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짐은 놓고 가지
보글보글.
육수가 끓어오르는 소리가 노랫소리처럼 들려왔다.
육수를 확인한 강현은 힐끗 옆을 돌아보았다.
타닥타닥.
분주하게 움직이는 식칼.
마치 육수 소리에 박자를 맞추듯 율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정우.
솔직히 말하자면 얼마 안 있어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런데 벌써 이 주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적응이 힘든지 잠도 못 제대로 자고 점점 말라 갔다.
둘째 날은 얼굴까지 하얗게 질려서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이제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래, 도시 사람이 적응하기 힘들지.’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도 늘고 있어서 일이 주 정도면 강현과 황대길이 원하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다.
‘다행이네.’
아마 다른 이였다면 시간이 더 걸렸을 거다.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아니, 그전에 포기했겠지.’
그렇다면 새로운 이가 또 내려왔을 거다.
‘나쁜 사람은 아니야.’
고개를 끄덕인 강현은 육수의 불을 줄였다.
마침 한정우의 칼질도 멈춘 상태였다.
강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너무 이르네.’
오픈 시간까지는 한참이 남은 시간.
둘이 하다 보니 준비가 너무 빨리 끝났다. 애당초 준비가 필요한 작업도 그리 많지 않았다.
“조금 쉴까요?”
“예, 알겠습니다.”
강현의 말에 한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나오는 강현.
그러나 한정우는 바로 나오지 않고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네모난 가죽 가방. 가방 안에는 주전자와 닮은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를 본 강현의 눈이 커졌다.
“모카 포트네요?”
“예. 커피를 좋아해서.”
한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모카 포트.
간 원두를 넣고 수증기로 이용해서 커피를 뽑는 도구였다.
유럽에서는 흔한 것이었지만,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잘 쓰지 않았다.
“옆에서 봐도 될까요?”
“예.”
강현도 과거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요즘 차를 마시다 보니 흥미가 생긴 것이었다.
한정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한정우 옆에 섰다. 한정우는 화로 위에 거치대를 올렸다.
삼발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거치대와 달랐다.
높이도 높았다.
“이건.”
“아, 주문 제작 한 겁니다. 화구 불은 너무 강해서.”
한정우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투 속에는 자랑스러움도 묻어나고 있었다.
주방에 자주 있다 보니 주방에 맞게 장비를 맞춘 것이었다.
‘취미엔 장비가 중요하지.’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도 최근에 캠핑 장비를 몇 개나 추가하지 않았던가.
자랑하기 위해서 산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알아봐 주면 은근히 기뻤다.
치지직, 하고 포트가 끓기 시작했다.
작은 관 위로 송골송골 올라오는 커피.
커피 향이 주방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거품이 올라오자 화구를 껐다.
그리고는 포트에 담긴 커피를 잔에 옮겼다.
잔은 두 개.
뜨거운 물과 커피가 뒤섞였다. 그와 함께 올라오는 황금빛 크레마.
전문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강현은 두 개의 잔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혼자서 두 잔을 마시진 않을 거다. 처음부터 강현에게 나눠 줄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강현의 시선에 한정우가 웃으며 잔을 건넸다.
“원래는 진한 걸 좋아하는데, 일할 때는 되도록 연하게 마십니다.”
맛이 너무 짙어서 여운이 남기 때문이었다.
한정우가 꺼낸 상자 안에는 에스프레소 잔이 따로 있었다.
“감사합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받았다.
그리고 한 모금.
부드러운 커피 향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단맛과 신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강현은 감탄했다.
커피에 대해서 잘 모르는 강현이었지만, 이 커피가 훌륭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강현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은 한정우가 말을 건넸다.
“직접 해 보시겠어요?”
한정우가 모카 포트를 가리켰다.
잠시 망설이던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정우는 모카 포트를 물로 한 번 헹구고 건네줬다.
당연히 물기도 제거된 상태였다.
“처음에는….”
한정우의 입이 다시 닫혔다.
이미 강현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방식은 한정우가 하는 걸 보았다. 강현의 눈썰미라면 흉내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 설명을 듣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대단하네.’
하지만 한정우가 놀란 건 다른 부분이었다.
불을 조절하는 것까지 한정우가 했던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질투하진 않는다.
‘똑같이 흉내 낸다고 해서 같은 건 아니지.’
커피 역시 요리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모카 포트는 냄비보다 예민했다.
뒤로 물러난 한정우는 웃으며 팔짱을 꼈다.
아니나 다를까.
커피를 내린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언가 이상한 것이었다.
“한번 마셔 봐도 될까요?”
한정우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정우는 강현이 건넨 커피를 마셨다.
신맛과 함께 꺼끌꺼끌한 느낌이 올라왔다.
하지만 전처럼 웃을 수 없었다.
“…처음치고는 잘 내렸네요.”
진심이었다. 자신이나 강현처럼 혀가 예민한 이들이야 차이를 알 수 있겠지만, 일반인이라면 모르고 지나칠 정도였다.
‘역시 천재인가?’
한정우는 놀란 눈으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어째서 맛이 다른지 고민하고 있었다.
작은 차이도 그냥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단순히 재능만 있다면 강현의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거다.
재능을 개화시키려면 그만한 노력이 필요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만족했겠지.’
처음이라 그럴 수 있어. 그러나 강현은 달랐다.
자신이 건넨 말도 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
한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홀로 나왔다.
강현이 홀로 나온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는지 찝찝한 표정.
‘저런 표정도 짓는구나.’
한정우는 웃음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한정우에게 답을 구하지 않는 건, 설명을 들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감각과 경험의 문제였다.
* * *
강현이 커피를 홀짝였다.
당연히 한정우가 내려 준 것이었다. 강현이 내린 것은 텀블러에 잘 담아 놨다.
