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캠핑으로 힐링 라이프-90화 (90/227)

#90화 알고 계셨어요?

훅, 훅.

뛸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올라왔다.

가을이 되면서 새벽에 쌀쌀해졌다. 성미가 급한 산의 경우에는 벌써 색이 바뀌고 있었다.

아침마다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도 색다른 재미였다.

변화는 산뿐만이 아니었다. 언덕 너머에 있던 낡은 집 하나가 그럴듯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바로 이정환의 집이었다.

가을에 이사 온다고 했으니 얼마 남지 않았다.

정기훈 작가의 별장과 마찬가지로 마을의 정취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세련되어 보였다.

강현은 집을 지나쳐서 언덕을 뛰어올랐다.

예전이라면 숨이 찼을 테지만 이제는 가뿐했다.

“삼촌!”

저 멀리 상후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옆에는 상후네 할머니도 함께였다.

강현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상후뿐만이 아니라 익숙한 얼굴들도 인사를 건네 왔다. 이제는 완전히 마을에 녹아든 것이었다.

그런 강현의 곁에는 새하얀 설기가 함께하고 있었다.

짧은 다리로 부지런히 강현의 곁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강현은 설기가 오히려 속도를 맞춰 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방송이 나갔지만 강현의 삶은 달라진 게 없었다.

마을 회관에서 방송을 본 다음 날이 돼서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대부분이 안면이 있던 이들이 보내온 안부 문자였다.

예외라고 할 만한 것들은 윤섭의 놀림과 세나의 감사 문자였다.

강현이 준 열매를 먹고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는 문자였다.

덕분에 내년부터는 다시 가수로 활동할 수 있을 거라는 소식이었다.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따로 와서 감사 인사를 하겠다는 걸 억지로 말렸다.

‘그래도 올 것 같긴 하지만.’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그 외에는 유니즈. 윤섭이 맡은 아이돌 멤버들이 보낸 문자들이었다.

‘내가 소현이랑 번호를 교환했던가?’

잠깐 고민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그들보다 많은 문자를 보낸 이가 있었다.

“음.”

바로 전에 강현이 일하던 레스토랑의 오너였다.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지.”

미각도, 팔도 나았지만, 서울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강현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설기가 앞발을 들었다.

발바닥을 닦아 달라는 것이었다. 강현은 피식 웃고는 물티슈로 설기의 발을 닦았다.

앞발을 닦자마자 뒷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닦는 게 끝나자마자 후다닥 달려가더니 이불 밑으로 쏙 들어갔다.

강현이 씻는 동안 낮잠을 자려는 것이었다.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털에도 흙먼지가 잔뜩 꼈겠지만, 발이라도 닦은 게 어디인가.

그렇게 설기가 이불 안으로 들어가자 이불이 들썩거렸다.

빼꼼.

설기 머리 위에 있던 토리가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설기와 달리 이불 안이 답답한 것이었다.

이불 위로 올라와서 다시 눕는 토리.

강현은 그런 둘을 힐끗거리고는 씻으러 들어갔다.

강현이 씻고 나왔을 때도 둘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내려가서 밥 먹자.”

쫑긋.

그제야 반응하는 설기. 벌떡 일어나더니 거추장스러운 이불을 뒷발로 휙 밀었다.

덕분에 이불 위에서 쉬고 있던 토리가 봉변당했다.

통, 통, 통.

작은 몸이 이불에 몇 번이나 튕기더니 땅바닥에 떨어졌다.

놀란 듯 눈을 껌뻑이는 토리.

그러나 곧 자신의 곁에 다가온 설기를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설기의 몸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토리를 태운 설기가 강현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오늘 아침은 간단하게 미국식으로 준비했다.

아메리칸 브렉퍼스트.

구운 빵과 소시지, 그리고 베이컨과 토마토.

그리고 에그 스크램블.

푼 달걀을 팬에 구운 것이었다. 강현의 취향은 계란프라이.

한쪽 면만 익힌 서니 사이드 업이었으나, 설기의 먹성 때문에 힘들었다.

‘그건 간단하게 먹는 게 아니지.’

