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어비스데몬의 전투함에서 튀어나온 전투기가 아군을 향해 쇄도했다.
그 숫자가 어찌나 많은지 꼭 검은 구름을 연상케 했다.
이에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전투기를 출격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조종사들은 불안감 속에 비행포드를 박차고 날기 시작했다.
전투기 조종사는 늘 목숨 걸고 전투를 하지만 오늘은 외부 상황이 특히나 좋지 않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항성풍이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저 멀리 거대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아그니Ⅲ의 항성은 태양의 열 배가 넘는 크기로 화염 줄기를 넘실거렸다.
문제는 이 구역엔 항성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란 점이었다.
원래 우주엔 태양계처럼 단일 항성계는 되려 드문 편이고 하늘에 태양이 둘 이상 떠 있는, 다중 항성계가 더 많았는데 아그니Ⅲ는 주변에 항성을 무려 네 개나 끼고 있는 숨 막히는 전장이었다.
사방 어디에서든 자신의 목숨을 녹일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앞으로 쏟아져 나가 전투를 시작한 전투기들.
교전이 시작되자 초반엔 아군의 우위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영주들에게서 금전적 지원을 받고 사방에서 끌어올린 화물선을 통해 세르톤 공장을 풀로 가동한 결과, 아군 전투기에 모두 이클립스 미사일을 제때 보급할 수 있었다.
어비스데몬의 전투기는 특이하게도 미사일이랄 게 없었고 기총 역할을 하는 열병기와 산성탄만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적어도 전투기 싸움에선 우리의 압도적인 우위가 예상됐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고 딱 1분이 지났을 때, 미사일의 화염벽을 뛰어넘어 압도적 물량으로 쏟아지는 어비스데몬의 전투기 기동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좌익이며 우익, 가릴 것 없이 전투기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령관님! 아군의 피해가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적들의 전투기 스펙이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불안했던 건 이것 때문이었나···.’
이전에 처치했던 놈들과는 색이 다르다고 했던 생체전투함.
그에 맞춰 전투기도 기존의 것보다 더 향상된 파괴력을 지닌 게 틀림없었다.
더 빠르고 단단한 적 전투기.
북방군 함장들이 적의 우세에 당황하는 가운데 중앙을 맡은 엔터프라이즈호 직속 부대는 여전히 적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호 휘하 전투함에서 쓰이는 전투기 기종은 총 세 개.
첫 번째는 남부의 신형 주력 기종인 파이어플라이급.
두 번째는 중앙 주력 기종인 드래고뉴트급.
마지막으로 중앙 최신 기종인 그리폰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중 성능이 가장 처지는 건 파이어플라이급이지만 애석하게도 북방에서 쓰이는 전투기는 전부 파이어플라이급 만도 못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아군의 일방적인 미사일 타겟팅이 끝난 뒤, 전투는 서로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각개 전투로 넘어갔는데 어비스데몬의 신형 전투함에서 출격한 전투기는 파이어플라이급에 맞먹는 기동력을 지니고 있었다.
“상황이 조금 위험한 것 같습니다···.”
매티스가 아군의 초록 점이 하나둘 소실되는 걸 보며 불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적의 전투기 근접전 기량은 이미 아군을 압도했다.
게다가 숫자도 적이 더 많은 상황.
중앙에서 적 전투기를 베며 일당백의 기세를 보이던 카린이 통신을 요청했다.
<사령관님. 중앙은 그리폰급의 화력이 뛰어나 이대로 우세를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쪽 지원을 갈까요?>
“아니. 이대로 간다.”
아군의 피해를 감수하겠다고 받아들여서일까.
함교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은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잠시 뒤, 내가 내린 명령에 함교 인원이 모두 크게 놀랐다.
“전진한다.”
“예?”
“적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준 것도 엔터프라이즈호다. 이 상태에서 우리가 돌출되어 나가게 되면···.”
“시선이 완전히 우리에게 끌리겠군요.”
