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르는 거니
“우린 먼저 성에 가서 허락을 맡겠네.”
상 안으로 들어오자 란돌프가 입을 열었다.
란돌프가 말하는 성은 영주가 머무는 내성을 뜻했다.
강현이 영주와 친분이 있다고 해도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강현 역시 직책이 있긴 하지만, 허울뿐인 직책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내성에서 근무하는 이들 역시 성에 들어갈 때는 검문을 받는다.
이미 몇 번이나 경험했기 때문에 이제는 익숙했다.
“예, 다녀오세요.”
그렇게 일행들을 먼저 보낸 강현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비가 오고 있음에도 성안은 시끌벅적했다.
강현이나 토마스처럼 우의를 입고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우산처럼 생긴 물건을 들고 있는 이들도 보였다.
‘어느 세상이든 비슷하구나.’
그리고 비를 맞으면서 다니는 이들도 생각보다 많았다.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 역시 고인 물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비 역시 이들에겐 일상처럼 느껴졌다.
평화로운 광경.
그렇게 마을을 구경하고 있자, 란돌프가 다시 나오는 게 보였다.
인상을 쓰고 있는 란돌프를 보며 강현은 일이 잘 안 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성으로 오던 마차가 습격당했네. 도적들의 짓이지. 이 시기만 되면 나타나니.”
란돌프가 짧게 혀를 찼다.
비 오는 것과 도적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 강현도 기사들이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알게 되었다.
고작 도적들에게 곤란해할 줄은 몰랐다.
강현이 의아해하자 란돌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비가 오면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추적이 쉽지 않아.”
“아.”
“자네도 조심…. 그럴 필요는 없나.”
이야기하던 란돌프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 실력이라면 도적 따위에게 당할 일은 없겠지. 그리고 설기도 있고.”
“컹! 컹!”
설기가 호응하듯 씩씩하게 짖었다.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턱을 세웠다.
강현은 그런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허전함을 느꼈다.
젖은 탓에 예전의 보송보송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강현이 손길이 멈추자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
강현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 다시 손을 움직였다.
‘…뭔가 아쉽네.’
꼬리와 엉덩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젖어서 축 늘어진 엉덩이를 보고 있자니 손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의는 하게.”
란돌프의 말에 강현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강현이 바라보자 란돌프가 말을 이었다.
“영주님이 자네를 못 봐서 많이 아쉬워했어. 잘 다녀오고, 오는 길에는 들려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전해 달라더군.”
란돌프의 말에 강현이 미소 지었다.
자신을 친우로 생각하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예. 저도 아쉽다고 전해주세요.”
“그러지.”
고개를 끄덕인 란돌프가 강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난 다시 성으로 돌아가 보겠네. 다녀와서 보지.”
“예.”
그렇게 란돌프를 떠나보낸 강현은 설기와 토리, 루리를 번갈아보았다.
이제 정말로 자신들만 남게 된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강현은 방금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도적이라니.
정말로 이세계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살짝 걱정이 올라왔지만 설기를 보고는 미소 지었다.
그렇다. 설기가 있는데 뭐가 무섭겠는가.
‘그래, 도적보단 설기가 말썽 피우는 게 더 문제지.’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도적만이 아니었다.
강현은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쏟아지는 빗줄기.
당분간 태양을 보기 힘들 것 같았다.
“먹을 걸 사야겠네.”
강현의 말에 설기가 돌아봤다.
눈을 껌뻑이는 설기.
강현은 그런 설기를 향해 쓴웃음을 흘렸다.
“이런 날씨라면 밖에서 요리할 수가 없잖아.”
“…!”
미처 예상하지 못한 걸까.
설기의 눈이 커졌다.
“끼잉, 끼잉.”
앞발을 휘적거리는 설기.
알아들을 순 없지만, 강현의 뜻에 반대하는 게 분명했다.
강현은 그런 설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어.”
불을 피우는 것조차 힘들었다.
강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단호한 강현의 말에 설기의 귀와 꼬리가 축 처졌다.
그때, 토리가 강현의 우의를 잡아당겼다.
쿡, 쿡.
“응?”
고개를 숙이자 이동장을 가리키는 토리.
루리와 놀고 싶은 게 아니었다.
루리는 마을 구경을 하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들어가고 싶다고?”
끄덕끄덕.
계속 쏟아지는 비 때문에 상태가 안 좋은 토리였다.
강현은 의아해하면서 토리를 이동장 안에 넣었다.
그러자 토리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루리의 옆에 누웠다.
“…안이 따뜻한가 보네.”
생각지도 못한 기능이었다.
정말로 쓸모가 많았다.
‘에밀리야 씨에게 선물이라도 해야겠어.’
강현은 이동장을 어깨에 걸쳤다.
이동장이 조금 흔들렸지만, 루리와 토리는 잠이 들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럼 장을 보자.”
강현은 시무룩해진 설기를 보며 말했다.
대꾸조차 하지 않는 설기.
비에 젖어서 털까지 축 처져서 더욱 안쓰러워 보였다.
강현은 그런 설기를 데리고 시장으로 향했다.
* * *
시장에서 먹을 것을 골랐다.
먹을 것을 고르는 건 쉽지 않았다. 비 때문에 습기까지 높았다.
쉽게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보관이 쉬운 육포와 말린 과일, 견과류를 챙기고 있자 설기의 얼굴이 더욱 울상이 되었다.
불쌍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시무룩한 표정으로 강현의 뒤를 따르던 설기의 귀가 쫑긋 올라왔다.
“컹! 컹!”
갑자기 짖는 설기.
강현이 고개를 돌리자 마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가 왜?”
강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설기의 움직임이 더 격렬해졌다.
“그르르, 컹! 컹!”
점프를 뛰는 것으로 모자라서 제 자리에서 빙그르르 도는 설기.
