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모두 저런 건 아니구나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술을 마시던 천막에서 아낙네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요리를 하고 있었다.
빗물 사이로 올라오는 연기와 김.
마치 어제의 일이 꿈 같이 느껴졌다.
‘악몽이지.’
하지만 한쪽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사내들을 보면 꿈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공손하게 모인 손.
“뭐 필요 없어?”
“시킬 게 있으면 말해 줘.”
“에휴, 방해되니깐 저리나 가요!”
천막 주변에 기웃거리던 사내 몇이 잔소리를 듣고는 자리를 피했다.
빗속에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하긴.’
짧아야 2개월, 보통은 3개월 동안 비가 온다고 했다.
그동안 비를 피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이들에게는 비 또한 일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저건….’
강현은 천막 너머에 서 있는 사내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가 사내들 중에 익숙한 얼굴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란돌프 씨?”
“오, 강현. 일어났는가.”
환하게 웃으며 맞이하는 란돌프.
그의 머리가 생쥐처럼 젖어 있었다.
“…괜찮으시죠?”
“괜찮다니? 무슨 일이 있었나?”
“…아뇨.”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더 깊게 묻지 않는 게 란돌프를 위한 것이었다.
강현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강현의 시선을 깨달았는지 란돌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로멘 님은 아침에 먼저 올라갔다네.”
그러한 란돌프의 말에 강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란돌프 씨는 괜찮으세요?”
아까와 다른 물음.
로멘과 마찬가지로 란돌프도 할 일이 있을 거다.
기사단장이란 자리는 그리 한가하지 않았다.
그러자 란돌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미리 허락을 맡았네. 그래도 자네 배웅은 해 줘야지.”
란돌프가 강현을 보며 윙크를 건넸다.
하지만 비에 젖은 상태라 그리 볼품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강현이 어색하게 웃고 있자 제니퍼가 다가왔다.
“강현 씨, 오셔서 좀 드셔요.”
제니퍼를 따라서 이동하니 벌써 음식들이 나오고 있었다.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음식들은 강현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파스타와 피자.
파스타면은 수제비처럼 뭉툭했지만, 분명 파스타였다.
그리고 크림수프까지.
놀란 강현이 제니퍼를 쳐다보자 제니퍼가 싱긋 웃었다.
“강현 씨에게 배운 걸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봤어요.”
옆에 있던 아낙네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의가 과하다고 생각했는데 뒤에는 이런 이유가 있던 것이었다.
“기왕 오셨으니 한번 맛 좀 봐 주세요. 제가 잘못 가르쳤을 수도 있으니.”
제니퍼의 말에 강현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 님 덕분에 그이도 좋아하더라고요.”
나이가 적은 여인 하나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재료 수급이 한정적인 곳에서 할 수 있는 요리는 몇 없었다.
그나마 이제는 수인, 요정과 교류하면서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요리로서 발전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수인과 요정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요리도 어려웠을 거다.
강현이 쓸 수 있는 재료를 파악해서 제니퍼에게 알려 준 것이었다.
‘좋네.’
이렇게 마을이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자 괜히 뿌듯했다.
강현은 파스타 소스를 한 숟가락 떴다.
그리고 한입.
진한 크림의 향이 입안 가득 퍼져갔다.
다들 숨을 죽이고 강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간은 좋네요. 여기서 면을 넣기 전에 소스를 조금 더 끓여서 농도를 높이면 좋을 것 같아요.”
거기까지 말한 강현은 너무 냉정한가 싶어서 한 마디를 보탰다.
“맛있네요.”
“감사해요!”
그러자 여인 하나가 기뻐하는 게 보였다.
그 뒤로도 같은 작업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강현의 시선은 연신 천막 너머를 힐끗거렸다.
천막이 좁아서 모두가 들어올 순 없다지만, 저리 일렬로 서있으면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강현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제니퍼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분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다들 더워서 그러는 거예요.”
“저래야 술 좀 깨지.”
제니퍼의 말에 다른 여인들도 호응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밖에 서 있던 사내들 역시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
그중에는 당연히 란돌프도 있었다.
강현의 걱정과 달리 먹는 내내 밖에다 세워 둔 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롭게 천막 하나가 생겼다.
당연히 밖에 있던 사내들도 아내들과 밥을 먹었다.
강현의 조언대로 새롭게 만든 요리로….
“음….”
처음 만들어 준 요리를 먹고 있던 강현은 그 모습에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곧 화기애애한 사람들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과정은 어쨌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강현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짐작처럼 놓여 있는 토마스.
‘설마 어제부터 있었던 걸까?’
그러나 옷차림이 어제와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누군가가 갈아입힌 것이었다.
갈아입히고 재워서 다시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두리번거리는 토마스.
“오, 일어났는가?”
“아… 예.”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토마스.
그러더니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아니면 자고 있었던 걸까?
그러자 옆에 있는 이가 대신 답했다.
“어제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야. 그러길래 술도 못하는 양반이….”
“…예? 한 잔밖에 안 마셨는데.”
통증이 올라왔는지 인상을 찌푸린 토마스가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아니, 어제 분명….”
“사소한 건 넘어가세.”
“사소하다뇨! 내 어제….”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토마스가 발끈했다.
그러자 마침 휴일이었는지, 어제부터 남아 있던 기사 하나가 입을 열었다.
