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아무도 안 오네
강현이 방송국을 나왔을 때는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진짜 서둘러야겠네.’
평창행 버스는 적었다.
놓치면 꼼짝없이 내일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이, 강현!”
“….”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선글라스를 쓴 윤섭이 보였다.
“어쩐 일이야?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일 끝나자마자 달려온 거잖아.”
윤섭이 그리 말하고는 옆좌석을 턱짓했다. 피식, 웃은 강현이 자리에 앉자 윤섭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내가 방금 아주 재밌는 광경을 봤거든?”
윤섭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요기 앞에서 김종석 그 인간이 후배한테 맞았어. 사람들이 촬영하고 장난 아니었다? 처음에는 멱살을 잡고 실랑이하더니 일방적으로 맞더라고. 그렇게 잘난 척할 시간에 운동이나 하지.”
“아….”
나가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되었다. 같이 있던 이는 이번 일로 앞날이 막힌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요리사 일을 그만둘 필요는 없겠지만, 유명 레스토랑에 들어가는 건 힘들 거다.
그런 곳일수록 평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동정은 안 하지만.’
결과가 어찌 되었든, 그의 선택이었다.
강현의 표정을 본 윤섭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었던 거야?”
반짝이는 윤섭의 눈동자.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니, 간단하게 말고.”
윤섭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 부탁해. 기승전결이 있게. 결과만 듣는 거, 아주 싫어해.”
그리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그 인간 맞는 걸 보고 바로 반차 냈어. 내가 평창까지 데려다줄 거야.”
강현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되는 건가?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고 들었다.
그러한 강현의 의문에 윤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노발대발하시면서 반차를 병가로 바꿔 주겠데.”
“….”
당연히 아들의 편의를 봐주겠다는 게 아니었다. 병가를 받을 상태로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윤섭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내일이 좀 걱정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오늘 이야기를 못 들으면 내일 일이 손에 안 잡힐 거야.”
강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거라면 세나나 소현에게 부탁해도 충분할 거다.
강현을 생각해서 일부러 시간을 낸 것이었다.
그때, 가슴팍이 간지러워졌다.
고개를 내리자 토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직 피곤해 보이는 상태.
그래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강현은 토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 * *
다음 날, 김윤하 피디에게 전화가 왔다.
결국, 청팀이 우승해서 상품을 보내야 하니 주소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당연했다. 막판에 김종석이 그런 짓을 했는데, 홍팀이 의욕이 생길 리가 없었다.
그리고 최종 우승은 다른 사람이 했다.
강현 다음에 나온 이.
‘못 봐서 아쉽네.’
강현이 입맛을 다셨다. 시간이 있었다면 다 보고 나왔을 거다. 반대로 우승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없었다.
애당초 우승을 노렸다면 다른 요리를 했을 거다.
그리고 며칠 뒤.
김윤하 피디가 보낸 상품들이 도착했다.
매장 앞에 쌓여 있는 스티로폼 박스들을 보며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었다.
강현의 가슴까지 쌓인 상자들.
가장 위에 있는 상자를 열어 보니 선 분홍빛 고기가 강현을 맞이했다.
“…한우.”
그것도 투플러스의 한우였다.
놀란 강현이 다른 상자를 열어 보았다.
가지런히 놓인 줄무늬.
킹타이거 새우.
그 외에도 대왕 가리비와 제주 흑돼지도 보였다.
상자를 열 때마다 강현이 탄성을 뱉었다.
‘푸짐한 상품이라고는 했는데….’
정도가 너무 심했다. 강현이 듣기로 상품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잘못 온 건가?’
강현은 김윤하 피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김윤하 피디가 전화를 받았다.
[강현 씨. 무슨 일이야?]
일하는 중인지 주변이 시끄러웠다.
“택배가 도착했는데….”
[오! 벌써 갔구나. 빠르네. 어때? 마음에 들어?]
“…너무 많은 거 같은데요?”
강현의 대꾸에 핸드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맞게 간 거니 걱정하지 마. 우승하신 김형록 셰프님께서 자신은 상금이 있으니 강현 씨 전해 주라고 해서 같이 넣은 거야. 그리고 방송국에서도 미안해서 좀 더 챙겼어.]
좀이 아니었다.
그제야 강현은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게다가 김형록 셰프도 의외였다.
일식 요리사.
이번에 방송을 같이하긴 했지만, 강현과 접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맛있게 먹어. 좀 이르지만 한가위 잘 보내고. 난 다시 일하러 가 볼게.]
“예. 피디님도 추석 잘 보내세요.”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강현은 고개를 돌려 박스들을 보았다.
저만한 양이면 냉동고에 넣을 자리도 없었다.
게다가.
“…아깝지.”
신선한 재료들. 한 번 얼리면 맛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재료들도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줘야겠네.”
절반씩 덜어서 이장에게 가져다주면 알아서 먹을 거다.
그리고 나머지는….
강현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한 쌍.
설기였다.
“…그래, 먹자.”
“컹!”
강현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설기가 폴짝폴짝 뛰었다.
모처럼 받은 선물이니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선물이 아니었다.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였다.
그리고 마을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내일 갈 때 가져가자.”
신나게 흔들리던 꼬리가 멈췄다. 당장 먹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끼잉. 낑.”
설기가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하나만? 하나만 먹으면 안 될까?
그러나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고작 하룻밤이잖아. 조금만 참아.”
강현의 말에 아쉬워하던 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정도는 기다릴 수 있었다. 강현은 그러한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절반을 덜어 내면 냉장고에 어찌 들어갈 순 있을 거다.
‘문제는 어떻게 먹냐는 건데.’
다 좋은 식자재였다.
하나하나 따로 요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고민하던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좋은 재료일수록 재료 그대로 먹는 게 낫지.”
