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집에서도 저러진 않겠지?
다시 카놈크록에 손을 뻗던 소현이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시무룩해졌다.
“소현씨. 왜요?”
작가가 묻자 소현이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에리카 언니. 이거 하기 전에 요리 드라마 주연이었데요.”
에리카?
일행들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일본 여성 출연자의 이름이란 걸 깨달았다.
“그거 때문에 몇 개월 동안 학원도 다녔다고. 그리고 에리카 언니가 말해줬는데, 중국 언니도 요리 전공이었다고.”
그녀의 말에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소현을 보았다.
언제 그렇게 친해져서 이야기를 나눈 걸까.
그러나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 프로그램 역시 게스트들은 요리나 여행에 관심이 있는 이들로 선별했다.
대부분 어느 정도 요리를 할 줄 안다는 뜻이었다.
이번만 예외적일 뿐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과하긴 하지.’
불과 얼마 전에 요리 드라마 주연을 했던 여배우, 그리고 요리 전공의 연예인.
이번 방송을 위해서 공을 들였다는 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저는 겨우 사과만 깎을 줄 알아서.”
내일 시합이 걱정되는 것이었다.
그런 소현의 이야기를 들은 황대길이 웃음을 터트렸다.
“선생님?”
의아하게 바라보는 소현. 그러나 황대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예?”
소현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작가들도 고개를 갸웃했다.
“선생님도 걱정하지 않으셨어요?”
며칠 동안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윤하 피디가 혀를 찼다.
“그건, 강현씨가 오기 전이지.”
김윤하 피디는 강현을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제 말했잖아. 일본인 참가자가 천재라면, 강현씨는 괴물이라고.”
“아….”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강현은 그런 시선에 멋쩍게 웃었다.
“장담하건대….”
뒷맛을 흘리는 황대길. 강현을 바라보던 시선들이 옮겨갔다.
“세상은 넓으니 강현의 또래에 저만한 인재는 있을지 몰라도, 아시아에 둘이나 있을 것 같진 않군.”
황대길의 말에 김윤하 피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이리도 편하게 촬영 중이었다.
황대길은 강현을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적어도 내 연배는 와야 상대가 될 거야.”
사람들이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강현을 돌아보았다.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황대길이 빈말을 건넬 성격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맞아. 음악으로 따지면 강현씨는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라갔던 가수나 다름이 없단 말이지.”
김윤하 피디가 강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런 지방 경연 대회에 나갈 수준이 아니지.”
자랑스럽게 웃는 김윤하 피디.
그리고 다른 이들도 안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중 한 사람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피디님, 그 지방 경연 대회가 저희 방송인데요.”
하지만 모두가 못 들은 척 외면했다.
* * *
일행들이 다른 출연진들의 정보를 얻은 것처럼, 일본과 중국 역시 출연진의 정보를 얻었다.
미리 알고 있던 일본과 달리 중국 출연진의 놀라움은 컸다.
“대상이면 대단한 것 아닙니까?”
일본인 요리사 역시 4위에 입상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걱정스러운 작가의 말에 요리사가 코웃음 쳤다.
“그저 많은 대회 중 하납니다. 해외 대회 상은 저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고작 한국인 따위에게 질 것 같습니까?”
“아, 아뇨.”
작가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슬쩍 피디를 확인했다.
고개를 젓는 피디.
내일 시합이니 더 자극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아까 지고 나서부터 계속 저 상태였다.
피디는 요리사 옆에 앉은 출연진을 보았다.
눈치 없게도 계속 한국인 요리사 이야기만 떠들고 있었다.
‘...아니, 눈치가 있는 건가.’
요리사가 저 출연진에게 호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걸 여기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여성 출연진이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도.
아니나 다를까.
씩씩거리던 요리사가 제 방으로 들어가자 수다스러웠던 여성 출연진의 입도 멈췄다.
“그럼, 저도 들어가 볼게요.”
상쾌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성 출연진.
그를 본 피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럽게 정해진 방송.
시작부터 삐걱대는 게 당연했다.
그러한 피디 뒤로 작가들이 불안한 눈빛은 드러냈다.
내일 이기면 정규 편성이 확정된다.
당분간 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만일 지기라도 한다면….
‘...방송도 날아가고 내 입지도 사라지겠지.’
국장에게 밉보일 텐데 다른 일을 줄 리가 없었다.
국장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이직을 알아보는 게 나았다.
피디가 파리 국제 대회를 모를 리가 없었다.
요리사가 탄 상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요리계 내에서의 위치부터가 달랐다.
물론, 요리사가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외면하는 것이었다.
‘오늘 밤 자기는 글렀군.’
피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수는 썼으니.’
내일 나올 식자재 정보를 미리 알렸기 때문이었다.
피디는 내일 경기가 잘 되기를 기도했다.
* * *
다음 날.
세 나라의 출연진들이 한곳에 모였다.
어제와 달리 조리복을 입고 있었다.
한국 출연진들이 입은 조리복은 하얀 조리복이었다.
가슴에는 태극 마크.
모자와 소매 끝자락에 붉은색과 푸른색의 띠가 둘려 있었다.
강현은 붉은색 스카프를, 소현은 푸른색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
깔끔한 양식 스타일.
일본과 중국은 전통 복장과 섞은 느낌이었다.
“...우리도 한복으로 할 걸 그랬어요.”
작가 한 명이 아쉬움에 중얼거렸다.