적의 시선을 끌어 좌익과 우익에 가해지는 부담을 완화하는 것.
아군에게 큰 도움이 될 테지만 여기엔 결정적으로 돌출부를 맡게 되는 엔터프라이즈호의 위험도가 엄청나게 올라간다는 단점이 있었다.
-강화된 엔터프라이즈의 실드라면 해볼만한 묘수다.
안 그래도 중앙 특무함 사양으로 생산되어 강한 출력을 자랑하는 엔터프라이즈호는 개조를 마친 상태라 탈전함급 실드 출력을 지니고 있었다.
“주포를 다시 개방한다. 직속 부대는 엔터프라이즈호 뒤에 붙어 따라오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포격전.
주포 공방전에선 북방군도 어비스데몬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서로 공격을 주고받는 가운데 실드를 올린 엔터프라이즈호가 쭉 미끄러져 나가며 적 전함을 재차 타격하기 시작했다.
푸른 광선이 한번 쏘아질 때마다 적 전함이 한 척씩 무너지며 죽음의 비명을 내질렀다.
벌써 전함 일곱 척 격파.
슬슬 어비스데몬의 눈이 희번덕거리는 기분이었다.
“적들이 우릴 주시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숫자로 몰려듭니다!”
구축함이고 순양함이고 전함이고, 적들은 엔터프라이즈호를 쓰러트리겠단 일념으로 달려들었다.
“좌익과 우익에 일러라! 아군의 피해를 신경 쓰지 말고 중앙에 주포를 집중하라고!”
주포는 위력이 너무 강한 탓에 이렇게 혼란한 형태에선 아군의 피해로 이어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러나 나는 전함의 실드를 믿었기에 지체 없이 사격을 지시했고 잠시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북방군 수백 척의 전투함이 사격지원을 시작했다.
우주에 불꽃을 수놓는 엄청난 사격전.
“엔터프라이즈호 실드 빠르게 감소합니다!”
<미하일 함장으로부터 속보! 엔진부 피탄으로 심각한 데미지를 입었다고 합니다!>
<요슈아 함장도 장갑 손상을 알려왔습니다!>
중앙부가 돌출된 탓에 엔터프라이즈호를 따라붙던 후방함의 피해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나 적의 피해는 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500척이 넘던 적함은 이제 반도 채 되지 않아 어느덧 진형 붕괴를 맞이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라! 방공망 상태는?”
“아직 양호합니다!”
이미 엔터프라이즈호는 방공망을 최대로 가동한 상태였다.
병사 혼자서는 들 수도 없는 220mm 구경의 대형 실탄이 전함 밖으로 쏟아지는 가운데 광학 병기가 그 틈을 채우며 적 전투기의 접근을 원천 차단했다.
실탄 병기의 경우 우주 시대에 걸맞지 않은 물건이란 인식이 있지만 실물탄을 이용한 방공망의 장점은 바로 저전력 소모에 있었다.
광학 병기는 모두 전투함의 융합로에서 일어나는 막대한 에너지를 잡아먹으며 그 힘으로 적을 격파하게 되는데 실전을 하다 보면 주포를 발사하랴, 실드를 운용하랴, 에너지가 모자라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는 움직이는 요새라는 소릴 듣는 전함급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었는데 이때가 바로 실탄 병기의 장점이 발휘되는 때였다.
광학병기보다 적은 에너지로 방공망을 두를 수 있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이것이 연방군이 실물병기를 제외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용하는 이유였다.
“사령관님! 주포 관리병들이 포신이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경고해왔습니다!”
‘진 어때.’
-흠. 조금 위험하긴 한데 아직 한두 번은 더 버틸 수 있을 거 같다.
전장 전체를 관조하는 진이 그렇다면 분명 더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주포를 쏘며 여덟 번째 전함을 격침시킬 때였다.
어비스데몬의 전투함 수십 척이 일시에 엔터프라이즈호를 향해 머리를 들이밀었다.
방어를 도외시한 돌진.
