸다.
1972년엔 타란티노가 극찬과 경의를 표하고 자신의 영화에서 오마주를 했던 바로 그 영화 <죽음의 다섯손가락>으로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액션영화 감독으로서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1970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액션영화는 일제강점기의 주먹들이나 소위 협객들 또는 해방 이후 뒷골목 깡패들의 비장한 영웅담이 주를 이뤘다.
제작비가 좀 더 투입된 경우는 만주 벌판 독립군의 활약담, 할리우드 서부극을 원형으로 한 한국식 웨스턴 영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그랬던 한국액션영화는 1970년대 들어 이소룡과 ‘소림사’로 상징되는 홍콩 무협영화의 등장으로 일대 위기를 맞는다.
충무로가 키워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청룽은 특유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융합한 액션으로 극장가를 장악하게 되고, 1980년대 한국 액션영화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면서 면면히 이어져오던 계보가 단절되고 만다.
그렇게 암흑기를 거치다가 1990년에서야 비로소 한국 액션영화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터지게 된다.
바로 <장군의 아들>이다.
한국 액션영화의 대부라고 불릴 만한 정창화 감독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임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이후 한국영화가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이하면서 걸출한 액션영화 스타감독들이 탄생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무술감독들이 영화에서 정식 크레디트를 얻고, 전문적인 액션 연출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 후반부터다.
그 전까지 스턴트맨은 체육관 이름을 따서 누구누구 관장이라거나 누구누구 사범 그도 아니면 본명으로 불렸는데, 9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무술감독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의 스턴트계를 이끌고 있는 대선배들이 바로 90년대 중반부터 무술감독으로 경험을 쌓은 이들이다.
TV와 영화 등에서 활약하고 있는 국내 스턴트맨의 수는 500명선.
이들은 서울액션아카데미 등 10여 개 스턴트맨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다.
반면에 할리우드는 영화배우조합(SAG)과 미국내 남녀 대역전문배우를 대표하는 미국 스턴트맨협회에는 800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대부분의 할리우드 스타들은 자신과 비슷한 체구와 외모를 지닌 전속 스턴트맨이 있다.
1회 출연료가 수백만 달러에서 많게는 수천만 달러가 넘는 스타들이 액션 연기를 하다 다치면 당사자는 물론이고 영화사로서도 엄청난 손해이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스타마다 전속 스턴트 더블을 두는 추세다.
문제는 한 명의 스턴트맨이 여러 명의 스타들 대역을 한꺼번에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안녕하세요~”
이온은 월요일 오후 4시 반 즈음, 용인대장금파크에 도착했다.
총 84만평 부지에 사극은 물론 현대극, 영화, CF까지 찍을 수 있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오픈세트장으로 MBS 방송사가 운영하고 있다.
현재 이곳 조선시대 세트장에서는 드라마 <활빈>의 촬영이 한창이었다.
“야. 굿맨의 축복!”
송관효 무술감독은 액션아카데미에서 이온의 개인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전설적인 스턴트맨 해리 굿맨의 팬이기도 했고.
“이온이라니까요, 대장님.”
“이 자식이....! 감독이라고 불러. 대장이라니!”
“저도 이온이라고 불러주세요. 해리 아저씨는 제 대부라고요.”
“레오는 어때?”
“왜 자꾸 남의 이름을 바꿔 부르시려고 하는데요!”
이온이 송관효 무술감독과 호칭을 두고 티격태격했다.
그러면서 현장에서 마주치는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열심히 인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다 낯익은 배우를 만났다.
“오랜만이에요, 진한씨.”
이온이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이진한은 잠시 기억을 뒤져야 했다.
분명 낯이 익다.
“......?”
이진한은 그답지 않게 심호흡까지 하며 이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활빈>의 주인공이자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라이징 스타였다.
‘아~’
기억났다.
얼마 전 종영한 송하나 작가의 <아이돌>에서 남미 교포 연습생으로 출연했던 배우.
“처음 뵙네요.”
“두 번째에요.”
“예?”
어디 시상식에서 만났었나.
이진한은 <도련님을 부탁해>에서 자신 대신 오토바이 사고씬을 찍었던 건 떠올리지 못했다.
“작년에 제가 진한씨 스턴트 더블을 했었어요.”
“......!”
우락부락하게 생긴 스턴트맨 사이에서 유일하게 멀쩡하게 생겼던.
고등학생 외모를 한 주제에 예비역이었고, 무술팀 막내인데도 행동에 자신감이 묻어 있었고, 스태프들하고도 허물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던 넉살 좋은 청년.
“아! 미안해요.”
