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중앙의 반란 소식이 제국 각지로 퍼지자 모두가 당황에 빠진 가운데 제일 두려움에 떠는 지역이 있었으니 바로 서부였다.
우주 흰고래가 국경에 출현하며 곧 엘다란과 전쟁이 터지는 게 아니냐 하는 이야기가 돌던 와중이었다.
<지금 전쟁이 터지면 우린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다 죽겠지.>
정찰 임무 중이던 두 명의 전투기 파일럿이 레이더를 확인하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카와란 성계.
서부 끝자락에 있는 이곳은 제국에서 긴장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였다.
실제로 정찰 중에 엘다란 전투기와 마주치는 횟수가 늘고 있었고 적들은 보란 듯이 제국 영토를 염탐했다.
실제로 교전이 발생하는 경우도 없진 않았는데 그럴 때면 십중팔구 격추당하는 쪽은 서부 측 전투기들이었다.
마법공학이 엄청나게 발달한 엘다란의 전투기들은 제국 전투기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비행궤적을 선보였고 이것은 전투기끼리의 도그파이트에서 엄청난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렇게 야금야금 전력 누수가 발생하는 가운데 중앙마저 반란이 일어나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수뇌부는 별말 없답니까?>
<애초에 수뇌부는 기대할 건더기가 없는 양반들이야.>
선임은 수뇌부에 망조가 든 게 이미 오래전의 일이라며 파벌싸움만 벌이는 고위 장성들을 싸잡아 욕했다.
안 그래도 살기 팍팍한 서부가 나락으로 떨어진 요인이라며 말이다.
그때였다.
레이더를 확인하던 후임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적 전투기 발견! 50대, 100대! 계속 늘어납니다!>
<여기는 마틴 대위. 대단위 적 전투기 부대를 발견했다! 반복한다! 수백 대가 넘는 전투기가 아군함 쪽으로 향하고 있다!>
긴급 통신을 전함과 동시에 기수를 돌려 전투함으로 귀환하는 장교들.
그러나 잠시 뒤, 그들은 생전 본 적 없는 엄청난 광경을 마주해야 했다.
그것은 드넓은 우주를 빼곡하게 수놓은 엘다란 전투기의 향연이었다.
흰빛을 띤 엘다란 전투기들이 원을 그리며 일대를 방어하는 가운데 분홍빛 파장과 함께 적 전투함들이 대규모 워프를 해오고 있었다.
<아아, 신이시여….>
제국 영토 한가운데로 공간 도약을 시도하는 엘다란의 군단 병력.
서부의 멸망을 알리는 대전쟁의 시작이었다.
* * *
제국의 모든 힘은 중앙에 집중되어 있다.
그 단적인 예로는 군단의 숫자를 들 수 있는데 북부와 남부를 모두 합쳐봐야 군단 숫자가 스무 개도 되지 않았지만, 중앙의 군단 숫자는 황성에만 백여 개에 달하는 군단 병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서부의 군단 숫자는 고작 다섯 개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2개 군단은 엘다란과의 개전 일주일 만에 우주의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엘다란은 전투함 20만 척.
20개 군단급 병력을 동원해 서부를 갈가리 찢어놓았다.
애초에 중앙의 지원이 없으면 상대가 안 되는 전쟁이었다.
우주전은 매복이라든가, 지형을 이용할 수 있는 전장이 거의 없어 순수한 전투함의 스펙과 화력전 양상을 띠게 된다.
이런 와중에 전투함의 성능마저 엘다란이 우세를 점했으니 서부로서는 손쓸 도리가 없는 실정이었다.
수많은 서부 자치령이 엘다란 손에 떨어졌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그들이 인간을 가축처럼 화물선에 실어 데리고 갔다고 증언했다.
어비스데몬처럼 모조리 죽이지 않는다는 점은 그나마 나았지만 어딘지 모를 곳으로 끌려간 인간들은 매우 비참한 삶을 살게 될 터였다.
