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65화 (65/183)

40. 행운 (2)

“내 코스프레를 하겠다고?”

디펜더 동생의 제안은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연기된다는 게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로 들렸기 때문이다.

박규를 흉내 내겠다고?

이 프로페서 박규를?

“······쉽진 않을 텐데.”

쉽지 않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계정만 빌릴 건데 뭐가 어려워?”

듣고 보니 좀 쉬워 보이긴 하네.

“······흠.”

“들어 봐? 내가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말해줄게. 오빠도 괜찮지?”

“어. 스켈톤. 우리 동생 이야기 잘 들어.”

디펜더의 말과 달리 디펜더 동생의 말은 듣는 게 아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보는 거였다.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우리 비바! 아포칼립스! 계정과 장비가 페일넷에서 거래되는 거 알아? 중고 게시판에 심심찮게 올라와. 아마,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 것이겠지. 약탈자들이나 스케빈저가 처음엔 뭔지 모르고 쟁여뒀다가 용도를 알고 슬슬 파는 거 같아.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그 계정을 산 녀석 하나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어.

디펜더 동생이 그 문제의 인간이 보냈다는 메시지를 내게 보여줬다.

JUSTICE_MIN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디펜더. 니가 비바! 아포칼립스!의 미친 놈이라며? 사람 막 죽이고 인증하고 ㅋㅋㅋㅋ 시발 ㅋㅋㅋㅋㅋ

JUSTICE_MIN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이제 내가 널 알았어. 이 정의의 용사가 널 알았다고. 오늘부터 널 사냥할 거야. 널 사냥해서 “인증” 할 거라고. 기다려. 그리 오.래.걸.리.진.않.을.테.니······!!!

“뭐냐. 이건? 중학생이냐?”

“그랬으면 좋겠네.”

디펜더 동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 우리 장비를 손에 넣을 정도의 인간이라면.”

“보통 놈은 아니겠지.”

디펜더가 덧붙였다.

디펜더 남매는 이 상황을 꽤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어쩌면 약탈자 집단일수도 있고 개척단 일수도 있겠지.”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2인 1조로 알려지는 건 꽤 위험 하거든. 알잖아? 그게 우리 나름의 무기인 거?”

“흠······.”

“흠이 아니고 끝까지 들어 봐!”

다정이의 계획은 그녀가 비트박스 영상을 찍은 다음, 스켈톤 계정으로 올린다는 것이다.

“분명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 거야.”

다정이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나, 예전에 픽톡에 영상 종종 올렸거든.”

“크흠······.”

조회수가 나오긴 할 거다.

우리 게시판 친구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여자만 나오면 사족을 못 쓰는 친구들 꽤 많으니까.

하지만 내가 여자가 되는 건, 뭐랄까.

스켈톤이라는 나라는 또 다른 자아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일이다.

스켈톤은 스켈톤이다.

내 나름의 이미지가 있다.

게시판의 평가는 좋지 않지만 게시판의 친구를 위해서라면 누구보다 앞장서고, 가끔 비트박스로 고독을 달래는, 무엇보다 비바! 아포칼립스 최후의 유저라는.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네?”

다정이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조금.”

대답하기 무섭게 디펜더가 불쑥 끼어들었다.

“스켈톤. 너 정도 되는 인간이면 알아보는 놈들 반드시 있을 거 같은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다.

100%다.

“솔직히 지난 비트박스 영상도 끝까지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조잡해서 그렇지. 실제 몸이나 얼굴을 드러내면 바로 들키는 거 아니냐?”

“그럴지도.”

내 지난 비트박스 영상도 보안에 신경 써서 그렇지 조금만 내가 자기만족을 위해 나 자신을 드러냈다면 진즉 우민희에게 정체가 들통났을 것이다.

“페일넷이 안 들어왔으면 모르겠는데, 페일넷 애들이 호시탐탐 우리 게시판을 염탐하는 시점에 우리 정체는 모호할수록 좋을 거 같아. 그 뭐야? 전략적 모호성?”