그와 달리 에그 스크램블은 한 번에 많은 양을 할 수 있으니 간편했다.

그렇게 음식을 접시에 담고 설기에게 건넸다.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는 설기.

“잼은 안 발라도 돼?”

강현의 물음에 설기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먹는 데 집중했다.

그 모습에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예쁘게 담아 준 의미가 없네.”

이미 소시지와 베이컨, 빵이 뒤섞였다.

이럴 거면 햄버거로 만들어 주는 게 나을 뻔했다.

그렇게 허겁지겁 먹으면서도 정확하게 토마토는 피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토리가 그런 토마토를 껴안고 야금야금 먹고 있었다.

강현은 설기에게 잔소리하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설기는 인간이 아니었다.

육식 동물. 게다가 최근에 채소를 먹는 일도 늘었다.

‘그래, 오늘은 넘어간다.’

강현은 토스트 위에 딸기잼을 발라서 입으로 가져갔다.

바삭한 식감과 함께 달콤한 맛이 혀를 간지럽혔다.

‘빵과 잼이 안 어울릴 수가 없지.’

강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접시를 비운 강현은 우유를 마셨다.

간단하지만 영양소도 충분한 식사.

어느새 그릇을 비운 설기가 강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릇 위에는 새빨간 토마토들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릇 옆에는 반쯤 먹은 토마토와 함께 배가 볼록해진 토리가 누워 있었다.

강현은 피식 웃고는 접시를 정리했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시작되었다.

* * *

여느 날과 다를 것이 없는 아침.

그러나 매장에 찾아온 손님은 평소와 달랐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이런 곳에 있었네.”

딸랑딸랑.

매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를 본 강현의 눈이 커졌다.

“대표님?”

강현의 대꾸에 중년인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누구야. 우리 이 셰프 아닌가!”

두 팔을 벌리는 중년인. 당연했지만, 강현은 안길 생각이 없었다.

멀뚱멀뚱 쳐다보자 중년인이 슬쩍 손을 내렸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은. 이 셰프가 바쁜 것 같으니 직접 왔지.”

중년인은 능글맞게 웃었다.

중년인의 말에 강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중년인은 강현이 있던 레스토랑의 오너였다.

문자에 답장을 보내지 않으니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여긴 어떻게 아셨어요?”

경계심이 아니라 순수한 의문이었다.

강현의 물음에 중년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저번에 매장에 짐 있다고 붙여 준다고 했잖아. 그때 기억해 뒀지.”

중년인의 말에 강현은 탄성을 뱉었다.

여기로 이사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걸 기억하고 있던 건가?

한편으로는 대단했다.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중년인에게 나쁜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강현에게 잘해 줬다. 그렇기에 슬슬 답장하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올 줄은 몰랐다.

“차라도 드릴까요?”

“커피 돼?”

“믹스커피만 있어요.”

강현의 대꾸에 중년인이 눈을 껌뻑였다.

“양식당인데 커피가 없어?”

“아무도 안 마셔서 치웠어요.”

강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런 곳에서 커피를 찾는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장비가 있어도 강현밖에 마시지 않았다.

강현도 커피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기에 정리했다.

그러한 강현의 말에 중년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물이나 줘.”

“예.”

강현은 물 한 잔을 따라서 중년인에게 건넸다.

물을 마신 중년인이 강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팔목은 다 나은 거야?”

“예. 괜찮아졌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강현. 그러자 중년인이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혀는?”

“알고 계셨어요?”

강현이 놀란 눈으로 중년인을 보았다.

그러자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몰랐지. 하지만 이 셰프가 떠나고 애들한테 들었어. 이 셰프가 떠난 게 팔 문제 때문만이 아닌 것 같다고.”

중년인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상담하지.”

중년인의 말에 강현이 미소 지었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었어요.”

“…하긴.”

고개를 끄덕인 중년인이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는 괜찮아?”

“예.”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중년인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럼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거야? 그래, 이 셰프가 이런 곳에 있는 건 재능의 낭비야.”

“아뇨. 여기에 있으려고요.”

강현의 대꾸에 중년인이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왜?”