전투함째로 속도를 올려 물리적 충격을 주려는 의도였다.
전함이며 순양함이며 가릴 것 없이 달려드는 상황에 더 공포스러운 것은 놈들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단 점이었다.
톱니 이빨이 원형으로 회전하는 어비스데몬의 전투함에 물리면 이빨 자국 하난 거하게 남을듯했다.
아군 전투기가 열심히 미사일을 뿌리며 놈들을 저지하려 들었지만 목숨을 걸고 돌파를 시도하는 전함급의 물리력을 미사일만으로 막는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효과가 있는 건 카린의 실피드가 전력으로 일격을 먹이는 거였는데 그마저도 순양함 급까지가 한계였다.
“충격에 대비···큭!”
결국, 기어이 돌파에 성공한 적 전함 세 척이 엔터프라이즈호를 들이받았고 가공할 충격이 함내를 흔들었다.
거의 사람이 날아가다시피 하며 함교가 어질러졌을 때, 나는 인상을 쓰며 일어나 상황 파악에 나섰다.
“피해 상황을 보고해라!”
“1차 장갑이 뚫렸습니다!”
“긴급 경고! 함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침입했습니다!”
“적 침입이라고?!”
어느새 일어난 매티스 중령이 깜짝 놀라 말했다.
분명 어비스데몬은 지금껏 보고된 바로 전함 내부를 돌아다닐 만한 소형 종이 없었기 때문이다.
엔터프라이즈호의 내부 통로는 그 크기가 모두 인간형 종족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니 행성 지표면에서 봤던 수미터 크기의 곤충 괴물들은 전함 내부를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격벽 차단하고 특수부대를 움직이도록!”
“예!”
“매티스, 나도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으니 전투 지휘는 자네에게 맡기겠다.”
“예? 내부 진압은 휘하 병사들에게 맡기시지요. 위험합니다!”
“위험하니 내가 가겠다는 거다.”
이대로 함교에 있으면 더 안전하기야 하겠지만 아군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도 있었다.
남부에서 있었던 전투, 융족과 함내에서 백병전을 치렀을 때와는 상황이 또 달랐다.
그땐 내가 가진 힘이 없어 크게 곤욕을 치렀지만 지금 나는 진이 인정하는 마법 실력자였다.
-인간치고는 나쁘지 않지. 인간치고는···.
게다가 이미 전투함끼리의 교전은 거의 끝난 상황이기도 했다.
놈들의 돌파는 거의 죽기 직전의 발악에 가까웠고 엔터프라이즈호를 미끼로 쏟아진 아군의 주포 사격으로 남은 적함의 숫자는 고작 수십 척에 불과했다.
“재클린 대위! 병사들을 이끌고 사령관님을 모시게!”
“예!”
매티스는 부랴부랴 내 호위를 붙였고 나는 그들과 함께 이동용 고속 통로를 이용해 장갑이 뚫린 쪽으로 향했다.
고속 통로의 원리는 무중력 상태의 통로를 벽에 홈을 파고 이어진 레일 손잡이를 잡고 쭉 미끄러지는 것이었다.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 강한 팔 힘이 요구됐는데 마력으로 순간 근력을 강화할 수 있는 내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빠르게 현장에 도착하자 병사들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다시 중력이 돌아오자 나는 지면을 박차고 달려 병사들에게로 향했다.
-저 괴물은 대체 뭐냐?
거대한 낫.
앞발에 날붙이를 단 괴물이 병사들을 상대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생김새가 꼭 가시가 돋은, 흉악한 사마귀를 연상케 했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병사의 허리가 단번에 무너지는 것을 본 내가 눈을 부릅뜨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통로를 막고 있던 어비스데몬의 소형 개체가 콰드득 소릴 내며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내 마력으로 인해 펼쳐진 중력장이 놈을 뭉개버린 것이었다.
이후 퍽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노란색 체액이 튀자 병사들은 인상을 쓰며 재차 사격에 나섰다.
