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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란돌프는 데려온 말들을 기사들에게 맡겼다.
그리고 새롭게 합류한 로멘과 마을 걸었다.
곳곳에서 보이는 아이들이 설기를 보며 눈을 빛냈지만, 부모의 제지로 함부로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로멘님의 눈치를 보는 건가?’
그때, 앞서 걷고 있던 란돌프의 걸음이 멈췄다.
마을 외곽 부근에 있는 집.
일행들의 발걸음이 멈추자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당신, 오셨어요?”
삼십 대 후반의 여인.
부드러운 인상의 여인이었다. 누군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이이의 아내인 제니퍼랍니다.”
“아, 안녕하세요.”
강현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제니퍼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 있던 로멘 역시 손을 들었다.
“부인, 오랜만이군.”
“로멘님도 같이 오셨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실례하겠네.”
로멘은 그녀와 안면이 있어 보였다.
일행들은 그녀의 안내에 따라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강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건 서양과 비슷하네.’
미국에서 생활했기에 익숙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아늑해 보이는 거실이 나왔다.
그리고 아까는 몰랐던 조그마한 생물이 하나.
“헤나. 인사해야지.”
제니퍼의 말에 뒤에 있던 작은 그림자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엄마를 닮은 금발.
정말로 인형처럼 생긴 아이였다.
한국이었다면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나이.
란돌프의 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여운 아이였다.
갈색 눈동자에는 호기심과 경계심이 뒤섞여 있었다.
‘...저런 아이에게 목검을 들이민 건가?’
아이가 울만 했다.
헤나는 빙그르르 눈을 굴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리고는 수줍게 제니퍼의 뒤로 몸을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두꺼운 손 하나가 막아섰다.
“이 아버지에게는 인사도 안 하는 것이냐?”
헤나를 번쩍 든 란돌프는 뺨에 헤나의 볼을 비볐다.
“으으윽.”
까칠한 수염을 감촉에 울상을 짓는 헤나. 그러자 제니퍼가 란돌프의 등을 때렸다.
“손님도 계시는데 무슨 짓이에요?”
눈을 흘기자 란돌프가 입맛을 다시며 헤나를 내려놨다.
후다닥. 제니퍼의 뒤로 도망치는 헤나.
곧 헤나가 란돌프를 노려봤다. 그런 헤나를 보고 오히려 웃음을 터트리는 란돌프.
한숨을 내쉰 제니퍼의 시선이 란돌프가 메고 있는 배낭에 향했다.
“그거는 뭐예요?”
“아, 이건 이 친구 걸세.”
란돌프가 강현에게 배낭을 돌려줬다. 덕분에 강현도 잊고 있던 걸 깨달았다.
“잠시만요.”
강현이 배낭을 열더니 안에 있는 걸 꺼냈다.
가장 먼저 나온 건 상자에 들어있는 향초였다.
“선물입니다. 촛불을 켜면 향이 올라와요.”
“어머.”
강현의 말에 제니퍼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상자도 고급스럽네요. 비쌀 텐데···.”
“아니에요. 편하게 쓰셔도 됩니다.”
제니퍼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선물로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챙긴 것이었다.
향초라면 이 시대에서도 드문 물건은 아닐 거다.
‘...오히려 포장이 수수한 걸 찾으려고 고생했지.’
다행히 제니퍼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제니퍼와 달리 다른 란돌프와 로멘의 시선은 디팩에 향해 있었다.
그러나 둘의 시선의 의미는 달랐다.
란돌프는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건 뭔가?”
로멘의 물음에 강현은 디팩을 열었다.
안에 있는 전.
동그랑땡과 부추전. 그리고 맥주와 소주.
란돌프의 눈이 반짝였다.
“얘는 못 보던 녀석이군. 이것도 술인가?”
플라스틱병 소주를 든 란돌프가 물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자 란돌프가 입을 열었다.
“이런 건 안 챙겨와도 된다고 말했는데.”
말과 달리 란돌프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로멘의 관심은 음식이나 술이 아니었다.
디팩.
“얼음물을 넣어서 신선도를 유지하는 건가?”
일종의 아이스박스였다.
아직 차가운 디팩 안을 만져본 로멘이 감탄을 토했다.