십중팔구 엘다란의 노예로 살다 생을 마감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목 밑으로 칼이 들어온 서부는 다급히 지원을 요청했다.
중앙은 반란으로 맛이 가버렸기에 그들은 북부와 남부에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들 반응은 썩 냉랭하기만 했다.
<우리도 코가 석자요. 누가 누굴 도와달라는 거요. 이만 끊소.>
어비스데몬의 반격에 원정군 대장이었던 라이키니르까지 쓰러지며 초상집 분위기가 된 북부는 제 한 몸 지키기도 버겁다며 부탁을 단번에 거절했다.
“우리가 무너지면 다음은 당신들 차례야!”
리그넬 원수는 악을 쓰며 외쳤으나 상대는 이미 통신을 끊은 뒤였다.
그는 부들부들 떨며 곧장 남부에 연락을 넣었다.
모리더스 원수가 중앙과의 전면전 준비를 위해 물밑으로 평의회 의원들을 설득하던 때였다.
“모리더스 원수…. 제발 도와주시오. 이대로 있으면 서부는 모조리 도륙당할 것이오.”
<사정 딱한 거야 이쪽도 잘 알지만 타 경계 지원은 중앙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걸 잘 알지 않습니까.>
“지금 허가 타령할 때가 아니란 말이오. 적들이 수십만 대군으로 우리를 완전히 찢어발기고 있소. 엘다란이 포로로 잡아간 제국 시민을 노예로 부린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인바, 이미 200억 명이 넘는 시민이 적의 손에 떨어졌소. 여긴 하루하루가 지옥 그 자체요.”
모리더스 원수도 저들의 딱한 사정을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지원해 주겠단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적 규모가 20개 군단이라지 않은가.
남부의 군단을 모조리 지원해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심지어 적이 증원이라도 하는 날엔 그날로 남부까지 멸망 확정이었다.
모리더스 원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차라리 메인게이트를 중심으로 수성전을 펼치면 저들은 거리의 제약으로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최선의 수는 전투를 피하고 남은 서부의 시민들을 남부로 대피시키는 거였지만 서부 장성, 귀족들과 평의회가 이 안을 받아들일지 의문이었다.
결국 모리더스 원수는 즉답을 피하고 최대한 빨리 답을 주겠다며 일단 통신을 마쳤다.
‘이건 존과 의논을 해봐야겠군.’
모리더스 원수는 모든 일정을 잠시 미루고 짬을 내어 존 메이어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충성! 존 메이어 연락받았습니다.>
“존. 소식은 들었겠지. 서부가 엘다란의 침공으로 쑥대밭이 되었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상황이 무척 어렵다고요.>
“이미 수백억 명에 달하는 시민이 적들에게 사로잡혔네. 조금 전에 서부 원수가 지원을 요청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아서 자네 의견을 듣고자 연락했네.”
모리더스 원수는 남부엔 당장 동원 가능한 10개 군단이 있지만 향후 중앙과의 결전을 생각하면 이 병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라는 이야길 꺼냈다.
게다가 지금은 조용하지만 여전히 저 너머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을 융족도 있었다.
비상시를 대비해 최소한의 전선 수비병력은 필요한 상황이었다.
차분히 현재 상황에 관한 정보를 들은 존은 원수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게이트를 끼고 방어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데 퇴각을 권해보시죠. 수송 작전이라면 전투함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으니 이쪽에서도 거들 수 있을 겁니다.>
“저쪽에서 제안을 받겠나?”
퇴각은 결국 본진을 다 버리고 타 경계로 망명하라는 것인데 군 수뇌부와 평의회가 모든 기반을 포기할 것 같진 않았다.
<저쪽에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면 저희도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존은 중앙과 싸우기 위해 미사일부터 전투함까지 모든 걸 다 바꿔야 하는데 이는 아무리 빨라도 년 단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군단을 추가로 편성하고 그만한 전투함과 물자를 생산하자면 이번에 새로 얻은 남부 영토의 신규 자원지대 개발이 필요했다.
