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셔틀 안에서 튀어나온 제퍼슨은···누가 봐도 전함이 터질까 봐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던 거로 보였지만 나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본래 이단심문관은 전투에 참여할 의무가 없기도 했을뿐더러 이단심문소를 통해 앞으로 도움 받을 일이 많이 남아있었다.
굳이 그를 부끄럽게 해서 좋을 일은 없으니 그냥 이대로 넘어가기로 한 것이다.
함 내에 쳐들어온 적을 제압한 이후, 전투는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남은 적이 거의 없기도 했고 북부군 전투기를 괴롭혔던 적들이 우수수 흩어지고 있었다.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생체전투함이 무너지자 그대로 주저앉은 것이다.
이제 전장엔 적 전투함이 불과 몇 척 남아있을 뿐이었고 나는 본래의 목적을 잊지 않고 직속 부대에 전함을 탈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생체전투함을 살아있는 채로 붙잡아 연구에 쓰겠다는 이야긴 함장들에게도 이미 전파된 사실이지만 실제로 작전을 실행하겠다 하니 다들 조금은 놀란 기색이었다.
특히 북부군 함장들의 반응이 좀 더 거칠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전함급 생체전투함을 산 채로 데려간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안 되는 게 어딨어. 하면 다 돼!
그리하여 나는 마지막 목표 달성을 위해 엔터프라이즈호의 옆구리를 물었던 적 전함을 타겟했다.
적도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느꼈는지 산성탄을 사방으로 뿌리며 최후의 발악을 해댔는데 카린의 실피드 앞에선 모두 헛수고였다.
그녀는 전투기는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고속기동으로 산성 촉수를 파괴했고 이후 방공망이 완벽히 무력화되자 나는 적함의 청소를 명했다.
‘니들만 백병전할 줄 아는 게 아니다.’
처음으로 전투 도중 어비스데몬의 함선 안으로 연방군 병사가 돌입하는 상황.
일부 함장이 저 안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며 반대하는 가운데 병사들을 태운 셔틀이 엔터프라이즈호에서 출발해 적함을 붙잡기 시작했다.
내부 청소 작전엔 진저를 필두로 한 특공대와 힘이 좋은 오크 병사들이 주축을 맡았다.
크릭과 오크를 우선 편성한 건 절대 그들보다 인간 병사를 아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대인전 전투 역량이 인간 병사보다 더 뛰어난 게 이유였고 실제로 적함에 들어가 전투를 해야 한다는 작전 개요가 나왔을 때, 진저와 야쿠차는 자신들이 이 일을 맡고 싶다며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들이 이 위험한 전투에 스스로 나선 이유는 단 하나.
종족의 가치와 위상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제국 연방군은 여러 가지 종족이 섞여 있지만 솔직히 모든 종족의 대우가 공평하다고 볼 순 없었다.
크릭이나 오크처럼 제국 휘하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종족은 장교 코스를 밟을 수 있어도 위에서 끌어줄 베테랑이 없어 늘 진급에 상대적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었는데 이럴 때 그들이 출세하는 방법은 위험한 일을 도맡아 빠르게 군공을 쌓는 길뿐이었다.
나는 이들이 느끼고 있을 차별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에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고 이내 곧 침투 교전이 시작됐다.
외벽을 뚫고 들어간 병사들은 소총을 앞세워 어비스데몬의 소형 개체와 맞붙었다.
이미 생포한 바 있는 사마귀 형태의 괴물이었다.
맘 같아선 내가 그들을 이끌고 전투를 지휘하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엔터프라이즈호에 남아 병사들의 승리 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매티스를 비롯해 비행대대장인 지크에 이르기까지.
내가 직접 백병전을 지휘하겠다는 제안에 엄청난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다.
<사령관님. 영관 장교도 아니고 세상에 어느 소장이 총 들고 백병전을 하러 들어간단 말입니까. 위치를 좀 생각해 주십시오.>
<적함에 자폭장치라도 있으면 돌이킬 수 없는 사고로 번질 겁니다.>
헨리와 로저도 같은 의견을 냈고 특히 카린의 반대가 제일 심했다.
내가 그러한 제안을 꺼냈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그럼 자기도 함께 가야겠다며 강력히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안 그래도 대귀족들의 분노로 나는 보이지 않는 위협에 노출된 상황.
카린은 자신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내가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 게 끔찍하게도 싫은 모양이었다.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뭐가?’