얼핏 보이는 것만 해도 통로를 막은 괴물이 수십 마리는 되어 보였다.
“사격 중지! 내가 상대하겠다!”
“사령관님?”
기관총을 쏘던 병사들은 내가 올 거라곤 생각 못 했는지 위험하다며 나를 만류했는데 나는 그들을 밀치고 달려나가 더욱 마력을 끌어올렸다.
몸 앞에 중력장을 펼치고 돌진하자 통로를 막고 있던 괴물이 믹서기처럼 갈리기 시작했는데 이 순간만큼은 정말 카린의 무력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 이 맛이지. 마법만 잘 쓰면 삶이 편해진다니까?
키에엑! 소릴 내며 통로의 다른 쪽을 향해 도망치는 괴물들.
내 압도적인 무력에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사령관님! 여긴 위험합니다!]
나는 앞쪽에서 놈들을 몰아넣었고, 뒤쪽에선 크릭이 놈들을 처리 중이었는데 어느새 내게 합류한 크릭들이 폴짝거리며 나를 지켜주겠다고 하였다.
내가 가장 많이 괴물을 쓸어 담았는데도 말이다.
“내부에 두 곳으로 적이 침입했다고 한다. 나는 괜찮으니 너희는 다른 쪽을 지원해라.”
[알겠습니다!]
통역기 불빛을 번쩍이며 경례를 올린 크릭들은 서둘러 다른 구역으로 향했다.
나는 마저 남은 어비스데몬의 잔당을 해치우기 위해 전진했다.
탐색 마법을 펼치자 남은 생명체의 기운 셋이 느껴졌다.
다행인 건 놈들이 도망친 곳이 긴급탈출용 셔틀 구역이란 점이었다.
제법 격렬한 전투였지만 엔터프라이즈호는 심각한 피해에까진 이르지 않았고 탈출용 셔틀 주변엔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서둘러 놈들을 처치하고 한 놈은 생포해야겠단 마음을 먹었다.
보고서엔 등록되어 있지 않던 어비스데몬의 소형 개체.
사로잡아 연구하면 놈들을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렇게 셔틀 구역으로 진입하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날이 내 머리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미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받아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라이트 세이버로 놈의 앞발을 받아친 뒤 나는 왼손을 내밀어 사마귀를 바싹 구워버렸다.
제법 화염에 대한 내성이 있는 듯 보였으나 역시 마법의 불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잿더미를 뚫고 재차 공격을 가해 순식간에 두 마리를 처치한 나는 마지막 남은 놈을 수면 마법으로 재우는 데 성공하며 어비스데몬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융족의 병사에게 몰려 낑낑대던 때를 생각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나는 마법을 연마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함교에 통신을 걸었다.
“매티스, 함내 상황은?”
<피해는 경미한 수준입니다. 본함에 들러붙었던 전함도 포격으로 이미 떨어져 나갔고 내부에 흘러들어온 적 소형 개체도 모두 처치 완료했습니다!>
“나는 연구원들에게 생포한 적 개체를 넘겨줘야 하니 뒷일을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귀환 도중에 공격받을 확률은 거의 없었고 나머진 매티스 중령에게 맡겨도 큰 문제가 없는 일들이었다.
그렇게 연구원들을 호출해 쓰러진 사마귀를 케이지에 넣고 일을 마치려는데 아까부터 거슬리는 기척이 있었다.
‘적이 더 있나?’
탐지마법에는 적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작은 인기척.
셔틀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라이트세이버를 뽑아 들고 다가갈 때였다.
취익- 소리와 함께 탈출용 셔틀의 문이 열렸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누가 감히 탈출 명령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셔틀에 올라탔단 말인가.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셔틀에서 나온 상대를 보곤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사람이 몰릴 때를 대비해 셔틀을 점검했는데 아무 이상 없더군요.”
“······.”
“전투, 수고 많으셨습니다. 함장님.”
머쓱한 얼굴로 내게 인사하는 녀석.
그는 다급히 함교를 빠져나갔던 제퍼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