구이.
바비큐로 먹으면 되었다. 강현은 상자를 들어서 매장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설기를 보며 말했다.
“가서 이장님 좀 불러와 줄래?”
“컹!”
이제 매장을 열 시간이라 강현이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설기가 힘차게 짖은 후 매장 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컹!”
“알겠어. 알겠으니 천천히 좀 가자구.”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설기. 그 뒤로 이장이 따라 들어왔다.
방금까지 일하다가 왔는지 땀이 흥건했다.
“대체 무슨 일이여.”
들어오던 이장은 테이블 위에 있는 걸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매, 이게 다 뭐여?”
“아, 선물 받은 건데 너무 많아서 마을 분들이랑 나눠 드시라고 불렀어요.”
“횡성 한우? 이 새우는 뭐 이리 커. 어후, 다 비싼 거 아녀?”
놀란 이장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저도 받은 거예요.”
강현의 말에도 이장은 선뜻 물건을 챙기지 못했다.
“이걸 다 주면 그짝은 뭘 먹고.”
“전 따로 챙겼어요.”
“…그래?”
그제야 이장의 표정이 환해졌다.
“잠시만 기다려 봐. 많아서 혼자 못 들겠네.”
이장이 매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십여 분 정도 지났을 때, 아저씨 둘을 데리고 들어왔다.
“허, 이게 무슨….”
아저씨들의 반응도 이장과 다르지 않았다.
“이걸 정말로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네.”
“가져가셔도 돼요.”
강현이 부드럽게 웃었다.
강현의 말에 아저씨들이 물건을 차에 실었다. 그러는 사이 이장이 강현에게 다가왔다.
“안 그래도 요즘 다들 지쳐서 몸보신이 필요했는데. 고마워.”
추석이 다가와서 농사일이 바빠진 것이었다.
“저도 좀 도왔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죄송은 무슨. 그짝도 할 일이 있는데 해야지. 게다가 다음 주에 정가네 도와주기로 했다며?”
이장의 말에 강현이 멋쩍게 웃었다.
역시 소문이 빨랐다. 아직 몸이 불편한 수진을 대신해서 민호네 일을 돕기로 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정신없이 바쁘긴 마찬가지라서 사람이 없었다.
일 년 중 가장 바쁜 시기였다.
강현도 촬영 준비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돕고 있었을 거다.
“저번에도 고생한다고 피자도 나눠 주더니 이번에도 이런 걸 또 주고. 충분혀.”
이장이 웃으며 강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낼 저녁에 회관에서 구워 먹을 테니 그짝도 놀러 와. 그짝 거긴 하지만….”
자신이 말하고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머쓱해 했다.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으니 다른 분들이랑 드세요. 아, 양이 부족하면 더 드릴까요?”
강현에게는 많은 양이었지만, 마을 전체가 먹기에는 적었다.
그러자 이장이 손사래를 쳤다.
“아휴, 괜찮어. 이참에 돼지나 한 마리 잡지. 올해에는 농사가 잘됐으니 축하해야지. 그러니 양은 걱정하지 말고 와.”
“아뇨. 전 진짜 일정이 있어서….”
강현이 웃으며 거절했다. 시간이 맞으면 함께하겠지만, 내일은 이세계로 넘어가야 했다.
‘약속을 한 건 아니지만….’
다음 주에는 추석에다가 민호네 일을 도와야 해서 정신이 없을 거다.
“그러니 저 빼고 즐… 기세요.”
강현의 눈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강현의 시선은 이장의 뒤편으로 향했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잡고 엉금엉금 기어 오더니 턱, 누워 버린 토리.
머리카락 몇 올이 어깨 위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를 본 강현의 눈이 떨려 왔다.
“응? 뭔 일 있어?”
이장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 아뇨.”
황급히 고개를 젓는 강현. 그러는 강현을 보며 이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일을 너무 많이 했나? 목이 뻐근혀.”
이리저리 목을 흔드는 이장. 모자에 있던 토리가 데구루루 떨어졌다.
설기가 떨어지는 토리를 낚아챘다.
그제야 강현도 안도할 수 있었다.
설기와 다르게 토리의 움직임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신출귀몰이란 단어가 잘 어울렸다.
‘정말 방심할 수가 없네.’
설기가 얌전해지니깐 다른 쪽이 말썽이었다.
다행이라면 토리는 정령이라 그리 무겁지 않았다.
기껏해야 호두 한 알 정도의 무게.
다른 이가 알아채기 어려웠다.
“아무튼, 잘 먹을게.”
그리 말한 이장이 모자를 고쳐 쓰더니 매장을 나갔다.
그렇게 이장이 사라진 걸 본 강현은 설기 머리 위에 있는 토리를 들어 올렸다.
“여기서는 다른 사람 위에 올라가지 말랬잖아.”
보이진 않지만, 이상하다는 걸 알아챌 거다.
문제가 될 상황은 피하는 게 나았다.
강현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토리.
그 모습에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장님의 머리카락도.’
이장이 머리카락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아는 강현이었다.
매일같이 모자를 쓰는 이유도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해였다.
강현이 머리를 두드리자 간지러운지 배를 까고 드러누운 토리.
강현이 배를 푹, 푹 찔렀다.
폭신한 촉감에 강현의 기분도 조금씩 풀렸다.
“다음부터 조심해.”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토리가 몸을 비볐다.
결국,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 * *
그리고 다음 날.
일찍 매장 문을 닫은 강현은 받은 선물을 들고 이세계로 향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강현을 맞이했다.
“…아무도 안 오네.”
설기와 함께 자리를 찾은 후 텐트를 칠 때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흔들리는 나뭇잎과 새들의 지저귐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자연스레 강현의 시선이 아이스박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