“<도련님을 부탁해>에서 한 번 보고 같이 촬영할 기회가 없었잖아요. 기억 못하실 수도 있죠.”
“어쩐 일로?”
“일하러 왔죠.”
“<활빈>에 출연하세요?”
“오늘 송 감독님과 번갈아서 진한씨 더블 할 거예요.”
“연기하는 거 아니었어요? <아이돌>에서 비중 있게 나오던데?”
“연기하려고 왔잖아요.”
“......?”
“액션연기.”
“아, 예.”
이진한이 어색하게 인사하고, 모니터스테이션으로 향했다.
토닥토닥.
송관효가 이온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손길에 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후배들 중에 스턴트맨과 액션배우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액션을 연기한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후배들이 대부분이다.
무술, 액션, 스턴트가 혼용되고 있다.
이온처럼 당당하게 액션배우라고 밝히는 경우도 많지 않다.
송관효로서는 기특하지 않을 수 없다.
✻ ✻ ✻
오후에 도착한 무술팀은 저녁을 먹고 나서도 대기만 하고 있었다.
액션 시퀀스보다는 주인공의 감정 위주 커트들을 찍어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찍 현장에 도착한 무술팀은 붕 뜰 수밖에.
시답잖은 수다나 떨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PD님이 오시랍니다.”
“으아. 드디어 우리가 밥값할 시간인가보다.”
야식을 먹고 자정을 막 넘을 즈음.
무술팀의 발이 바빠졌다.
특히 송관효 무술감독은 세트장 곳곳을 다니고 콘티, 촬영 영상을 보면서 현장 상황을 다시 한 번 살폈다.
무술지도 박우일과 무술팀 막내 이온은 스턴트가 벌어지게 될 곳들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1시가 가까워지면서 특수효과팀까지 모였다.
이온은 그들을 도와 와이어를 설치했다.
안 해도 된다.
하지만 <활빈>의 특수효과팀은 <태왕 광개토>에서 함께 일했던 친한 이들이었다.
형아우 하는 사이에 매정하게 모른척 할 수가 없었다.
이온은 한동안 특수효과팀과 함께 줄을 당겨 주인공을 지상에서 2미터 이상 띄우는 ‘단순한’ 일을 반복했다.
와이어를 당기고 푸는 일은 단순한 작업 같지만 노하우가 필요했다.
보통 안전을 위해 와이어를 사용할 때는 무술팀은 줄을 잡지 않는다.
액션연기가 들어갈 때 무술팀이 와이어를 주도한다.
“스탠바이~”
“당겨!”
“읏차!”
“큐!”
송관효 무술감독의 구호에 맞춰 여러 차례 와이어 당기는 작업을 반복하고 나서야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우일이가 모니터하고, 막내가 서포트 해.”
“넵!”
드디어 주인공 이진한 대신 스턴트맨들이 나설 차례다.
홍길동 대역을 송관효과 이온이 나눠서 맡았다.
홍길동이 대감집 안채 기와지붕으로 올라 간 후에, 지붕을 뛰어가다가 공중으로 몸을 날린 후에 담장에 착지하는 장면은 송관효 감독이 직접 했다.
이온이 할 수 없는 액션연기다.
돌발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이나 안전 때문에 이온에게 맡길 수 없었다.
세 대의 카메라가 동원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 방에 촬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장면을 다섯 번을 반복해서 촬영했다.
그 사이 카메라 위치와 렌즈가 몇 번 달라졌다.
“셋업 바꾸는 동안 이온이 준비시켜!”
“저희는 스탠바이입니다!”
이온이 하게 될 액션은 대감집 담장 위에 내려앉는 동작부터 긴박하게 달려가다가 횃불을 발견하고 방향을 틀어 반대편으로 달려가다가 땅에 내려앉는 것까지 촬영한다.
드론 촬영을 하기 때문에 이진한이 직접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안전도 문제지만, 액션의 맛을 살린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자정 전에 이진한의 얼굴 클로우즈업이나 감정 커트를 미리 찍어두었다.
동이 틀 때까지 무술팀이 드론촬영과 지미짚으로 시원하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촬영하기만 하면 된다.
‘뭔가 허전하네.’
사극을 촬영하러 오면 언제나 수염을 붙이거나 자객 두건을 뒤집어썼다.
오늘은 홍길동 하면 떠오르는 초립(草笠)을 쓰고 수건으로 코밑을 가리고 대역을 소화할 예정이다.
초립은 조선시대 선비나 양민, 관례를 치른 어린 남자아이가 주로 쓰고 다니던 모자였는데, 패랭이와 비슷해 보여서 천민이나 양민들이 쓰고 다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초립은 주로 지푸라기로 견고하고 예쁘게 만들고 패랭이는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엮은 모자라는 차이가 있다.