그렇게 커피를 마신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괜찮네. 에밀리야 씨가 좋아하겠어.’
전에 드립 커피를 주긴 했지만, 이건 또 다른 맛이었다.
그리고 에밀리야뿐만 아니라 조반테도 좋아할 것 같았다.
선물로 주기에 적당했다. 노아나 란돌프는 그다지 좋아할 것 같진 않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있으면 언젠가 쓰겠지.’
그렇게 사람들을 떠올리던 강현의 눈에 하얀 털 뭉치가 들어왔다.
강현과 눈이 마주치자 늘어지게 하품하는 설기.
아침을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설기를 본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살찐 것 같은데.”
평소보다 털이 복슬복슬했다.
움찔. 강현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털 뭉치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그리고 슬며시 고개를 돌리는 설기.
그 모습에 강현의 눈이 샐쭉해졌다.
무언가 찔리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요즘 외출도 자주 안 하던 거 같은데.’
턱을 긁적이는 강현.
그러다가 한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설기처럼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한정우.
강현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던 강현은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 내일은 쉬셔도 됩니다.”
“예?”
“일요일 하루만이라면 어디 다녀오기 힘들잖아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지난주에도 매장에만 있었다고 했다.
강현이야 할아버지 댁으로 가니깐, 일이 끝나고도 충분했다. 하지만 한정우는 아니었다.
차가 있다고 해도 저녁에 서울까지 가는 건 부담스러울 거다.
“며칠 더 계실 것 같으니, 주말은 편하게 쉬세요.”
이쪽 일을 하면서 주말에 쉬는 일은 드물었다.
자연스레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하고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강현의 배려에 한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거기보단 여기가 낫습니다.”
편하다는 게 아니었다. 서울이 더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강현도 경험이 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근처에 바람이라도 쐬라고 하고 싶지만, 이 근처라고 해 봤자 산뿐이었다.
여기에서 쉬는 게 나을 거다.
그때, 한정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일요일에 매장을 열어도 될까요?”
한정우의 물음에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단순히 매장을 쓰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장사를 하겠다는 의미였다.
강현의 시선에 한정우가 멋쩍게 웃었다.
“저번에 보니깐 사람들이 자주 오더군요. 그냥 돌려보내기 미안해서.”
한정우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라면 이해가 되었다.
일요일 영업. 다른 지역이었다면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열다가 안 열면 불만이 생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예외였다.
‘다들 사정을 알고 있으니.’
한정우가 떠나고 다시 일요일에 닫는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강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어요. 하지만 매장에 오시는 분들이 모두 식사하시러 오시는 건 아닙니다.”
식당에 식사 말고 무얼 하러 오겠는가.
전이라면 한정우도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며칠 동안 지내면서 느꼈다.
‘아직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
한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상후와 미영이. 둘 뿐만 아니라 그저 수다를 떨기 위해서 오는 사람도 있었다.
“재료는 편하게 써도 돼요. 부족한 게 있으면 옆 마을에서 사 오면 됩니다. 위치는 제가 적어 드릴게요.”
한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강현이 자전거를 끌고 장 보러 가는 걸 알고 있었다.
‘장이라.’
이런 시골에는 어떤 걸 팔까.
조금은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요리사였다.
그렇게 토요일이 되었고, 강현은 다시 짐을 챙겨서 이세계로 떠났다.
하지만 그런 강현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일요일 아침.
‘…자전거로 다녀올 정도면 가깝겠네.’
강현이 그려 준 꾸불꾸불한 지도.
차로 가는 길까지 표시해 줬지만, 한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체력이라면 자신이 있지.’
요리가 아니라면 강현에게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물며 어릴 적에는 취미로 자전거를 탔던 한정우였다.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그 실력이 녹슬진 않았을 거다.
“좋아.”
한정우는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선택을 후회했다.
* * *
이세계 공기를 맡은 강현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강현이 입고 있는 건 얇은 바람막이.
두꺼운 패딩은 할아버지 댁에 벗어 놨다. 강현은 손에 든 꾸러미를 들어 올렸다.
‘다음 주나 올 줄 알았는데.’
바로 모카 포트였다. 인원에 맞춰서 여섯 개를 샀다.
당연히 하나는 강현의 것이었다.
“컹! 컹!”
그때, 앞에 있던 설기가 짖었다.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가죽으로 만든 보자기가 기우뚱기우뚱 흔들렸다.
“알았어, 가자.”
선물들을 나눠 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강현이 걸음을 옮기자 신난 설기가 땅을 박찼다.
이리저리 오가는 설기.
그 모습을 보자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살쪘어.”
착각이 아니었다.
보자기를 맨 모습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강현의 말에 어깨 위에 있던 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당분간 식단 조절 좀 시켜야겠네.’
강현의 생각도 모른 채, 설기의 꼬리가 신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흔들리던 꼬리가 뚝, 멈췄다.
멈춰 서서 하늘을 응시하는 설기.
설기의 시선을 따라서 하늘을 본 강현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늘 위를 유유히 날고 있는 새 하나.
하늘이 다 보일 정도로 투명했다.
정령.
‘에밀리야 씨구나.’
소나였다.
다행히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갸웃했다.
멀리 떨어져서 작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소나가 아니잖아?’
소나보다 몸집이 작았다.
처음 소나가 그러했듯이 도도한 눈빛으로 강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다가 곧 설기에게 생각이 미쳤다.
멈췄던 꼬리가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쫑긋 솟아오른 귀.
본능이 깨어난 것이었다.
“자, 잠깐.”
하지만 설기는 이미 숲을 달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설기를 본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짐은 놓고 가지.’
잠시 후.
강현은 하늘 위를 나는 하얀 털 뭉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짐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