“이러면 계속 냉각할 필요가 없겠군. 실용적이야.”
로멘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그럼, 얼음은 어떻게···. 그렇군. 아티펙트인가!”
냉동고로 얼렸으나 로멘은 혼자 무언가를 깨닫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으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중세에서 이렇게 얼음을 구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제니퍼의 관심은 향초에서 전으로 옮겨갔다.
“정말로 아직도 시원하네요. 이거는 바로 먹는 건가요?”
“예. 먹기 전에 살짝만 데워주면 됩니다.”
“그러면 이따 파티 때 다 같이 먹으면 되겠네요.”
제니퍼가 꺼낸 음식을 다시 디팩에 넣었다. 그 모습에 로멘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디팩을 좀 더 관찰하고 싶었지만, 차마 자존심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이었다.
“전 준비할 게 남아서 들어가 볼게요. 편히 쉬고 가세요.”
제니퍼가 디팩을 들고 주방으로 향하자 로멘이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그런 제니퍼와 란돌프를 번갈아 보는 헤나.
제니퍼를 따라갈지 망설이는 것이었다.
“이리 오너라.”
란돌프가 손짓하자 머뭇거리다가 다가갔다. 그리고는 란돌프의 무릎 위로 올라가는 헤나.
란돌프가 헤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강현과 로멘이 미소 지었다.
“파티는 저녁이라고 했던가?”
“예.”
“난 그동안 일 좀 하겠네.”
로멘이 로브 자락에서 천과 깃털 펜을 꺼냈다. 그리고 무언가를 적기 시작하는 로멘.
헤나가 신기하다는 듯이 로멘을 바라보았고, 란돌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럴 때도 일입니까?”
“일에 때가 어디 있나.”
담담하게 말하는 로멘.
로멘을 방해하지 않게 조용히 앉아있는 강현의 곁으로 설기가 다가왔다.
“끼잉.”
몸을 비비는 설기.
강현은 그런 설기를 쓰다듬었다.
“배고프구나? 조금만 기다려.”
강현의 말에 힘없이 꼬리를 내리는 설기.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여기는 매장도 아닐뿐더러 숲도 아니었다.
강현의 멋대로 할 순 없었다.
그때, 란돌프의 무릎에 앉아있던 헤나가 바닥으로 내려오더니 어디론가 후다닥, 달려갔다.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헤나가 떠난 자리를 보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헤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손에는 육포가 들려있었다. 설기에게 다가와 육포를 내미는 헤나.
그러나 정작 설기는 심드렁한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늘 강현의 요리를 먹던 설기였다. 육포에 눈이 갈 리가 없었다.
결국, 강현이 나섰다.
“널 신경 써서 챙겨준 거잖아.”
강현이 설기의 등을 쓰다듬자 설기가 못 이긴 척 육포를 물었다.
“와.”
그러자 헤나의 표정이 환해졌다.
강현은 육포를 씹는 설기를 보며 피식 웃었다. 꼬리가 멈춰 있었다.
억지로 먹는 것이었다.
그렇게 설기를 보던 헤나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다시 한번 주방으로 달려가는 헤나.
이어서 긴 빵을 들고 왔다.
한눈에 봐도 단단해 보이는 빵.
‘바게트 같은 건가?’
그리고는 설기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설기가 강현을 돌아보았다.
강현이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한숨을 내쉬더니 육포를 삼켰다.
그리고 빵을 물자 헤나가 까르르 웃으며 박수를 쳤다.
아그작, 아그작.
‘...빵을 씹는데 저런 소리가 나는구나.’
소리만 들으면 뼈라도 씹는 것 같았다. 멈춰 있던 설기의 꼬리가 조금이나마 움직였다.
육포보다는 빵이 나은 것이었다.
곧 헤나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만져도 돼요?”
“그 아이에게 물어보렴.”
강현의 말에 다시 설기를 바라보는 혜나.
설기는 심드렁한 눈빛으로 목을 길게 뺐다.
허락해준 것이었다.
강현은 의외란 눈으로 설기를 바라보았다. 설기가 강현 이외에 다른 이에게 몸을 허락한 적은 처음이었다.
‘모나도 있긴 하지만.’
