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하여튼 요즘 것들은
음식을 먹어 본 요정들의 눈이 커졌다.
곧 주변에 권유하는 요정들.
다른 요정들도 관심 없어 하더니 하나둘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다른 요정들과 다르지 않았다. 놀란 눈으로 음식을 바라보더니 곧 강현을 보았다.
무언가 속닥거렸지만,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요정 중에는 아우라도 있었다.
강현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입을 닦아 내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담담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강현은 그녀의 뺨에 묻은 케첩을 볼 수 있었다.
‘그냥 솔직하게 먹으면 되는데.’
하지만 저 나이 또래의 소녀들이라면 가질 법한 감성이었다.
‘…아니, 잠깐만.’
거기까지 생각한 강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럼 사춘기도 몇십 년 동안 이어지는 건가?’
에밀리야의 말대로라면 요정의 정신은 육체를 따라간다고 했다.
물론 인간보다 많은 삶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정보를 얻는 만큼 조금은 성숙하긴 하지만, 크게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그리 생각하니 쉽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
요정들의 육아 난이도는 인간을 아득하니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들 차분한 건가.
‘나중에 물어봐야겠네.’
강현은 아우라에게서 시선을 뗐다.
일을 하던 이들 몇이 다가오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꼬치를 그릴 위에 올렸다.
* * *
요리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준비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준비가 끝나자 인간과 요정, 수인들은 공터 아래에 모였다.
그들을 따라 이동한 강현은 무언가 이상한 걸 깨달았다.
사람들이 자신들 사이에 껴 있는 강현을 힐끗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대놓고 바라보고 있는 이도 있었다.
‘뭐지?’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왜 거깄어? 어서 이리 와.”
“예?”
카샨이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강현을 보더니 실소를 흘렸다.
카샨이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서 터벅터벅 다가왔다. 그리고는 강현의 끌고 앞으로 나왔다.
“네 자리는 여기잖아.”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자리.
거기에도 한 무리가 모여 있었다.
카샨과 노아, 그리고 요정족의 두 장로와 에밀리야.
마지막 란돌프와 로멘, 바하람 주교까지.
단순한 참가자들이 아니라 운영진.
흔히 본부석이라 부르는 자리였다.
자리에 서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어색함에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그런 강현을 보며 카샨이 입을 열었다.
“모처럼이니 한마디 해. 그래도 행사의 주최자잖아.”
“…제가요?”
강현이 기겁하자 카샨이 어이없는 눈빛을 보냈다.
“네가 하지 그럼 누가 해.”
시선을 돌리자 에밀리야와 란돌프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다른 이들도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한 사람을 빼고는.
“부담스럽다면 신의 사자인 내가….”
바하람 주교가 입을 열었다가 로멘의 차가운 눈빛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때, 작은 그림자 둘이 다가왔다.
모나와 설기였다. 같이 놀던 헤나는 어느새 제니퍼 곁에 서 있었다.
오자마자 손을 뻗는 모나.
강현은 모나의 손을 잡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앞을 봤다.
다양한 종족들이 강현을 보고 있었다.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침착하게 앞으로 나섰다.
“음…. 먼저 이런 자리를 열 수 있어서 기쁘네요. 이 자리는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경쟁이라기보다 친목과 화목을 위한 자리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
그러나 행동과 달리 그들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이고 있었다.
오히려 강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투지를 더 끌어 올리고 있었다.
‘…말해도 소용없겠네.’
강현이 쓴웃음을 흘렸다.
지금 운동장에는 로멘의 마법이 걸려 있었다.
로멘이 며칠 동안 고생해서 설치한 마법.
바로 통역 마법이었다.
‘몇몇 이들은 필요 없는 것 같지만.’
바로 에밀리야와 로멘, 란돌프, 노아였다.
어찌 된 일인지 통역 마법 없이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만 역시 조금씩이지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에밀리야 씨는 원래 알고 있었다지만.’
로멘도 마법사인 만큼,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데 어렵지 않을 거다.
하지만 란돌프와 노아는 좀 놀라웠다.
‘노아 씨는 아닌가?’
강현과 있을 때도 짧은 단어만으로 대화하는 노아였다.
다른 언어라고 해도 많은 단어를 쓰지 않을 거다.
강현은 상념을 지우고 말을 이었다.
“이 자리가 부디 모두에게 즐거운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해서 앞으로도 종종 이런 기회가 생기길 바랍니다.”
강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수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요정의 장로와 로멘의 시선이 한쪽에 향했다.
카샨이었다.
이 자리에서 직책이 가장 높은 이는 카샨이었다.
카샨과 같은 위치에 서려면 영주나 대장로가 직접 와야 했다.
미리 이야기가 끝났는지 둘은 담담히 카샨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샨은 둘의 시선에 머리를 긁적이더니 앞으로 나섰다.
“규정은 알고 있지? 공평성을 위해 한 사람이 두 경기 이상 나가서는 안 돼. 서로를 공격해도 안 되고.”
카샨의 말에 사람들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럼….”
카샨이 슬쩍 요정의 장로와 로멘을 보았다. 둘은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이 없단 소리였다. 옆에 있던 바하람은 기대하는 눈치였으나 카샨은 시선조차 던지지 않았다.
곧 카샨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즐겨 보자고.”
* * *
첫 경기는 돌멩이 옮기기였다.
공터 끝에 놓인 돌멩이를 들고 선까지 먼저 옮긴 이가 이기는 경기.
“전사들은 앞으로!”
란돌프가 호명하자 각 종족에서 한 명씩 나왔다.
