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알 것 같은데
중국인들이 쑥덕쑥덕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일본 차례가 되었다.
동요하긴 했지만, 비교적 차분하게 다트를 던지는 사내.
세 개 정도가 분홍 풍선에 맞았고, 나머지는 파란 풍선을 터트렸다.
준수한 성적이었지만, 강현의 묘기를 본 뒤라 반응이 없었다.
이제 다시 한국의 차례였다.
소현이 준비를 하는 사이에 중국 제작진이 다가왔다.
“잠시 경기를 멈추겠습니다.”
김윤하 피디는 촬영을 중지시키고 중국과 일본 제작진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잠시 후 김윤하 피디가 씩씩거리며 돌아왔다.
“무슨 일이에요?”
작가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김윤하 피디가 신경질적으로 큐시트를 던졌다.
“이번 경기를 무효로 하겠데.”
“예?”
듣는 이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언가 속임수를 쓴 것 같다고 인정 못 하겠대.”
김윤하 피디의 말에 일행들이 쓴웃음을 흘렸다. 강현의 묘기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윤하 피디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중국인인 자신들이 일본이나 한국에게 질 리가 없다나 뭐라나.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작게 욕설을 내뱉는 김윤하 피디.
출연진 앞에서는 언제나 차분했던 그였기에 그의 기분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김윤하 피디의 이야기를 들은 다른 이들 역시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야기를 듣던 황대길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강현이 나섰다.
“괜찮습니다. 다시 던질게요.”
다시 보여 주면 되었다.
하지만 김윤하 피디가 고개를 저었다.
“이 경기는 못 믿겠다고 자기네들이 다른 걸 준비하겠대.”
“무슨….”
소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내뱉었다.
“자기들도 다시 해 봤자 결과는 같다는 걸 아는 거지.”
“…일본은 별말 없었나?”
황대길의 물음에 김윤하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에게 나쁜 상황은 아니라서 묵인하고 있습니다.”
김윤하 피디의 말에 일행들의 시선이 일본 제작진들에게 향했다.
모두가 그 상황을 반기는 건 아니었다. 일본 사내가 제작진들에게 따지는 모습이 보였다.
옆에 있든 여성 출연진 역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상황이 달라질 리가 없었다.
단호한 제작진의 반응에 사내가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여성 출연진 역시 미안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나마 저쪽은 양심이 있네요.”
이쪽을 보며 비웃고 있는 중국 출연진들보다 나았다.
“그래도 제작진은 한 편이지.”
김윤하 피디가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주변 상황을 보던 강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어요.”
“음?”
사람들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강현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저쪽이 원한대로 해 주죠.”
강현은 방금 다트 던지기를 떠올렸다.
아직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이들이 워낙 괴물 같은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저도 제대로 해 볼게요.”
승부욕이 없었다면 이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강현은 아주 오랜만에 지기 싫다는 마음이 떠올랐다.
그런 강현을 보며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얼마 뒤.
다음 경기가 정해졌다.
첫 경기가 무효가 되었으니 사실상 첫 경기였다.
죽마 올라타기.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제작진도 어이없다는 눈빛을 던졌다.
대나무로 만든 가는 다리 위에 올라가서 걷는 것이었다.
중국의 민속놀이 중 하나.
하지만 중국 제작진은 뻔뻔하게도 태국 놀이 중에 골랐을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죽마놀이. 태국에서도 마이롱깽이라고 불리는 민속놀이이기도 했다.
“우와, 해도 해도 너무하네요.”
소현이 중국 제작진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강현도, 소현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강현 씨, 소현 씨 괜찮겠어? 아니면 내가 따져 볼게.”
김윤하 피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 상관없습니다.”
담담히 내뱉은 강현이 소현을 돌아봤다. 그러자 소현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이글이글 타오르는 소현의 눈빛.
그런 둘을 보자 김윤하 피디도 안심할 수 있었다.
“좋아. 원래라면 승부 상관없이 재밌는 그림을 만들어 달라고 하겠지만….”
주변을 천천히 돌아본 김윤하 피디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엔 이깁시다.”
그러한 김윤하 피디의 말에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여성 출연진들이 먼저였다.
경기 내용은 간단했다. 목표 지점을 찍고 돌아오면 되었다.
“시작.”
호령과 함께 한중일 여성 출연자들이 일제히 발을 내디뎠다.
비틀비틀.
하지만 쉽지 않았다.
“꺅.”
“엄마!”
몇 번이나 대나무 다리에서 떨어지고 다시 올라갔다.
만일 대나무 다리가 좀 더 길었다면 부상을 입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성 출연진들이 오른 대나무 다리는 30센티 정도의 길이었다.
처음 타는 소현과 일본 출연진과 다르게 경험이 있는 중국 출연진이 앞으로 나갔다.
그녀 역시 잘 탄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경험이 없는 둘보다는 나았다.
소현과 일본 출연진도 금세 요령을 익혔지만, 이미 벌어진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곧 전환점을 돌아온 중국 출연진이 교대했다.
여성 출연진들이 탔던 대나무 다리보다 긴 다리.
무려 두 배 이상 차이가 났다.
하지만 남성 출연진은 익숙하게 앞으로 나갔다.
힐끗 뒤를 돌아서 강현과 일본인 사내를 비웃었다.
‘…이 게임을 하자고 한 이유가 있었네.’
남성과 여성. 대나무 다리 길이가 차이 나는 건 여성을 배려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남성 쪽이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일본 쪽도 알아챘다.