“전략적 모호성이라······.”

“그게 익명성이라는 방패 아니겠어? 어느 날 여자가 됐다가 남자가 됐다가 노인도 되고 엄창이도 되고.”

“······흠.”

좌우지간, 디펜더 남매의 제안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들자는 생각엔 손을 들어주고 싶다.

지금처럼 익명성이 곧 목숨줄인 상황에서는 특정돼봐야 좋을 건 단 하나도 없으니.

당장 디펜더는 저스티스 민이라는 게시판 유입에게 위협받고 있고 나 또한 우민희를 비롯한, 과거의 나를 아는 사람에게 위협받을 수도 있으니까.

“스켈톤 여자로 보이는 거 싫지?”

다정이 불쑥 묻는다.

“그건 좀 그렇지.”

“그럼 디지털 풍화를 하든가, 아예 도용처럼 보이게 하든가, 아니면 가족처럼 생각하게 하든가 그런 식으로 얼마든지 스켈톤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방법들이 있어.”

“내 얼굴을 아는 놈도 있는데?”

“걔들만 알겠지. 하지만 걔들도 헷갈릴 걸?”

“좋아. 일단 시작해보자. 뭐가 됐든.”

일단 M9가 싸움을 걸어왔다.

녀석과의 유치한 싸움에 이기고 지고는 중요치 않지만 이건 다정이의 말대로 기회다.

내가 뜬금없이 비트박스 영상 올려봐야 전처럼 처참한 조회 수를 기록한 채 묻히겠지만 M9가 판을 깔아준 지금 시점에선 내 영상을 봐줄 녀석이 있다.

굳이 나와 디펜더가 억지로 띄우려고 바이럴 마케팅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내 새로운 영상을 퍼뜨려줄 놈들이 있다는 소리다.

내가 아닌, 다정이라면 충분히 파급력이 있겠지.

디펜더 남매가 원하는 “전락적 모호성”을 충분히 퍼뜨리고도 남을.

그렇게 생각하며 교신을 끝내려고 할 때였다.

“아. 그리고 스켈톤. 끊지 마. 내 쪽에서도 용건이 있어.”

이번에는 디펜더 본인이 내게 할 말이 있단다.

종종 추임새를 넣긴 하지만 좀처럼 말이 없는 이 녀석이 갑자기 내게 용건이라니.

궁금증을 느끼며 물었다.

“뭐냐?”

“전에 우리 이사 갈 때 우리 집 주변에 있던 군단파 놈들 기억나지?”

“아. 그 녀석들. 뭐 하는 거야? 당장이라도 전쟁 할 것처럼 병력 쌓아두고 있더니.”

잠시 화제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그 군단파 병력이 변수가 될 거라는 건 확정된 사실이다.

이 멸망기에 그 정도 강한 전력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떤 사건의 예고와도 같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목적이 뭔지는 불명이다.

몇 번이라도 서울을 접수할 기회가 있는데 도통 움직임이 없다.

전투 헬기가 오간 건 본 적이 있는데 그들이 보낸 건지 아니면 지방에서 보낸 건지도 확실치 않고.

디펜더가 그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놈들에게 뭔가 발견한 모양이다.

“그 녀석들 말이야.”

디펜더의 목소리에 음울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광신도와 접촉하는 거 같더라고.”

“뭐라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걔들 영역도 딱 붙어 있었잖아? 뭐, 나도 멀리서 지켜만 본 거라 확신은 못하겠는데, 느낌이 안 좋아.”

“······그래?”

이건 보통 이야기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게시판에 난리가 난 제주도 피난 선단보다 몇천 배는 더 중요한 이야기다.

군단파와 광신도가 손을 잡는다.

이건 어웨이큰을 거느린 군대가 탄생한다는 소리다.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한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는 어웨이큰이 속한 헌터 집단을 군대와 엄격하게 분리했고 중국은 최후까지 어웨이큰을 적으로 규정했다.