선수가 아닌 전사.
그 호칭에 강현은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의외란 듯이 란돌프를 보았다.
‘첫 경기부터 나올 줄 알았는데.’
노아와 에밀리야도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위는 제각각 다른 모양이었다.
각자 확인해보고 공평하다고는 했지만,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바위를 선택하는 건 요정족.
이어서 인간과 수인 순으로 바위를 골랐다.
아무래도 힘에서는 요정이 밀리다 보니 우선권을 준 것이었다.
‘나름 공평한 건가?’
강현도 거기까지는 관여하지 않았다.
셋이 만나서 따로 정한 게 분명했다.
그렇게 바위 앞에 선 이들을 보던 강현이 시선을 돌렸다.
둥글게 떨어져 있는 관중들.
‘…안 온 건가?’
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강현이 실망하던 찰나, 옆에 있던 설기가 벌떡 일어났다.
“컹!”
작게 짖는 설기.
강현이 설기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수풀이 흔들리면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앤.
강현과 눈이 마주친 앤은 심드렁한 눈빛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반가움에 미소 짓던 강현의 눈이 커졌다.
앤 뒤에 다른 이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스테판 남매.
대상인을 꿈꾸는 소녀와 호위인 오빠였다. 여행 도중 만났던 인연.
둘은 강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떻게….”
셋이 같이 온 거지?
하지만 강현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란돌프가 호각을 불었기 때문이었다. 앤과 스테판 남매는 경기에 방해가 되지 않게 멈춰 섰다.
그리고 전사들이 바위를 들어 올렸다.
“로위! 기사의 긍지를 보여라!”
“템, 지면 저녁은 없어!”
사방에서 응원이 들려왔다.
한 발, 한 발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이들.
강현은 질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게 진짜로 들리는구나.’
수련 덕분에 힘이 강해진 강현이었지만, 도저히 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선두로 치고 나가는 이는 수인족의 전사였다.
그리고 인간족 기사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둘 다 강현과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덕분에 누구 한 사람을 응원하기는 어려웠다.
요정의 응원은 인간과 수인과 비교해서 힘이 없었다.
강현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예상했구나.’
요정족의 전사들은 차분한 눈길로 동료를 응원하고 있었다.
이윽고, 수인이 먼저 골에 도착했다.
골을 넘자마자 돌을 내던지는 수인.
“이겼다아아아아아!”
함성을 내지르자 응원하던 수인들 역시 환호성을 질렀다.
그다음으로 들어온 기사는 씁쓸한 표정으로 돌을 내려놓았다.
“잘했어!”
옆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그것도 잠시.
곧 공터가 조용해졌다. 아직 한 사람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홀로 남은 요정의 전사는 묵묵히 바위를 옮겼다.
한 발, 한 발.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흘러내린 땀이 바닥에 떨어졌다.
“힘내라!”
“좋아. 근성 있어!”
힘겹게 걸음을 옮겨간다.
그 모습에 요정뿐만 아니라 인간과 수인 역시 요정의 전사를 응원했다.
그리고.
쿵!
요정은 바위를 내려놓고 땀을 훔쳤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
요정족의 전사는 아쉬운 얼굴로 관중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졌음에도 요정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조용히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렇다. 경기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곧 두 번째 경기를 준비했다.
덩그러니 놓인 도끼 세 자루.
그리고 세 명의 전사들이 몸을 푸는 게 보였다.
그 사이 앤과 스테판 남매가 다가왔다.
“오랜만이다…. 요.”
인사를 건네던 아나가 앤이 눈살을 찌푸리자 황급히 요를 붙였다.
‘오면서 시달렸나 보네.’
강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유교적인 앤에게 있어서 아나의 말투는 용납되지 않을 거다.
그런 아나를 뒤로하고 마슈가 나섰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정중한 말투.
강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세 분이 같이 오시다니. 어쩐 일이세요?”
“같이 오지 않았다. 저 녀석들이 억지로 따라온 거지.”
“흥, 따라온 게 아니라 우리도 강현에게 볼일이 있었다, 요.”
발끈한 아나가 입을 열었다가 슬쩍 말끝을 흐렸다.
“하여튼 요즘 것들은.”
혀를 차며 담배를 내뿜는 앤.
불만이 있는지 아나의 입이 움찔거렸으나 끝내 열리지 않았다.
‘안 모양이네.’
왕도에 다녀왔다고 했으니 앤에 대해서도 들은 모양이었다.
요정의 혼혈.
뒷머리를 긁적인 마슈가 입을 열었다.
“강현 씨를 수소문하려던 찰나에 현자님을 만났습니다.”
“저를요?”
강현이 의아해하자 아나가 입을 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려고 했다, 요.”
앤의 눈치를 보느라 무언가 이상한 말투가 되었다.
“강현 씨 덕분에 로벤투스 영주님께서 교역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제 덕분이라뇨.”
강현이 고개를 흔들자 마슈 역시 고개를 저었다.
“사실입니다. 처음엔 부정적이셨는데, 강현 씨의 이름을 듣더니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자 마슈가 황급히 말을 보탰다.
“아, 저희가 먼저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혹시 마을에 아는 이가 있냐고 물으셔서…. 저희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영주님만이 아니다. 마을 사람도 아는 눈치더군.”
앤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아나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뒤, 뒤에 한 말은 혼잣말이다, 요.”
아나의 말에 눈을 흘기는 앤.
강현은 그 모습에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이 짐작되기 때문이었다.
일명 강현의 모험담.
‘…마을에서 못 들은 이는 없겠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