옆에서 일본 욕설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사내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강현과 눈이 마주치자 머뭇거리는 사내.
“…아까는 미안했다.”
밖으로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강현이 놀란 눈으로 사내를 보았다.
사과를 해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상관없었다. 사내가 지시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바뀌는 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강현의 말을 다른 뜻으로 이해했는지, 사내는 묘한 눈으로 강현을 돌아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여성 출연진들이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셰, 셰프님, 죄송해요.”
대나무 다리에서 내린 소현이 울상을 지었다.
이미 상대는 전환점 근처까지 가 있었다.
따라잡기에는 늦은 상황.
그러나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충분해요.”
강현이 대나무 다리에 올랐다.
일본 사내 역시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는지 대나무 다리에 올랐다.
사내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역시나 중심 잡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착실히 앞으로 나아갔다.
겨우 균형을 잡은 사내는 뒤늦게 넋을 잃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하나같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무슨….’
벌써 전환점을 돌기라도 한 걸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사내의 표정 역시 다른 이들과 같아졌다.
딱딱딱딱딱!
저걸 무엇이라 표현할까.
마치 백로가 걸음을 옮기듯 우아한 몸짓.
다른 이들과 달리 흔들림조차 없었다. 평지를 걷듯이.
하지만 그 속도가 이상하리만큼 빨랐다.
“…!”
중국 출연진이 행동이 다급해졌다. 누가 봐도 기겁한 모습.
그러나 저 모습으로 뒤에서 뛰어온다면 누구나 같은 행동을 할 거다.
그리고 강현은 중국 출연진을 지나쳤다.
그러자 놀라서 엎어지는 중국 출연진.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멀어지는 강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사내가 발을 내디뎠다.
* * *
결과는 한국, 일본, 중국 순이었다.
넋을 잃고 강현을 지켜보던 중국 출연진은 사내가 지나간 후에나 다시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그렇게 경기가 끝나자마자 중국 제작진들이 다시 한번 분주해졌다.
그리고 김윤하 피디는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다음 경기는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그쪽이 정해도 상관없습니다. 이번에도.”
이번에도란 말을 강조했다.
그러자 중국 제작진들의 얼굴에 불편함이 떠올랐다.
원래라면 한중일이 순서대로 게임을 준비하기로 했지만, 김윤하 피디는 한국의 게임 선택권을 넘겼다.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이번 경기도 다시 할까요?”
이어지는 김윤하 피디의 말에 중국 제작진들이 다시 한번 얼굴을 구겼다.
이번 경기는 자신들이 준비한 것이었다.
조작했다고 우길 순 없었다.
“…결과를 인정합니다. 다음 경기는 한국에 맡기겠습니다.”
중국인 피디의 말을 통역사가 전했다.
고개를 끄덕인 김윤하 피디가 몸을 돌렸다.
이제 저들도 딴지를 걸기 어려웠다.
돌아오는 김윤하 피디의 눈에 강현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
‘…정말로 강현 씨는 하늘이 내게 내려 준 선물이야.’
잠깐이나마 원망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이제 판은 제대로 깔렸다.
여기서 그림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피디란 직함을 떼야 했다.
그리고 강현은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오는 김윤하 피디를 보고 몸을 떨었다.
곰처럼 생긴 사내가 얼굴까지 붉히는 모습은 그렇게 유쾌하진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음 경기들이 진행되었다.
외나무다리 건너기부터 눈감고 줄에 달린 과자 먹기.
다양한 게임이 진행되었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환호성이 커졌다.
“꺄아악!”
“멋져요. 강현 오빠!”
“…강현 씨보다 네가 나이가 많지 않아?”
“피디님, 무슨 소리예요. 멋지고 잘생기면 오빠지.”
“맞아요.”
작가들의 말에 김윤하 피디는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 이 현상은 한국 제작진만 그런 게 아니었다.
“강현 상! 좋아해요!”
어눌한 한국어.
일본 제작진들 사이에서도 강현을 응원하고 있었다.
남자 제작진들의 표정이 싸늘해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김윤하 피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그렇게 모든 경기가 끝난 일행들은 짜뚜짝 시장으로 향했다.
주말만 열리는 시장.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붐볐다.
“자, 마음껏 드세요! 오늘은 제한이 없습니다!”
“와아아!”
김윤하 피디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소현이 두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전 경기 완승.
이런 날에 돈을 풀지 않고 언제 풀겠는가.
강현과 황대길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여러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전날 갔었던 랏차다 야시장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여기는 진짜 태국 같네요.”
코코넛으로 만든 빵.
카놈크록을 오물거리며 소현이 말했다.
확실히 랏차다 야시장보다 현지인이 많은 느낌이었다.
랏차다 야시장도 태국이긴 했지만, 관광지란 느낌이 강했다.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일행들.
자연스레 아까 있었던 경기로 화제가 돌아갔다.
“근데 결과적으로 중국은 일본 쪽에도 진 거 아니에요?”
소현의 말에 일행들이 쓴웃음을 흘렸다.
마지막에 일행들을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떠나간 출연진을 말했다.
통역가의 말에 따르면 내일 각오하라고 했다는데, 그리 짧게 말하진 않았다.
아마도 좋은 소리는 아니었을 거다.
일본에게도 졌으면서 왜 우리에게만 성질이냐는 뜻이었지만, 일행들이라고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난 조금 알 것 같은데.’
김윤하 피디의 시선이 강현을 향했다가 떨어졌다.
강현을 바라보는 중국 쪽 여성 출연자의 시선이 바뀌었던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니, 출연자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