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Chapter 1. 덴튼 트루 영이 사이영을 숨김
Chapter 1. 덴튼 트루 영이 사이영을 숨김(2)
#1 사이영 3세 시즌
“그러니까 이영이 네가 덴튼 트루 영이라는 미국인이고 그 미국인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을 했다?”
“네!”
“······.”
부모님은 나를 식탁에 앉혀 놓고 말 없이 바라봤다.
제길, 9회 무사 만루때보다 더 떨린다.
“음, 일단은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겐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약속 해줄 수 있겠니?”
“네. 저도 엄마 아빠 빼고는 굳이 밝힐 이유가 없어요.”
“내 새끼, 그 동안 그렇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구나.”
최나영 역시 자신의 아들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서 자신들에게 숨기고 있던 것을 밝히려고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늘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들이었지만 아들의 진짜 정체를 듣고 난 지금 아들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아이였다.
‘환생이라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한국어도 잘 발음하지 못하는 아이가 유창하게 영어를 사용하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최나영은 ‘부모는 절대 학부모가 되어선 안 된다.’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아들에게 과도한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특별한 교육을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한글을 읽고 뉴스를 볼 정도로 똑똑했다.
‘설마 그게 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니!’
엄마는 나를 품에 꼬옥 안아주셨다.
그리고 작게 속삭여주셨다.
“이영아, 네가 누구든 그건 중요한게 아니야. 네가 내 아들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그래, 사실 아빠는 네가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런데 덴튼 트루 영이라는 사람은 누구니?”
아, 이걸 내 입으로 말해야하나?
만화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멋지게 ‘재 이름은 사이 영 투수죠.’라는 명대사가 떠올랐지만 나는 애써 그 대사를 삼켰다.
왜냐하면 나는 사이 영이라는 내 별명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이름 덴튼 트루 영은 내 별명인 사이 영과 달리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시대에 선수생활을 하던 친구들은 다들 비슷했다.
베이브 루스로 유명한 ‘진짜 애송이’ 루스의 본명은 조지 허먼 ‘베이브’ 루스, ‘애송이’ 콥은 타이러스 레이먼드 ‘타이’ 콥, ‘빌어먹을’ 와그너 역시 요하네스 피터 ‘호너스’ 와그너로 불렸다.
전생에는 팬들이 잘하는 선수들에게 별명을 지어주었고 별명이 본명처럼 사용된 경우가 많았다.
내가 사이라는 별명을 싫어하는 이유는 사이라는 별명의 뜻 때문이다.
애당초 사이라는 별명은 내가 시골출신이다보니 붙은 ‘시골뜨기 영’이라는 뜻에 별명이었다.
나는 내 가족, 내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나를 사이영이라 부르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이후 내 공을 본 언론은 내 공이 마치 사이클론(Cyclone) 같다고 하면서 내 별명은 미국 전역에 퍼지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언론에 ‘친구중 한명이 나를 사이클론이라고 불렀고, 내가 그걸 사이라고 줄였지. 그때부터 그게 내 이름이 되었다.’라는 인터뷰를 하고 다녔다.
하, 과거의 흑역사를 굳이 부모님께 알려드릴 필요는 없겠지? 내 인생에 가장 큰 비밀을 알려드렸으니 이 정도 비밀은 애교로 넘어가 주실거야.
“음, 저는 미국 오하이오주 길모어에서 태어났고요. 미국에서 야구를 했어요.”
“야구?”
역시 누가 야구팬아니랄까봐 바로 반응하신다.
“네, 투수를 했고 이후에 평범하게 살았어요. 요즘 호크스가 야구를 못하잖아요. 제가 우승시켜 드릴게요!”
사실 내가 내 비밀을 밝힌 가장 큰 이유는 망할 호크스 때문이었다.
이 망할 호크스는 내가 어릴 때는 준우승도 한 강팀이지만 요즘 돌아가는 상황은 영 시원치 않았다.
내가 야구장을 찾을 당시 준우승을 했던 호크스는 이후 성적이 하락해 작년에는 3위 올해는 가을에 야구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나는 부모님이 항상 행복했으면 했다.
내 당찬 포부를 듣게 된 아버지는 파안대소를 하셨다.