국제 협정에 따르면 헌터 - 어웨이큰을 포함한 -는 제네바 협약에서 말하는 “군인”이 아니다. 군인처럼 행동하고 비슷한 일을 하지만 민간인, 혹은 트특수한 지위의 민간인 정도로 취급된다.

나 같은 구시대의 헌터야 일반 병사와 다를 바 없지만 어웨이큰은 핵에 이어 이 시대 전쟁의 양상을 바꿀 수도 있는 섬뜩한 속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웨이큰의 군사적 이용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알려진 게 별로 없는 만큼 그 가능성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

혹 그들이 몬스터 대신 인간에게 총부리를 돌린다면 그들의 위험성은 몬스터 그 이상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당장 레벨 5 미만, 대 몬스터 전투에서 쓸 수 없는 폐급 능력자조차 가장 까다로운 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소리니까.

일전에 내가 이상훈의 빈소에 갈 때 나를 찾아낸 새파란 후배를 떠올려보자.

날 찾아 낸 그 여자가 말했다.

날 “발견”한 게 아닌 “감지”했다고.

그 감지능력은 대몬스터 상대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몬스터가 인간처럼 은폐나 엄폐, 매복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몬스터 상대로는 폐급 능력 취급을 받지만 인간을 상대로 싸울 때는 전혀 다르다.

어디에 숨어 있건 어떻게 매복하건 그 어웨이큰의 감지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발각된다는 소리다.

감지 능력 하나만을 지닌 폐급 어웨이큰의 전투력이야 별 볼 일 없지만 그 어웨이큰이 잘 훈련된 군인과 함께 행동한다면?

지금까지 상대해보지 못한 종류의 위험을 마주칠 수 있다는 소리다.

“어떻게 발견했지? 직접 본 거야?”

사실이 아니길 바라며 디펜더에게 물었다.

“우리 집에 잊은 게 있어서 들리는 길에 광신도 한 무리가 군단파 주둔지로 걸어가는 걸 봤어. 병사들이 제지를 안 하더라고.”

“정말이냐?”

“멀리서 봤지만, 진짜야.”

“그거 보통 일이 아닌데.”

“안 그래도 한 번 더 다녀오려고.”

“위험하지 않을까?”

“솔직히 이 동네 조용해서 좋긴 한데 아무도 안 오다 보니 오히려 심심하거든. 해서 한 번 더 다녀오려고.”

“······몸조심해라.”

그게 지금 내가 디펜더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이다.

당장 나는 다리에 상처를 입었고 적극적인 정찰 활동은 나보다는 디펜더 쪽이 적합한 것으로 보이니까.

“아, 그 전에 동생이랑 너희 방공호 들릴 건데.”

“뭐, 뭐라고?!”

“비트박스 영상 찍어야지. 스켈톤!”

*

친구를 초대한 건 초등학생 이래의 일이었을 거다.

내 사랑하는 누나가,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누나가 핀잔을 주던 장면이 떠오른다.

“야. 박규! 친구가 온다는데 방도 안 치우고 뭐해? 돼지우리가 따로 없잖아!”

내 누나는 잔소리쟁이였다.

잔소리쟁이였지만 철없는 동생을 많이 챙겨줬었다.

그녀가 나를 도와 내 방을 치워주던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무렇게나 너부러진 쓰레기를 주워 쓰레기통에 넣고 어질러진 책상 위의 책을 정리하고 갖고 놀다 질려 선반에 누워진 채로 먼지가 쌓이던 프라모델의 먼지를 닦고 세워주던 모습을.

이제 누나는 더 이상 내 옆에 없다.

홀로 어둠에 반쯤 잠긴 내 방공호를 치우면서 잠시 돌아올 수 없던 밝은 날들을 생각해보았다.

내 가슴에 증오라는 불길이 타오르기 전의 평화롭고 소소했던 나날들을 말이다.

“······.”

여전히 가슴 속의 불꽃은 유효하다.

불가피한 사정이 나를 이곳에 유배했다.

가장 큰 원인은 나의 무력함일 것이다.