“…자네, 오늘도 피곤해 보이는구먼.”
“…예? 그게 무슨….”
“나와 산책이라도 하면 기분이 나아질 걸세.”
눈을 껌뻑이는 토마스.
그러나 기사는 싱긋 웃으면서 토마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 성질을 냈냐는 듯이 두 눈동자가 떨려 왔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무언가 느낀 모양이었다.
어색한 웃음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아뇨, 개운합니다. 역시 성보다 공기가 좋네요.”
“그렇지?”
기사가 웃음을 터트리자 따라서 웃는 토마스.
둘이 웃자 주변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참으로 정겨운 광경.
그리고 강현은 그 광경을 애써 모른척했다.
* * *
식사를 마치고 짐을 싸고 있는 강현에게 란돌프가 다가왔다.
“이 녀석이 그 녀석이군.”
이동장에 있는 루리를 본 란돌프가 미소를 지었다.
“아침부터 헤나가 새를 키우고 싶다길래 뭔가 했더니.”
“…죄송해요.”
강현이 사과하자 란돌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지.”
맞는 말이었지만, 강현 때문에 생긴 일이기도 했다.
강현이 쓴웃음을 짓자 란돌프가 턱을 쓸어내렸다.
“안 그래도 자네가 설기랑 지내는 걸 보고 헤나를 위해서 한 마리 키울까 생각 중이었네. 하지만 새는 잘 날아가기도 하니….”
무언가를 떠올린 란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뜀새라면 좋겠군. 뜀새는 날지 못하니 우리에서 지낼 수 있을 거야.”
란돌프의 말에 강현은 뜀새를 떠올렸다.
근육질에 저돌적인 새.
‘음.’
그리고 슬쩍 루리를 바라보았다.
귀엽게 고개를 갸웃하는 루리.
‘헤나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닐 거 같은데.’
근육질의 새를 좋아할 여자아이는 없었다.
오히려 무서워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란돌프는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사냥에 나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강현이 말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찰나, 제니퍼가 다가왔다.
“이거 입고 가세요.”
제니퍼의 손에 들린 건 커다란 가죽이었다.
“테슈의 가죽이에요. 빗물을 막아 줄 거예요.”
제니퍼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일반 가죽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강현이 의아해하자 란돌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가에 사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되네. 헤엄도 잘 치는 녀석이지.”
물가에 사는 말이라니.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담비 같은 건가?’
물에 사는 족제비.
그리 생각하며 겉옷을 받았다. 보기보다 가벼운 무게.
털을 만져 보니 일반 털과 달랐다.
물고기의 비늘을 만지는 느낌.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영주님이 선물해 준 거지.”
강현이 놀라서 쳐다 보가 제니퍼가 란돌프의 팔을 쳤다.
왜 쓸데없는 말을 하냐는 눈빛이었다.
“편하게 입으세요. 저희는 잘 안 입어서. 그리고 강현 씨가 입어 주시면 영주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옆에 있던 란돌프도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모습에 강현도 거절하지 않고 겉옷을 받았다.
겉옷이라기에는 너무 큰 가죽.
중간에 손과 머리 구멍이 보였다.
“배낭까지 같이 두르고 끈으로 묶으면 되네.”
란돌프가 손짓하며 설명했다.
그러나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판초 우위 같네.’
군대에서 입었던 것과 비슷했다.
세월이 지났지만,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강현이 능숙하게 입자 란돌프가 오호, 하고 탄성을 뱉었다.
그러다가 창문 너머를 힐끗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준비가 되었으면 슬슬 가지. 안 그래도 다들 기다리고 있네.”
기다리다니?
강현은 의아해하면서 란돌프를 따라나섰다.
그러자 평상복을 기사 몇과 함께 토마스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뒤로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토마스와 기사들은 성으로 올라가려는 것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강현을 배웅해 주기 위해서 나온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되는데.”
강현이 마을 사람들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성대한 배웅을 받으며 강현과 일행들은 성으로 향했다.
강현은 걸어가는 도중 뒤를 힐끗거렸다.
토마스는 비닐과 비슷한 우의를 두르고 있었지만, 기사들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강현은 옆에 걷고 있는 란돌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렇게 비를 맞으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감기라도 걸리면 문제였다.
이곳이라고 해서 감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러자 란돌프는 무슨 소리냐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두 팔을 들어 올리고 힘을 불끈 쥐었다.
“합!”
격동하는 근육.
그와 함께 새하얀 김이 올라왔다.
강현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눈을 껌뻑였다.
하지만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옆구리나 허벅지.
상대적으로 빗물이 적게 튀는 곳이 마르고 있었다.
“…아.”
이게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그때, 란돌프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깟 비 따위에 감기가 걸린다면, 근육이 부족한 것뿐이야.”
수행이 부족한 것이지.
짧게 말을 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보란 듯이 기사들이 힘을 주고 있었다.
어느 기사는 무리했는지 얼굴이 붉어지기까지 했지만 효과는 비슷했다.
사우나라도 온 듯이 수증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강현은 더 이상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그래, 여기는 이세계잖아.’
마법만이 이능이 아니었다.
저 기사란 존재들도 이능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가.’
옆을 보니 토마스가 겁에 질린 눈으로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만 보고도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뭐지 이 미친놈들은.
‘…모두 저런 건 아니구나.’
강현은 어째서인지 안도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