“푸하하! 우리아들이 야구를 그렇게 잘해?”
하, 아버지도 참 내가 덴튼 트루 ‘사이’ 영인데!
“음, 아마 세상에서 저보다 공 잘 던지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에구구! 내 새끼, 어쩜 이리도 귀여울까!”
아버지는 그런 내가 귀여운지 품에 안고 볼을 비볐다.
아직까지 뜨거운 햇빛에 단련되지 못한 내 연약한 피부는 까칠한 아버지의 수염을 이기지 못했다.
“악! 따가워요!”
짝!
“여보 일단 씻으라고 했죠!”
“아, 아파요!”
다행히도 내 비밀을 밝히는 승부는 몸 쪽 꽉 찬 직구로 정확하게 빨려 들어간 것 같다.
#2 사이영 4세 시즌
다행히 내가 비밀을 밝히고 나서도 부모님은 전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셨다.
아버지는 리틀 야구를 알아보셨지만 내 나이가 워낙 어리다보니 아직까지 나를 받아주는 리틀 야구단은 없었다.
물론 나는 리틀 야구단에서 하는 훈련따위는 필요 없었다.
나는 꾸준히 훈련을 했다.
사실 4살이 할 수 있는 훈련이라고 해봐야 달리기가 전부다.
그렇지만 달리기는 투수에게 의외로 중요한 훈련이다.
데드볼 시대라고 불리던 그 시절 에이스들은 한 시즌에 700이닝도 던지는 괴물들이었지만 대부분 다음해에는 팔이 빠져서 은퇴를 했다.
이 시절 투수들은 대부분 상체를 활용해서 공을 던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상하체를 이용한 투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체가 받쳐 줘야 투구에 밸런스가 잡히고 내 딛는 힘으로 더 강한 공을 뿌릴 수 있다.
상하체를 활용한 투구를 하기 위해서 달리기는 매우 좋은 운동이다.
전신근육을 밸런스 있게 유지시켜주면서 체력까지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이론은 구닥다리 이론일지도 모른다.
지금을 알아듣기 힘든 용어로 엄청나게 복잡한 관리가 이루어진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경험이 있다.
나는 세상 그 어떤 투수들보다 많은 이닝을 소화했고 많은 완투를 했으며 많은 승리를 얻어냈던 경험이다.
적어도 내 몸에 맞는 운동법 정도는 알고 있다는 소리다.
물론 나는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에 게으른 남자가 아니다.
내가 현역시절 11년 동안 286승을 거두고 34살이 되었던 시절 이야기다.
평소와 같이 던져온 나는 커리어 로우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20승을 거두는데 실패했다.
당시 나한테 당하고 살던 타자녀석들은 기가 살아서 ‘아저씨 공이 어느 때 보다 상대하기 쉽네요? 이제 은퇴하시죠?’같은 같잖은 도발을 할 정도였고 언론은 나를 ‘사이 영’대신 ‘사이 올드’라고 불렀다.
건방진 기자녀석! 사이 올드라니! 덴튼 트루 올드라고 부르란 말이다!
마음 같아선 데드볼 시대의 데드볼에 맞으면 사람이 진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나이가 들어 녹슬어가는 육체, 그리고 내 공에 점점 익숙해지는 건방진 타자녀석들과 그보다 시건방진 기자녀석들에게 통쾌한 일격을 먹여주기 위해서 커브볼을 익혔다.
당시에는 마구 소리를 듣던 커브볼, 반면 투수가 자신의 공이 먹혀들지 않을 때 익히게 되는 똥볼이라는 인식이 퍼진 커브는 나에게 새로운 발톱이 되어주었다.
나는 당시 최고 수준인 3500불의 연봉에 계약하고 보스톤 레드 삭스에 입단했다.
구단에서는 신생 리그에서 내가 적당히 해주겠지라는 생각으로불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적당히 해줄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 해 아메리카 원년 다승왕, 삼진왕, 최저 자책점왕은 내 차지였다.
나이가 들어 구위는 조금 줄었지만 오버 핸드, 사이드 암, 언더 핸드로 던지면서 10년을 더 뛰고 도저히 번트수비가 힘들만큼 나이가 들어서 은퇴를 했다.
