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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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욱이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이후로도 많은 연극배우 후배들이 씬 스틸러 배우들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그렇게 술자리가 무르익고 있을 때.
‘액션캠프 출신이라고 했지?’
홍성욱은 이온이 여간내기가 아니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액션아카데미 심화교육 과정에서부터 이온을 현장에 데리고 다녔다는 것은 소위 싹수가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한국대 재학생이며 비보이로도 활동한단다.
비록 트릭커란 것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걸 배우기 위해 미국에 유학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한마디로 인생에 스토리가 있다.
보통의 연예인들처럼 평범한 인생사를 매스컴용으로 살짝 과장하거나 포장할 필요가 없이 살아온 삶 자체만으로 스토리텔링할 수 있는 꺼리가 무궁무진했다.
배우에 대한 이미지 메이킹과 마케킹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보물이다.
운동도 잘하고 똑똑하기까지 하니 내보낼 예능 프로그램도 많다.
‘연기를 못하는 문제?’
홍성욱이 술에 기분 좋게 취해있는 신지균을 슬쩍 돌아봤다.
일반인들은 모르지만, 신지균은 충무로에서 알아주는 연기선생님이다.
현재 한국에서 잘나가는 20대 연령대 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결정하면 제일 먼저 대본을 들고 찾아가서 조언을 구하는 것이 신지균이다.
꼭 그가 아니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훌륭한 연기 트레이너는 많다.
날카롭게 이온의 기본 역량을 분석해서 트레이닝할 수 있는 좋은 선생을 소개시켜 줄 자신이 있었다.
당장 연기 못해도 상관없다.
나쁘지 않은 마스크와 액션연기 능력, 학벌 등이 그런 단점을 커버하고도 남았다.
당연하지만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갈 수 없다.
이온만 동의만 해준다면 5년 정도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활동 반경을 넓혀 가면 된다.
‘사탕발림에 넘어올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 점에서 기대감을 감출 수 없는 홍성욱이다.
대화를 할 수 있는 배우.
바라는 걸 막연히 요구하는 ‘대화‘라고 쓰고 ’징징거림‘이라고 읽어야 하는 수준의 소통이 아닌, 진짜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주고받는 바로 그 대화.
그게 될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든다.
쟁쟁한 대선배들이 있는 자리에서도 주눅 들거나 하는 모습이 아닌 자신감 있는 눈빛을 보니 확실히 특출 난 데가 있는 청년이다.
비록 자신이 충무로의 최고 배우를 발굴했다거나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안목은 지금까지 틀린 적이 별로 없다고 자부했다.
다 떠나서 일단 촉이 왔다.
뒤통수가 간질간질 하다.
‘원석이야. 원석!’
지금 이온을 놓친다면 얼마 안 가서 다른 기획사에서 채 갈 확률이 매우 높았다.
주머니 속의 송곳.
이온에게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온씨?”
“네?”
막걸리를 퍼마시는 단비를 만류하느라 씨름하고 있는 이온이 고개를 돌렸다.
“혹시 아이돌 제안 받은 적은 없어요? 중고등학교 때.”
“없어요.”
“크루에 소속된 비보이였다면서요?”
단비가 꼬부라진 혀로 입을 열었다.
“그때는 핵찌질했어요. 울 이온이가요. 교복 아니면 학교 체육복만 주구장창 입고 다니고 머리도 군인아저씨처럼 짧게 자르고 다녀서 미모를 철저하게 숨겼어요. <은밀하게 동네 바보처럼>의 환이 같았다니깐요.”
홍성욱이 단비의 말의 확인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
“제가 교우관계가 그렇게 넓지 않았어요. 한국대를 꼭 들어가야 해서.”
“연기 해볼 생각 없어요?”
홍성욱이 참다못해 진짜로 묻고 싶은 사안을 꺼냈다.
캐스팅 디렉터가 묻는 거다.
일반적인 배우 지망생이면 들뜰만한 질문이다.
이온은 일반적이지 않다.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어설프지만 연기는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대역하는 거 말고. 배우 해볼 생각 없냐구요.”
“현재도 액션배우로 활동하고 있...... 진 않고 간간이 출연하고 하고 있는데요."