김윤하 피디 역시 볼을 긁적였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번 경기가 아니라 프로그램 만들 때, 만들어 놓은 조리복이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이것도 예쁜데요.”
조리복을 입은 소현이 빙그르르 돌았다.
강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가슴 주머니가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빼꼼.
토리가 고개를 내밀어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치 맞춘 듯이 조리복의 색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둘과 달리 황대길은 조리복을 입지 않았다.
원래는 게스트와 같이 요리해야 했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오늘의 주인공은 강현과 소현이었다.
그러자 김윤하 피디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겨주세요. 이기면 그 조리복도 드릴게요.”
“진짜요?”
소현이 눈을 빛냈다.
그렇게 둘은 대회장으로 향했다.
* * *
대회장은 시끌벅적했다.
벌써부터 구경꾼들이 모여있기 때문이었다.
태국민들은 요리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관심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왔군.”
강현을 노려보는 사내.
하카마 형태의 조리복. 전형적인 일식 복장이었다.
“안녕하세요.”
강현이 인사를 건네자 사내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강현은 개의치 않았다.
이제는 이런 사내의 모습에도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 여성 출연진이 강현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전과 달리 살가운 반응.
그러자 중국 요리사가 인상을 구겼다.
다른 이들과 달리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대회가 시작되었다.
“그럼, 요리 경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준비하실 건 단품 요리입니다. 종류는 상관없습니다. 곁들여 먹는 부재료나 소스의 경우 같은 하나의 요리로 인정됩니다. 메인 재료를 제외하면 앞의 재료들을 자유롭게 써주시면 됩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재료를 싣은 테이블을 밀고 들어왔다.
바퀴 달린 테이블.
다양한 재료들에 사람들이 감탄했다.
“심사는 각 대표로 한 사람씩 점수를 매깁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모셔 온 요리사분들께서 해주실 겁니다.”
사회자의 말에 준비된 테이블에 앉아 있던 다섯 명이 손을 흔들었다.
모두 조리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 중국 쪽에서 한 사람씩 테이블로 향했다.
한국은 당연히 황대길이었다.
“그럼 메인 재료를 공개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정장 차림의 여성이 뚜껑이 닫힌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카메라들은 그 모습을 잡았다.
그리고 쟁반을 건네받은 사회자가 쟁반을 들어올렸다.
출연진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뚜껑이 열리긴 했으나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들보다 시력이 좋은 강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곧 무언가 이상한 걸 깨달은 소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셰프님. 저거, 움직이는 것 같은데요?”
살아있는 생물을 요리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때, 중앙에 있는 화면에 쟁반 안의 모습이 비쳤다.
“...!”
“...!”
숨을 삼키는 출연진들.
그러나 구경하던 현지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작은 무언가가 쉴 새 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대회의 메인 재료는 바로, 이 붉은 개미입니다. 시간은 30분. 그럼 마음껏 요리해주십시오!”
사회자의 말이 끝났음에도 출연진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일본 출연진들 역시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붉은 개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강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놀란 표정으로 신음을 뱉는 중국 여성 출연진.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요리사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전에 다뤄본 적이 있는 재료인가?
아니면 미리 알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중요한 건 아니었다.
메인 재료인 붉은 개미가 테이블마다 놓였다.
쉽사리 손을 가져가지 못하는 이들.
“윽, 다른 것도 맛있는 거 많은데. 왜….”
소현이 보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소현의 말대로 태국에는 수없이 많은 식재료가 있었다.
하지만 강현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침 같은 걸 눈치챘는지 일본 쪽 여배우 역시 원망 섞인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강현과 다른 쪽을 보고 있었지만, 의미는 같았다.
바로 일본 제작진들.
아마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삼국의 제작진들은 국경을 뛰어넘어서 한마음으로 웃고 있을 거다.
하지만 곧 먼저 움직이는 중국 요리사를 보고 강현과 일본 쪽도 정신을 차렸다.
“...셰프님. 얘네로 요리해본 적 있어요?”
“아뇨.”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듣기는 했다. 태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에서 자주 쓰이는 재료였다.
그리고 한국 역시 옛날에는 개미로 만든 요리가 있었다고 들었다.
‘약재로도 쓰이고.’
하지만 강현의 이야기를 들은 소현은 울상을 지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먹어봐야죠.”
“예?”
“요리하려면 일단 재료의 맛을 알아야 하니깐요.”
담담하게 말하는 강현을 보며 소현의 얼굴에 절망이 떠올랐다.
자신의 미래를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소현씨는 먹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에요. 조수인 제가 먹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말과 달리 표정은 다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강현은 소현과 달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미 먹고 있는 이를 봤기 때문이었다.
언제 내려갔는지, 토리가 발톱으로 개미 하나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부르르.
몸을 떠는 토리.
‘시나 보네.’
반응을 알 수 있었다.
어릴 때, 먹었던 불량식품을 떠올렸다.
한 마리로 그치지 않고 다른 개미를 집었다.
어째서인지 익숙해 보이는 모습.
‘...설마, 집에서도 저러진 않겠지?’
땅속에 다니면서 개미를 먹는 건가.
설기도 벌레를 주워 먹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한숨을 내쉰 강현이 상자로 다가갔다.
상자에는 무슨 처리가 되어있는지, 개미들이 위로 올라가지 않고 있었다.
강현은 망설임 없이 벽에 있는 개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