눈으로 보면 생김새나 차이를 쉽게 구분할 수가 있다.
- 치이익. 이온이 준비 됐어?
저 멀리서 송관효가 메가폰으로 외쳤다.
“네! 가시죠!”
이 장면을 위해서 일요일 하루 종일 액션아카데미로 출근해서 시뮬레이션 훈련을 했다.
이온이 밟고 있는 담장 역시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선배들이 뛰어다녔던 담장으로 안정성은 이미 증명이 되었고, 그런 장면을 위해 특별히 제작되기도 했다.
사전에 약속한 대로 액션을 펼친다면 안전사고가 발생할 일은 거의 없다.
이온은 이진한과 인사를 나눈 직후부터 그를 관찰했다.
그가 걷는 습관부터 작은 손버릇까지 따라했다.
자신이 직접 홍길동이란 인물을 연구하고 캐릭터 구축을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홍길동을 연기하는 것이 아닌, 이진한이 연기하는 홍길동의 액팅 콘티뉴이티를 놓치지만 않으면 되는 스턴트더블이기 때문이다.
툭툭.
이온이 담장을 가볍게 발로 굴렀다.
이것도 이진한이 실제로 했던 동작이었다.
고개를 돌려 저 위쪽의 안채 지붕을 올려다봤다.
자신은 방금 그곳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슛! 레디! 액션!”
방송에서는 ‘스탠바이’ ‘큐’가 영화는 ‘레디’ ‘고(액션)’가 일반적인 사인이다.
최근에는 ‘하나 둘 셋‘이나 ’준비‘ ’시작‘도 많이 쓰인다.
송관효는 영화파라고 주장하듯 ‘레디’ ‘액션’을 사인으로 썼다.
퉁.
이온이 제자리에서 높이 뛰어 놀랐다가 담장에 착지하는 동작을 펼쳤다.
밤이다.
작은 소리도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이온은 화들짝 놀란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들키진 않았는지 확인한다.
그런데.
[도둑이야!]
실제 고함소리가 나온 것은 아니다.
이온의 상상이다.
‘제기랄‘ 내심 욕설을 뱉고는 이온의 상체가 앞으로 쏠리며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횃불이다!’
실제로 현장에 횃불 따위 없다.
이 역시 이온의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내일 촬영에서 횃불을 든 포졸과 장정들이 등장할 예정이다.
삐끗.
급격하게 몸을 틀다가 균형이 무너졌다.
놀랄 필요 없다.
이미 충분히 논의된 동작이다.
액션콘티대로 했단 뜻이다.
이온의 허리춤에는 대감집의 여러 장애물을 뚫고 보물창고로 잠입해서 각종 보물을 담아온 보따리가 감겨있다.
설정이 그렇다는 말이다.
실제 금붙이나 보물을 넣어두면 무겁기도 하거니와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적당히 옷가지나 가벼운 플라스틱 등을 넣어 느낌만 냈다.
그럼에도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다.
이 또한 리얼리티를 위해서 액션배우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커엇!"
하이앵글(피사체 머리 위에서)인 드론촬영과 지미짚 촬영을 위해 모두 여섯 테이크 동안 담장 위를 뛰어다녔다.
이후로 아이앵글(피사체와 수평)로 또 로우앵글(피사체를 아래서 올려다보는)로 각각 두 차례 담장 위를 뛰어다녔다.
엄청난 체력이 소모되는 작업이었다.
이온은 이진한을 카피하면서도 스스로 홍길동이 되었다.
홍길동이 처한 상황을 몸짓으로 표현했다.
으리으리한 기와집 담장을 뛰다가 방향을 바꾸고, 차가운 겨울 공기와 허리춤에 찬 보따리로 몸이 마음처럼 유연하게 따라주지 않는 답답함, 포졸인지 관군인지 당장 알 수 없지만 횃불들이 몰려오는 것에 대한 조바심 등등.
때로는 격렬하게 때론 박력 넘치게.
그런 한편으로 정교하고 절제된 몸짓도 섞었다.
‘액션‘이란 사인이 들린 순간 이온의 정신은 뿌리째 홍길동에게 몰입되었다.
심장은 막 잡은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뛰었다.
체력과 정신력을 동시에 요구하는 액션연기였다.
세 시간 동안 이어진 담장 위 질주로 인해 이온의 몸은 흠뻑 땀에 절었다.
그런데 담장 위에서 몸을 날려 앞공중돌기 후 땅에 착지하는 장면을 찍을 때다.
“......!”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송관효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근심이 짧은 시간 얼굴에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