모나와는 상황이 달랐다. 모나는 놀이 상대이기 때문이었다.
“와아. 복슬복슬해!”
헤나가 감탄하며 설기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빵을 다 먹은 설기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쉬움에 탄성을 뱉는 헤나. 그를 보면 강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육포와 빵의 대가구나.’
헤나도 그걸 깨달았는지 황급히 빵 하나를 더 가져왔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설기.
이제 빵은 더 먹지 않겠다고 항변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면 많이 배려해준 거지.’
강현도 그런 설기를 나무랄 수 없었다.
“어린 늑대께서 배가 부른 모양이구나.”
란돌프가 아쉬워하는 헤나를 들어서 무릎 위에 앉혔다.
고작 빵과 육포만으로 설기의 배를 채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란돌프였으나, 딸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미련이 남은 눈으로 설기를 보던 헤나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던 로멘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이를 먹으니 눈이 침침하군. 촛불 좀 써도 되겠는가?”
“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란돌프가 벽에서 촛불 하나를 들고 왔다.
“불을 가져오겠습니다.”
“괜찮네.”
로멘이 지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툭, 로멘의 손에 맞은 지팡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데구루루. 굴러가는 지팡이. 결국, 로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강현이 나섰다.
“저한테 불이 있습니다.”
강현이 품에서 라이터를 꺼내자 란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에겐 그게 있었군.”
치익, 촛불에 불이 붙었다.
“정말 편리한 아티펙트야.”
고개를 주억이는 란돌프. 그러나 로멘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야.”
“예?”
란돌프가 되물었다. 그러자 로멘이 고개를 저었다.
“아티펙트가 아니야. 그렇지?”
강현을 바라보는 시선. 강현은 아차 싶어서 숨을 삼켰다.
란돌프와 있을 때, 몇 번이나 써서 방심했다.
그러나 로멘의 눈빛은 의심이나 경계보다 호기심이 더 짙었다.
“...내가 봐도 되겠는가?”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로멘에게 라이터를 건넸다.
강현이 한 것처럼 라이터를 켜보는 로멘.
곧 로멘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부싯돌을 이용한 건가! 어떤 원리지?”
라이터에 흥미를 보이는 로멘. 그러나 강현과 란돌프의 시선을 깨닫고 헛기침했다.
“...아까 보온 주머니도 그렇고. 신기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군.”
단순히 신기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모두 마법이 아니면서 마법과도 같은 효과를 내고 있었다.
로멘에게는 그러한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런 일은 마법이 아니면 불가능한 줄 알고 있었다.
억지로 펜을 들어 올리는 로멘.
그러나 그의 눈은 쉬지 않고 라이터를 힐끗거렸다.
강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라이터를 건넸다.
“하나, 드리겠습니다.”
“...괜찮은가?”
조심스럽게 묻는 로멘.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또 구하면 됩니다. 게다가 란돌프씨의 지인이라면 제게도 남이 아니잖아요.”
시대에 동떨어진 기술을 퍼트리는 게 아닌가, 걱정되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마법도 있으니.’
강현의 눈에는 손에서 불을 뿜는 게 더 신기했다.
“고맙네!”
라이터를 받아든 로멘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당장이라도 라이터를 연구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차마 선물을 준 이의 눈앞에서 분해할 순 없었다.
피식, 웃은 강현은 고개를 돌리다가 숨을 삼켰다.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란돌프.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다음에 올 때, 란돌프씨의 것도 챙겨올게요.”
그러한 강현의 말에 란돌프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네. 불을 피우는 건 익숙해.”
“아뇨. 제가 선물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강현의 말에 란돌프가 헛기침했다.
“...그래?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성의를 무시할 순 없지.”
히죽, 웃는 란돌프. 그 모습에 강현이 미소 지었다.
그러한 강현을 보며 로멘이 입을 열었다.
“자네, 강현이라고 했던가? 영지에서 곤란한 일이 있으면 내 이름을 대게.”
진지한 눈빛. 강현이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로멘님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아, 그렇군! 자네가 있었어. 자네의 친구였지!”
란돌프의 말에 로멘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저녁이니 슬슬 준비할···. 무슨 일 있었어요?”
뒤늦게 거실로 나온 제니퍼는 화기애애한 일행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