-아무것도 아니다.
‘음? 대체 뭔데?’
아무튼, 그렇게 나는 다시 함교로 돌아와 최종 지휘를 맡게 되었다.
“EMP는 어떻게 되었나.”
“이미 10여 발 이상 투하했습니다.”
매티스 중령은 셔틀이 돌입 전 적 전함을 향해 EMP탄을 다발로 퍼부었음을 알렸다.
이번 작전의 목적은 살아있는 채로 생체전투함을 낚아 그 시스템을 분석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면 당연히 EMP 같은 건 쓰지 않는 편이 옳았다.
EMP에 적함 내부의 시스템이 망가지기라도 하면 어렵게 전투함을 확보하는 의미가 퇴색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곳에 병사들을 투입하면서 그 정도 지원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로저 말대로 자폭장치라도 발동하는 날엔 돌이킬 수 없는 대형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자폭장치는 무슨, 그딴 게 어딨어.”
갑자기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도, 매티스도 깜짝 놀라 고갤 돌렸다.
분명 전투가 한창 진행될 때만 해도 관심 없다는 듯 제 방에 틀어박혀 있던 공녀였다.
“언제 오셨습니까?”
“조금 전에.”
그녀는 이제야 잠에서 깼다며 하품을 하더니 말했다.
“세르톤에 있는 생체전투함 말이야. 이미 다 죽은 개체긴 해도 꼼꼼하게 조사했단 말이지.”
공녀는 일전에 조사한 전투함에선 자폭장치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고 했다.
“애초에 몸 안에 폭탄을 넣고 다니는 생물체가 있다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렇긴 하죠.”
“그리고 저건 일반 전투함도 아니고 생체전투함이잖아. 애초에 자폭장치가 있다고 한들 EMP에 타격을 받는 구조는 아니겠지.”
그리 말한 공녀는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작전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곧 손에 살아있는 표본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니 관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작전은 빠른 속도로 전개되었다.
크릭의 총기를 다루는 솜씨는 날카로웠고, 진동형 양날을 장착한 도끼를 휘두르는 오크 전사들의 무력도 무시무시했다.
이런 무력 집단 둘이 힘을 합치자 괴물 사마귀도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작전 개시 30분이 채 되기 전에 병사들은 함교를 장악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함교 쪽에 가깝게 셔틀을 댔다고 해도 엄청난 속도였다.
<함교 장악 성공했습니다. 엔진 쪽으로 병력을 보내 후미까지 잔여 개체 소탕을 시작하겠습니다.>
“수고했다. 조심해서 마무리하도록.”
<라저.>
진저는 미리 받아간 라이트닝 충격기를 꽂아 생체 전투함을 완전 무력화시켰다.
이 장치는 북부의 연구진이 아이디어를 낸 것을 세리스 공녀가 마법을 이용해 완성한 것으로 전기 충격을 이용해 적 전투함의 생체신호를 정지시키는 용도였다.
‘운이 좋았군.’
적함을 정리하던 그 시각에 일대에선 항성풍이 터지기 시작했다.
전투가 조금만 더 늦어졌더라면 아군 전투기가 전멸할 수도 있던 것이다.
그렇게 불어닥치는 폭풍속에 우린 전투함을 끌고 세르톤으로의 복귀를 서두르던 때에, 공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번엔 내가 미안했다.”
“예?”
“연구소 사고 때 말이다. 내가 좀 과했지.”
“지나간 일이니 괜찮습니다.”
공녀가 갑자기 사과한 이유가 뭘까를 생각해보니 이번에 전투함을 탈취 작전을 편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든 모양이었다.
확실히, 생체전투함 탈취 작전은 어지간한 사령관은 시도 엄두조차 내지 않을 법한 일이긴 했다.
나야 연구 성공으로 인한 리턴 값이 워낙 크니까 위험 부담을 감수했지만 말이다.
“연구가 잘 됐으면 좋겠군요. 그럼 북방을 정상화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잘 될 거야.”
팔짱을 낀 공녀는 자신만만한 투로 말했다.
“저만한 표본까지 얻었는데 실패하면 레하반이란 이름이 울 일이지. 시간도 충분한 편이고.”
연구에 필요한 기간은 항성풍으로 인해 넉넉해질 터.
앞으로 전쟁의 향방은 이번 고립 기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 있었다.
적도 아군도 모두 발이 묶이게 되는 시기.
본격적인 불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
적 전투함 500여 척 격파.