“스턴트맨이 아니라 저기 씬 스틸러 모임의 선배들처럼 TV와 영화를 넘나드는 연기자가 될 생각은 없어요?”
“글쎄요. 당장 대역도 제대로 소화도 못하는 입장이라서......”
“사실 스턴트맨이 드라마나 영화 현장에서 그렇게 대접을 받진 않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스턴트맨이 홀대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아니다.
선배들 말로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고 한다.
이온은 지금까지 경험 속에서 특별히 홀대 받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다만 함께 하는 스태프마다 다르긴 하다.
분명한 사실은 한국의 스턴트맨이 할리우드에 비해 좋은 시스템은 아니지만, 확실히 예전보다 나아졌고 좋아졌다.
“스턴트만 해서는 경제적으로 그렇게 여유롭지 못하잖아요.”
“......”
“이온씨가 소속된 액션아카데미 선배들 캐스팅도 내가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거기 정지융감독이나 이치열 감독 캐스팅도 내가 여러 번 관여했구요. 이치열 감독은 작년에 연봉 1억 찍었을 걸요?”
이온 개인적으로 무술감독들의 연봉이 몹시 궁금했다.
물어볼 수도 없고.
그런데 실마리가 홍성욱의 입에서 나왔다.
“정감독이나 이감독도 이온씨 나이 때는 차비도 없어서 보라매 공원까지 걸어 다니고 그랬어요. 아, 이온씨는 모르겠구나? 원래 아카데미가 처음 생길 때는 보라매 공원 체육관에서 셋방살이했었어요. 암튼 방송 매체도 많아지고, 프로그램도 많아지면서 예전보다 일이 훨씬 많아졌고, 미국 메이저들이 한국 콘텐츠에 돈을 팍팍 풀어서 OTT 독점 콘텐츠 캐스팅 수요도 많아졌어요.”
이온도 다 아는 사실들이다.
“나는 회사가 따로 있진 않아요. 프리랜서죠. 솔직히 키워준다 뜨게 해주겠다 그런 말 못해요. 매니지먼트를 해주겠다는 제의도 아니에요.”
이온이 눈동자의 물음표를 담아서 홍성욱을 빤히 쳐다봤다.
스카우트 제의도 아니고 도대체 뭐를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캐스팅 디렉터 업계도 경쟁이 치열하답니다. 우리는 인적네트워크가 가장 중요해요. 난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온씨를 전방위로 케어해주진 않아요. 다만 영화부터 광고, 뮤지컬, 행사까지 다양한 일감을 연결시켜 줄 수 있어요.”
지금 홍성욱이 이야기는 것들은 액션아카데미가 해주고 있다.
굳이 에이전시가 따로 필요하지 않다.
“물론 액션아카데미 사무실에서도 에이전시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 대신 무술감독들이 계약한 영화로 한정될 수밖에 없죠.”
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우를 겸업하고 있는 스턴트맨들은 홍성욱 같은 캐스팅 디렉터를 통해서 광고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한다.
“나는 이온씨에게 좋은 연기 선생님, 마음 편하게 연기를 연습할 수 있는 저렴한 연습실, 영화·드라마 이미지 단역 등을 소개해줄 수 있어요.”
“그래서 홍 캐디님에게 좋은 것이 뭐에요?”
“약간의 커미션, 거간비라고 하죠. 그것과 이온씨가 나와 다른 에이전시에서 동시에 오디션이나 캐스팅 제안을 받게 되면 먼저 내게 기회를 달라는 말이에요.”
“글쎄요. 저는 이제 막 액션배우로 걸음마를 딛고 있는 단계라서......”
“부담 갖지 말고. 액션아카데미 선배들한테도 물어보고, 단비한테도......”
이온과 홍성욱의 고개가 동시에 단비에게 돌아갔다.
단비가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고 있다.
술에 취해 뻗어버린 것이다.
“암튼,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어요. 충분히 알아보고 고민해보고 그런 후에 답을 줘요.”
“계약서를 써야 하는 겁니까?”
“아니요. 의리가 계약서죠.”