이런 대규모 사업이 손짓 한 번으로 뚝딱 될 리가 없었다.
<원수님. 지금은 내실을 다져야 할 때입니다. 만약 남부의 미래가 최우선이라면 단호히 거절하시죠.>
“알겠네. 내 자네의 의견을 꼭 참고하겠네.”
존과의 통신을 마친 모리더스 원수는 눈가를 주무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서부군 수뇌부에 답장을 넣었다.
애석하지만 병력을 지원하긴 어려운 상황이고 퇴각을 한다는 전제하에 화물선과 수송선을 보내주겠단 답변이었다.
이를 확인한 서부 원수 리그넬은 펄쩍 뛰며 남부에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아군의 어려움을 모른 체하는 쓰레기들은 머지않아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거라며 말이다.
“제국에 망조가 들었다! 당장 서부가 무너지면 다음은 자기네들 차례라는 걸 모른단 말인가!”
리그넬 원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남아있는 병력을 모두 끌어모아 반격을 준비했다.
아직 3개 군단이 남아있었고 휘하 맹장들이 항전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절망적인 병력 차이지만 무력하게 소개 작전을 펴거나 항복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러나 27년 4월 3일.
키탈란 성계에서 펼쳐진 반격 작전에서 서부군은 남아있던 군단까지 모조리 잃고 말았다.
서부평의회 의원들과 대귀족들은 짐을 싸 들고 타 경계로 도주했고 리그넬 원수는 자신의 권총과 함께 집무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렇게 서부는 완전히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 * *
서부에 더는 제국군이 돌아다니지 않게 되자 엘다란은 제집 드나들 듯 제국을 유린했다.
겉모습은 엘프와 비슷하지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인 엘다란은 재미로 사람을 죽인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공포에 빠진 피난민들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함선을 이용해 게이트를 넘으려 했다.
이들에게 있어 활로는 오직 남부뿐이었다.
피난민을 감당할 자리도, 식량도 없던 북부는 일찍이 게이트를 닫아버렸다.
메인게이트는 양쪽에서 어느 한쪽만 작동을 멈춰도 사용이 불가능했다.
반란 소식이 제국 전역으로 퍼지고 문이 닫히긴 중앙 역시 마찬가지.
아직 게이트를 열어두고 있는 건 남부가 유일했고 그렇게 날마다 수십, 수백억 명에 달하는 서부 시민들이 게이트를 타고 남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남부평의회는 이들을 어떻게 다 먹여 살릴 거냐며 우리도 게이트를 닫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모리더스 원수는 망가진 중앙을 대신해 우리라도 저들을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며 끝까지 피난민을 옹호했다.
그렇게 게이트 주변의 외곽 자치령엔 임시 피난민 거처가 마련되었다.
영주들은 우르르 몰려온 서부 시민들로 자치령이 붐비는 걸 썩 싫어하진 않는 기색이었다.
이 외곽 자치령이란 건 자원도 별 볼 일 없고 적은 인구 규모에 의해 내수 시장도 활성화 안 되는 가난한 행성이 태반이었는데 피난민 중 일부를 정착시키기만 해도 자치령의 등급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릴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다만 원래 가난했던 자치령들인지라 피난민의 식량 문제가 대두되었다.
모리더스 원수는 급히 긴급구호 물품을 마련하는 데 수뇌부의 역량을 총동원했고 그렇게 터전을 잃고 떠밀리듯 남부로 온 서부 시민들은 매일 죽 한 그릇으로 연명하며 반란이 일어난 중앙을 매일같이 씹어댔다.
그 분노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했다.
피난민 사이엔 서부에서 활동하던 이단심문관들도 있었는데 오죽하면 이들도 황제를 욕하는 시민들을 보며 잠자코 몸을 사릴 정도였다.
그렇게 밀려드는 피난민을 무한정 수용하는 사이, 평의회에선 조속히 긴급 안건이 통과되었다.