의아해하던 강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마슈랑 아나네 마차를 말하는 거야?”
여행 도중 만났던 남매.
얼마 전에는 운동회에도 왔었다.
그들은 마차에서 요리했었다.
“컹! 컹!”
맞는다는 듯이 짖는 설기.
동시에 꼬리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덕분에 물이 이리저리 튀었다.
그런 설기를 보며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확실히 마차가 있으면 편하긴 해.’
마슈와 아나의 마차는 따로 개조한 것이었지만, 그렇게까지 전문적이지는 않아도 간단한 요리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말이 없잖아.”
“…!”
신나 하던 설기가 굳었다.
말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른 동물들은 설기와 함께 다닐 수 없었다. 당연히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내려가는 꼬리와 귀.
“됐지? 그만….”
그러나 강현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설기가 시장을 뛰쳐나갔기 때문이었다.
마차를 탈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실망 때문인가?
순식간에 사라진 설기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강현은 뒤늦게 설기가 사라진 방향으로 뛰어갔다.
* * *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외성 밖으로 나온 강현을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성 밖까지 나갔을 줄은 몰랐다.
강현이 두리번거리고 있자 멀리서 설기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강현.
하지만 곧 안도는 경악으로 바뀌었다.
“…너.”
설기는 혼자가 아니었다.
늠름한 늑대 세 마리가 설기를 뒤따르고 있었다.
힐끗힐끗 설기의 눈치를 보는 늑대들.
상황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쟤들보고 마차를 끌게 하겠다고?”
“컹!”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설기.
그 모습을 본 강현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같은 종인 늑대라면 설기를 두려워할지언정 도망치지는 않는다.
‘말도 잘 들으니.’
강현은 다시 늑대들을 보았다.
갈색 늑대들.
강현의 가슴까지 오는 거대한 늑대들이었다.
무시무시한 존재들.
하지만 지금은 강아지처럼 혀를 내밀고 설기를 향해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게다가.
‘…역시 숲에 있는 늑대들이 특별한 거구나.’
덩치도, 위엄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숲에 있는 늑대들을 떠올리니 지금 서 있는 갈색 늑대들이 귀엽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맹수란 건 변함이 없잖아.’
강현은 설기를 돌아봤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
한숨을 내쉰 강현이 입을 열었다.
“고작 며칠이잖아. 그냥 가면 안 될까?”
“컹!”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설기.
강현이 고민하자 이빨까지 드러냈다.
“그르르.”
그런 설기의 행동에 강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씁. 버르장머리 없게.”
그러한 강현의 표정에 설기가 움찔했지만, 뜻을 굽히진 않았다.
강현은 설기에게 훈계할까 하다가 뒤에 있는 늑대들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기가 이빨을 드러냈을 때부터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결국, 백기를 든 건 강현이었다.
“…알았어. 대신 늑대들은 마을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해.”
“컹! 컹!”
강현의 허락에 방방 뛰는 설기.
강현은 그런 설기가 얄미워서 뺨을 잡아당겼다.
“끼잉, 끼잉.”
앓는 소리를 내는 설기.
하지만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피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강현은 설기와 함께 성으로 돌아왔다.
* * *
여러 마차를 살핀 강현은 턱을 긁적였다.
강현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자거나 요리는 가능하겠는데.’
역시나 마슈와 아나의 마차가 특별했던 걸까.
나무로 된 마차들은 너무나 약해 보였다.
강현은 영화에서 봤던 늑대개들을 떠올렸다.
짐이나 사람을 옮기던 늑대개.
녀석들의 움직임은 말과 달랐다.
하물며 이 마차를 끄는 건 늑대개가 아니라 진짜 늑대였다.
강현이 고민하고 있자, 마차 상인이 다가왔다.
“사는 게 부담스러우면 대여도 가능합니다.”
강현이 고민하는 이유가 가격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고개를 저으려던 강현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창고 구석에 놓인 물건.
“저건?”
“아, 저건 못 쓰는 녀석입니다. 전쟁에서 쓰던 물건이에요. 너무 무거워서 일반 말들로는 끌지 못합니다. 일반 철이 아니라서 녹이지도 못하고. 그저 애물단지죠.”
강현은 창고로 가서 마차를 두드렸다.
탕, 탕.
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겉에 쇠를 두른 마차.
마치 갑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다른 마차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크기.
“얘는 움직여요?”
강현은 녹이 슨 바퀴를 보며 말했다.
“녹만 슬었지, 안은 멀쩡합니다. 하지만 요정마의 혈통이 아니면 움직이지도 못할….”
상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설기가 마차를 끌고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 대체.”
눈을 껌뻑이는 상인.
뛰어난 종마 세 마리로도 끌지 못했던 마차를 새끼 늑대가 끌고 온 것이었다.
마차에 쌓인 먼지가 빗물에 씻겨 나갔다.
그 웅장한 모습에 강현이 짧게 감탄했다.
‘이거라면 화로도 설치할 수 있겠는데?’
강현은 푸드트럭을 떠올렸다.
이 정도로 튼튼하면 숲에서도 다닐 수 있을 거다.
안 그래도 설기네 가족에게도 한번 대접하고 싶었던 강현이었다.
‘산은 오르지 못하겠지만.’
산 밑까지는 갈 수 있을 거다.
“이걸로 할게요.”
“저, 정말 괜찮겠습니까?”
놀란 상인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른 마차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강현은 마차를 슬쩍 들어 보았다.
쿵!
역시나 강현의 힘으로는 들어 올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 무게라면 늑대들도 끌기 힘들 거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르는 거니.’
강현은 아래를 내려보았다.
강현에게는 때마침 힘센 일꾼이 있었다.
그렇게 강현과 시선을 마주한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