그렇게 말하며 홍성욱이 씨익 웃었다.
이온이 보기에 영화·드라마 관계자들도 허세가 만만치 않다.
비보이나 트릭커들의 플렉스(Flex)도 때때로 짜증나는 이온이다.
헌데 이쪽 세계 사람들의 자랑질도 만만치 않게 소름 돋는다.
‘계약이면 계약이지. 의리는 개뿔.’
암튼 이온은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배우 활동 에이전시 제안을 잠정 보류했다.
어느새 술자리 인원이 줄었다.
하나 둘 귀가를 하기 시작했다.
홍성욱은 대선배들을 위해 열심히 대리기사를 부르고 배웅을 했다.
“선생님은 어떻게 가십니까? 차 가져 오셨습니까?”
이온이 끝까지 술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지균에게 물었다.
“차 없어. 콜 부르면 된다.”
“콜 불러드릴까요?”
“홍 캐디가 알아서 할 거야. 넌 네 친구 챙겨.”
“예. 선생님.”
“등산 좋아하냐?”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모릅니다.”
신지균이 인상을 찌푸렸다.
“안 해봤습니다.”
“서울 살면 사방이 다 뒷동산인데?”
“남산은 올라가 봤습니다.”
“한국대라며?”
한국대에 다닌다 해서 관악산 등산코스를 모두 정복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캠퍼스 안을 걸어 다니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학생도 꽤 많다.
“스포츠는?”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기계체조 할 줄 압니다. 파쿠르도 조금 합니다.”
“축구 안 좋아해?”
“좋아합니다.”
“야구는 해 봤어?”
“안 해 봤습니다.”
“뭐 이렇게 재미없게 산 놈이 다 있냐? 그래서 배우 하겠어?”
단비가 좀비처럼 상체를 일으켰다.
거슴츠레하게 말했다.
“선생니임, 이온이가요. 공부만 졸 잘 한 모범생 같잖아요~ 근데요 고등학교 때부터 아메리카 대륙을 넘나들던 모험가에요. 어드벤처러~ 유 노 어드벤처러 인디아나 존스 오케이? 아니, 두 유 노우?”
부끄러움은 이온의 몫이다.
이온이 단비의 머리에 손을 얹어 지그시 눌렀다. 자연스럽게 단비의 얼굴이 도로 테이블에 처박혔다.
“고등학교때부터 해외 봉사를 좀 다녔습니다.”
“......?”
“대학입시에도 도움이 되고, 제가 어릴 때 좋은 분들께 신세 진 것이 하도 많아서...... 갚으면서 살자는 마음으로.”
“어린놈이 무슨 신세를 져?”
“아기 때 많이 아팠습니다. 미국의 어린이자선단체나 교포 단체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못 살고 어려운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원봉사를 했다? 그걸 갚기 위해서?”
홍정욱이 들었다면 더욱 환장할 만한 정보였다.
아니 어지간한 매니지먼트 회사라면 당장에 계약하자고 달려들 만하다.
학폭, 마약, 성폭력 등의 문제로 연예인 인생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례가 늘어나는 추세다.
과거가 깨끗하고 미담까지 장착하고 있는 배우 지망생을 마다할 기획사는 없다.
“자식이 기특하네.”
“요즘은 고등학교 때부터 많이들 그렇게 합니다.”
“나쁜 짓은 안 해봤냐?”
“특별히......”
“가출도 안 해보고?”
“네.”
“일요일에 주로 뭐해?” “영화 많이 봅니다.”
“너희 학교 뒷동산 함 올라가볼래?”
“관악산 말씀이십니까?“
“가볍게 연주대에 같이 올라가 보자.”
“......예.”
이온이 차마 거부는 못하고 내키지 않는 투로 대답했다.
“안 내켜?”
“아닙니다.”
“네 연락처 좀 찍어봐라.”
신지균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이온이 건네받아 자신의 연락처를 등록해주고, 자신의 폰에도 신지균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혹시 토요일에 술 생각나면 여기로 와라. 공연 내릴 때까지 나는 주로 이곳에 있을 것 같으니까.”
오라는 것인지 알아서 하라는 것인지.