과거 내 경험도 소중하지만 발전한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 역시 멍청한 일이지!
그리고 요즘 나오는 이론들 중에는 내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이론도 다수 존재했다.
예를 들자면 투구수에 관한 이야기다.
1900년 당시 나는 ‘요즘 애들은 너무 공을 함부로 던져.’라는 인터뷰를 한적이 있다.
나는 항상 최소한의 투구수로 최대한 많은 이닝을 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보통 투수들이 워밍업을 하는데 10~15분의 시간을 소모할 정도라면 나는 그보다 짧은 3~4분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불펜으로 간적도 없다.
물론 구원등판을 한 경험은 많지만 벤치에서 바로 마운드로 직행했지 영점을 잡겠다고 어깨를 소모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틀에 한번 등판을 할 수 있었고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많은 이닝을 소화 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 할 수 있는 건 고작 달리기뿐이지만 이것만 해도 호크스 따위는 우승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부모님들의 한을 풀어드리고 나서 야구를 계속 할 건지 아니면 농사나 할 건지 정할 계획이다.
“다녀왔습니다!”
“이영이 왔으면 손발 씻고!”
“네, 엄마!”
쉽게 말해서 입학을 하기 전까지는 그냥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잘 놀기만 해도 된다!
역시 뿌로로 센세! 당신이 옳았어! 노는 게 제일 좋아!
#3 사이영 6세 시즌
올해도 야구가 시작되었다.
시작과 동시에 호크스 특유의 경기가 펼쳐졌다.
요즘들어 부모님 두 분 모두 이상해지셨다.
아, 정정한다.
원래부터 야구를 보실때면 이상하셨지만 요즘 들어 더 이상해지셨다.
“아!”
“에휴!”
매 이닝 2점씩 주고 시작하는 이상한 야구, 그 야구를 매일 보고 계시는 부모님은 오늘도 TV보시며 한숨을 내쉬셨다.
이제 두 분은 더 이상 한밭야구장에 가시지도 않는다.
마치 세상이 무너진 표정으로 TV보시던 두분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 는! 행복합니다! 호크스라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 는! 행복합니다! 호크스라 행복합니다~”
마치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이상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스로 행복하다고 노래를 부르고 계신다.
아무래도 두 분이 이상해진 것은 다 호크스 때문인 것 같다.
내 나이 3살(전생의 여파인지 한국 나이는 어색하다.) 불안불안 하던 호크스는 결국 5위에 머물면서 가을 야구에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부모님들도 낙천적이셨다.
‘한해는 그럴 수 있어.’
‘하긴, 그래도 내년에는 다르지 않을까요?’
‘그럼! 형진이도 2년간 너무 던져서 올해 잠시 무너진 거지 내년엔 다를 거에요!’
내 나이 4살 그해도 호크스는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는 물론 8개 구단 중 무려 8위라는 기가 막힌 성적을 보이며 한해를 마무리했다.
이때부터인가? 부모님은 호크스에 대한 희망을 조금 놓으셨다.
‘아, 내년에는 별명이도 나가고 꽃범모도 나가고······.’
‘하아, 가장 큰 건 감독문제에요.’
‘김인직 감독님만한 감독이 또 어디 있다고 그래요.’
‘믿음에 야구도 좋지만 그래도 믿어선 안 되는 애들까지 믿어버리시니 할 말이 없네요.’
그리고 내 나이 5살, 놀랍게도 바닥이라 생각했던 대전 호크스는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2년 연속 8위 꼴크스라는 별명을 획득하면서 두분은 완전히 희망을 놓으셨다.
그러면서 점점 이상해 지셨다.
‘여보 그래도 8888577한 애들보단 낫죠?’
‘그럼요! 4년 연속 꼴등은 안하겠죠.’
그리고 올해, 올해의 호크스는 작년보다는 좋아 보이지만 그래도 가을야구는 힘들어 보인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꼭 우승 시킬게요!
두 분을 꼭 고쳐드릴게요!
왠지 야구를 더 잘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엄마, 아빠 잠시 달리고 올게요.”
“그러렴.”
“조심해.”
“네, 걱정하지마세요!”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