“빌어먹을! 몸이 안 움직여!”

떠올리는 것만으로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기억.

“여, 염력이야! 저 놈! 염력을 쓴다고!”

균열 안에서 마주친 그 놈은 내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놈이었다.

내가 이름 붙이고 내가 사냥하러 했던 그 녀석.

장군 타입.

무수한 몬스터를 도륙하던 내 도끼는 그 놈 앞에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무한에 가까운 무형의 힘이 내 피와 힘줄로 이루어진 내 알량한 힘을 바위처럼 짓눌렀으니까.

놈을 죽여 내 가치를 입증받고자 했지만 놈은 오히려 내가 가진 실낱같은 가능성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커억!”

“대장!!!”

그날 이후 프로페서는 죽었다.

나 박규는 기어코 살아남았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결국 전장을 떠나 이 어두운 곳에 처박혔으니.

그걸로 내 인생은 강바닥에 쌓이는 모래처럼 서서히 침전되어 영원히 가라앉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세상은 넓었다.

내 좁은 시야만으로 볼 수 없었던 내가 모르는 영역이 얼마든지 있었다.

“와. 넓다. 진짜 넓네. 그런데 뭐야?! 변기가 왜 가운데에 있어? 그것도 한 층계 높은 곳에 단상까지 쌓아서 올려놓고.”

“나, 이거 알아. 그 뭐야? 뒤쌍? 변기를 미술관에 전시한 거 있잖아?”

“스서방 미술가였어?!”

친구가 생겼다.

초등학생 이래로.

누나가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아마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까.

여자, 그것도 꽤 예쁘장한 녀석이 함께 들어온 걸 보면 말이다.

“······스켈톤 프라우드 슈프림 캐슬에 온 걸 환영한다.”

*

내 방공호를 배경으로 다정이가 비트박스를 시전했다.

솔직하게 그녀의 비트박스는 도저히 못 봐줄 정도였다.

“북치기박치기 치키치키 박치기!”

“······.”

하지만 그녀의 인터넷 짬밥은 보통이 아니었다.

“이걸 디지털 풍화시킬 거야. 그렇게 해서 혼란을 주는 거지!”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자신의 영상에 세월을 입히고 노이즈라는 추임새를 넣었고 거기에 촬영 날짜라는 메타 데이터까지 전쟁 이전의 시점으로 바꿔놓았다.

“그래도 여전히 사칭 소리는 듣겠지만, 뭐. 그건 스켈톤이 감당해야 할 문제겠지?”

“걱정하지 마라. 더 떨어질 곳도 없으니.”

“혹시 알아?”

다정이가 눈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태블릿으로 남은 메시지를 전했다.

[ 우리 스켈톤, 네임드가 될지~ ♥ ]

“그래. 해보자!”

그렇게 해서 스켈톤의 새로운 야심작이 비바! 아포칼립스! 게시판에 등록됐다.

SKELTON : (스켈톤 영상) 스켈톤의 비트박스 (4)

디펜더 남매가 옆에서 내 식량을 축내며 비바! 아포칼립스!의 반응을 함께 지켜보았다.

처음엔 별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unicorn18 : ?

한 녀석이 미끼를 물었다.

디펜더 동생이 내 과자를 흘리며 즐겁게 웃었다.

“야. 유니콘이다. 유니콘! 이 오타쿠!”

그 유니콘이 곧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unicorn18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스켈톤 눈나? 눈나··· 여자였어요······???

“와. DM 보내는 것좀 봐. 이 오타쿠 음습하긴!”

다정이가 웃으면서도 은근히 걱정하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마 날 걱정하는 모양이지.

하지만 그녀의 걱정이 놀라움, 심지어 약간의 경멸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타닥타닥

“스, 스켈톤?”

SKELTON : 상상에 맡길게요~♥

“와···.”

“여자 흉내 싫은 거 아니었어······?”

둘이서 하나인 디펜더 남매가 동시에 날 바라보았다.

“······.”

전략적 모호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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