배우였다면 무시할 수 없는 말이다.
하늘같은 선배가 하는 말이니.
그런데 이온은 배우 후배가 아니라 스태프다.
‘다시 이곳을 오지 않아도 상관...... 없겠지?’
신지균까지 주점을 떠났다.
남은 사람은 이온과 단비 둘 뿐.
이온은 퍼질러 있는 단비를 보다가 주방으로 가서 얼음물을 받아왔다.
그리고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있는 단비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최단비. 얼굴에 얼.음.물. 부을 거야. 하나, 두울......”
“꺅! 하지마 이 나쁜 노마~”
단비가 스프링이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앉아.”
단비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이온이 얼음물이 가득 담긴 생맥주 잔을 단비 앞에 놓았다.
단비가 생맥주 잔으로 손을 뻗었다.
“기다려!”
우욱.
단비가 구역질을 했다.
이온은 단비가 진정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어느 정도 진정된 단비가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가자!”
“어디?”
“집에 가야지. 여기서 살림 차릴래!”
“왜 화를 내구 그래.”
“화가 안 나게 생겼냐? 이기지도 못할 술을 왜 그렇게 마셔.”
“이 바닥에서 얕보이지 않으려면 술이 약하면 안 돼. 쎄야 돼! 것두 무지하게!”
여전히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고 있지만, 정신을 조금 차린 것 같다.
“손버릇 나쁜 놈이나 음흉한 놈들 노는 물에는 근처도 가지마.”
“누가 좋은 놈이고 누가 이상한 놈이고 누가 나쁜 놈인지 어떻게 알아.”
“액션캠프에서 배운 거 잘 써먹어. 병신 같이 당하지 말고.”
“다경이가 판사나 검사가 되고 나면.”
“언젠 줄 알고?”
“법조계에 믿을 만한 빽이 있어야 지저분하게 구는 새끼 후환 걱정 없이 걷어 차버리지. 지금 잘 못 불알 차면 나만 매장 당해.”
“친구 빽 만들 생각 말고 니가 대배우가 될 생각을 해라.”
“될꼬야. 무시하지마~”
쫑알쫑알 대던 단비는 택시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이온은 단비의 집에서 부모님과 마주쳤다.
“며칠 전에는 수정이가 업고 오더니, 오늘은 이온이구나. 다음에는 영재나 다경이가 데리고 오겠다.”
“오늘 단비가 연극배우 선배님들하고 예술과 낭만을 과다 섭취했어요.”
“아휴~ 말도 마. 이온아. 저 기집애를 어쩌면 좋니. 허구한 날 연극하는 선배들하고 술 퍼마셔. 내 속이 속이 아니야.”
이래서 친구 집에 오는 것이 꺼려진다.
어른들이 이온만 보면 그렇게 자식들 뒷담화를 하시니까.
“수정이, 영지 그렇게 셋이서 판교에 모여 살겠다고 하는데. 고삐 풀어놓으면 무슨 짓을 할지.”
“어머니, 단비 독립시키지 마세요. 그건 아니라고 봐요.”
“저 망아지를 누가 말리겠어.”
“저는 이만 가볼께요.”
“자고 가. 둘째 방 비어있어. 군대 갔잖아.”
“아니에요. 내일 출근해야 해서 집에 들어가 봐야 돼요.”
이온은 자고가라는 단비 부모님을 뒤로 집을 나섰다.
그런 이온을 보며 부부가 대화를 나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슬이가 이온이 스턴트맨 하게 내버려 두는 걸 이해할 수가 없어요. 여보.”
“세상에서 이온이를 제일 잘 아는 애가 이슬이야. 어련히 생각이 없을까.”
“둘째가 딸이었으면 우리 이온이 사위를 들이는 건데.”
단비 부모님은 딸인 단비를 이온에게 들이밀지 않는다.
녀석들끼리는 형제 혹은 자매와도 같은 사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남매를 위해 좋은 혼처를 알아보고 중매를 서줄 의향이 있는 단비의 부모님이었다.
“먼저 이슬이부터 시집보내야지. 이온이는 결혼 생각하기에는 일러.”
“그러지 않아도 다 생각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