피난민을 자치령 시민으로 받아들여 영지 관리를 꾀하는 영주에게 각종 세제 혜택 및 지원을 약속한다는 정책을 발표한 것이다.
이는 게이트 주변에 과포화 상태를 아득히 뛰어넘어 몰린 서부 시민을 남부 전역으로 나누어 피로를 분산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세금을 깎아주겠다니! 간만에 평의회가 제대로 된 정책을 추진했군!”
“그러게나 말일세. 이러면 우리도 마땅히 한 손 거들어야지!”
자치령 관리를 맡은 남부 대귀족들은 이 같은 정책을 환영했고 즉시 여객선이며 화물선을 총동원해 피난민 수송을 명했다.
먹을 것, 입을 것 모두 변변치 않아 몹시 힘겹게 지내던 피난민 처지에서도 나쁠 게 없는 정책이었다.
이주만 하면 의식주를 제공해 주겠단 소리에 냉큼 함선에 올라탔던 피난민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이제 피난민들은 더 이상 아무 함선에나 오르지 않았다.
기왕이면 더 크고 부유한, 티어가 높은 자치령에 배속되길 원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주들은 때 아닌 브리핑을 준비하며 피난민들을 설득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 자치령은 한 달에 500크레딧을 정착지원금으로 준다는군.”
“이보게. 눈앞의 작은 이익만 쫓으면 삼대가 불행해진다고.”
“어디 좋은 곳이라도 있나?”
“남부 사정에 정통한 친구가 그러는데 여기는 영주가 대장까지 지냈다더군.”
“대장이라!”
자치령을 관리할 수 있는 대귀족의 최소 기준은 군공을 세워 장성으로 전역하는 것.
하지만 준장으로 전역한 인물과 대장으로 전역한 인물이 받을 수 있는 자치령의 등급엔 하늘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다.
남들도 다 가지고 싶어 하는 자원도 풍부하고 좋은 위치에 있는 자치령은 군공을 더 많이 세운 인물에게 우선 배정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대장급 인물이 영주라면 군부와의 연결고리도 든든할 테고 더 부유할 확률이 높은 셈이었다.
서부 피난민들이 남부 사정에 정통해지기까진 며칠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정보를 모았다.
그렇게 도통 사람이 모이질 않는 작은 자치령의 영주들이 한숨을 폭폭 쉬고 있을 때, 피난민 사이에 진정한 고래가 출몰했다.
“새로운 공고가 떴군.”
“메이어 행성?”
“남부 전선 쪽에 있다는데?”
“전선 쪽이면 위치가 너무 형편없잖아.”
자신들과 함께할 새 시민을 모집한다는 공고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런 공고가 하루에도 수백 개씩 올라왔지만 혹시라도 좋은 자치령 이주 기회를 놓칠까 싶어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이었다.
“잠깐 영주 이름이 존 메이어로 되어 있어.”
“존 메이어라고?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젊은 영웅 아닌가. 동명이인인가?”
“그럴 리가. 남부군 대장이라고 표기해 둔 걸 보면 우리가 아는 존 메이어가 확실해.”
“고향이 남부란 이야긴 들었는데 이건 예상 밖이군.”
“혹시 그가 지금 남부에 있는 건가?”
모두의 관심이 쏠린 그때, 공고문을 속독으로 읽은 시민들이 앞다투어 정거장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유는 공고문 끝의 마무리 문단 때문이었다.
「본 자치령은 연방군 대장 존 메이어가 직접 관리하며 남부 최고 자치령으로서의 개발을 약속함.」
“이, 이건 기회야.”
“빨리 정거장으로 가!”
“벌써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어!”
체계적인 계획도, 구체적인 수치도 없었으나 시민들은 오직 영주의 이름을 믿었다.
연방군 대장 존 메이어.
지금 피난민에겐 저 황제보다도 신뢰와 믿음을 주는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