이는 연구를 위한 적함 탈취 같은 공적을 빼더라도 북부에선 근래 볼 수 없던 큰 군공임엔 틀림없었다.
나는 세르톤으로 귀환하는 길에 즉시 북부군 수뇌부와 평의회에 보고를 올렸지만 그들의 반응은 어쩐지 냉랭하기만 했다.
전선의 행성들을 지켜내며 소개 작전에 성공했을 때만 해도 젊은 영웅이니 하며 나를 치켜세워주기 바빴던 이들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이유야 뻔했다.
-돈을 잃었으니 기분이 나쁘다 뭐 그런 건가?
‘아마도.’
이들은 이미 고위 귀족 신분을 획득한 장성이거나 장성 출신들.
이번 화폐개혁으로 적지 않은 재산을 날린 모양이었다.
‘그나마’ 칼 원수가 내게는 호의적인 편이었지만 그도 어디까지나 말뿐이었다.
세르톤에 당장 필요한 건 보급을 위한 군수공장을 가동할 자원, 그리고 식량이지만 북부군에게선 더 이상의 지원은 없을 모양이었다.
‘빠듯하군.’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다시 들여다본 서류 하나.
그 안엔 이번 항성풍 기간 동안 식량이 부족하다는 정보가 담겨 있었다.
분명 대형 화물선도 받고, 북방에서 식량을 꾸준히 사들이며 대비를 했는데도 이런 결과가 발생했다.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은 너무 많은 주민의 합류였다.
어비스데몬의 침공을 피해, 다양한 루트로 도착한 전방 자치령의 시민들이 세르톤으로 모였다.
그렇게 현재 세르톤엔 무려 3억 명이 넘는 피난민이 집결한 상태였다.
3천만 명도 아니고 3억 명···.
그들은 나를 황제가 직접 파견한 전쟁의 화신, 북부를 되살릴 위대한 개혁자라 불렀고 오직 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본래 제국법에 따르면 자치령의 시민들은 함부로 다른 영지로 이동하여 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자치령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시민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중요 자원.
어느 영주든 자치령에서 사람이 빠져나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이런 전시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는 일은 없었을 거란 뜻이다.
‘돈은 있지만 시간이 부족할 줄이야···.’
이제 항성풍의 본격적인 활성화까지는 고작 하루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
화물을 요청하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할 수 없이 남은 식량으로 매티스 중령에게 쪼개고 쪼개어 버티면 이 시기를 넘길 수 있겠느냐고 조사를 부탁하려던 찰나.
레이더를 통해 주위를 감시 중이던 오퍼레이터들이 긴급히 외쳤다.
“전방에 다수의 전투함 포착!”
“다수의 전투함이라니!”
뜬금없는 보고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지금 우리는 전투를 마치고 세르톤으로 귀환 중이었다.
이번 전투를 위해 행성에 남겨둔 병력은 구축함 몇 대가 전부였고 대규모라고 할만한 병력은 당연히 존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함대 규모는?”
“항성풍 때문에 제대로 파악이 어렵습니다만···대략 2천여 척 이상입니다···.”
2천여 척의 전투함이 우리의 귀환 경로를 틀어막고 있다는 소식에 함교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식별번호나 통신도 아직인가?”
“그렇습니다. 거리가 좀 더 줄어야 확인이 될 것 같습니다.”
이미 활성화되기 시작한 항성풍이 원인이었다.
정찰 전투기를 내보낼 수도 없는 상황.
우린 부디 저들이 적이 아니길 바랐다.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거뒀지만 아군의 피해도 상당한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다시 교전을 벌여 2천여 척의 적함을 상대하는 건 정말로 지옥불 속으로 뛰어드는 격이었다.
-어비스데몬이 양동작전을 펼칠 정도로 영악한 놈들이었나?
‘그럼 정말 최악이야.’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미확인 전투함의 정체가 드러났다.
“북방군입니다! 2군단에 속해있는 전투함들입니다!”
북방군이라는 소식에 채널에 모여있던 함장들 입에선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왜, 지금 북부군이 이곳에 모여있을까.
항성풍이 활성화되기까지 채 하루가 남지 않은 시점이라는 걸 저들도 모를 리 없었다.
저들은 이미 북부에서만 수십 년 동안 활동한 베테랑들이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싸늘한 한기를 느끼며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어쩌면 이곳이 엔터프라이즈호의 묫자리가 될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