“여기 생활이 맞아서요. 게다가 이제 막 안정된 거라 재발할 수도 있어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강현의 미각은 정신적인 문제였다.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강현은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이제 과거처럼 다른 이의 평가에 매달리지 않는다.

강현의 이야기를 들은 중년인이 입을 다물었다.

강현은 그런 중년인을 보며 의아해했다.

“새로 헤드 셰프 뽑지 않았어요?”

“뽑았지. 근데 그만뒀어.”

그제야 강현은 중년인이 여기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대로 일하는 녀석이 없어. 실력도 없으면서 애들한테 강짜나 부리고.”

그리 말하고 슬쩍 강현을 보았다. 강현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더 권유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것이었다.

“…진짜 안 올라와?”

“예.”

단호한 강현의 대꾸에 중년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여기서 일하면서 레시피만 봐주는 건 어때?”

“예?”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그만큼 당혹스러운 제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컨설턴트지. 애들도 강현이 네 말이라면 따를 거 아냐?”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요?”

메뉴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직접 지휘하는 것과 조언만 해 주는 건 달랐다.

새로운 헤드 셰프를 구하면 끝날 일이었다.

고급 레스토랑의 경우, 늘 같은 요리만 낼 수 없었다.

그런 강현의 물음에 중년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 잘 모르는구나. 지금 너 유명해. 전보다 더.”

중년인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방송 나가고 유튜버들이 네 요리를 따라 하면서 이슈가 되고 있어.”

그제야 강현은 중년인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강현의 이름값을 빌리겠다는 뜻이었다.

“근데 그런 게 화젯거리가 돼요?”

“원래 이슈가 그런 거야. 어디서 터질지 알 수 없거든. 아마 곧 방송국에서도 연락이 올걸?”

다른 프로에도 나와 달라고.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나 이쪽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년인이 직접 찾아올 정도라면 쉽게 잠잠해지진 않을 거다.

“요즘 시대가 좋아졌잖아. 여기서도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어. 장비라면 내가 제공할게. 여기서 일하다가 가끔 들러서 점검만 해 주면 돼.”

그리 말한 중년인이 강현에게 윙크했다.

다 큰 어른의 윙크는 반갑지 않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강현은 물끄러미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중년인은 전형적인 사업가였다. 그러나 적어도 강현을 속일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의도를 밝혀 주는 게 편하지.’

강현이 고민하자 중년인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수당은 제대로 맞혀 줄 거야. 물론, 헤드 셰프였을 때만큼은 챙겨 줄 수 없지만….”

당연했다. 사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매장도 그리 바쁘지 않아서 시간도 여유가 있었다.

“음, 조금 생각해 볼게요.”

강현의 대꾸에 중년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중년인이 입을 열려는 찰나에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응? 못 보던 차여.”

“여기 사람은 아니네.”

이장과 정기훈 작가의 목소리였다. 강현은 중년인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를 데리러 왔다고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응? 왜?”

중년인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매장 문이 열렸다.

그리고 강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년인을 본 이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손님?”

“아, 전에 제가 일하던 곳의 사장님이세요.”

강현은 자연스럽게 중년인을 소개했다. 정기훈 작가를 알아본 중년인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곧 자신을 노려보는 이장을 보고 숨을 삼켰다.

“사장? 그런 양반이 여기까진 왜 왔데?”

날카로운 눈빛에 중년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장의 눈이 중년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지, 지나가다가 안부 차 들렀습니다.”

“…그려?”

그제야 눈에 힘을 푸는 이장. 그러나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지 않고 있었다.

“허험. 그럼 난 이제 가 볼게. 이 셰프 생각해 보고 연락 줘.”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중년인이 도망치듯 매장을 나섰다.

정기훈 작가는 사정을 짐작했는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질 뿐이었다.

곧 이장이 강현을 돌아보았다.

중년인을 볼 때와 달리 부드러운 눈빛.

“떠나는 거 아니지?”

“그럼요. 제가 어딜 가요.”

“그래, 그래야지. 오는 건 자유인데, 나가는 건 내 허락이 있어야 혀.”

굳게 고개를 주억이는 이장을 본 강현이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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