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투기장
* * *
“저거 살아있는 거 맞아?”
늑대의 용병 중 한 명이 마법진을 꽉 붙들며 말했다.
사슬 마법. 공격성보다는 포획에 중점을 둔 그 마법이 바비룬을 붙들고 있었다.
한 명뿐만이 아니다.
수십 명이 붙들었음에도 그의 거센 몸부림은 멈출 줄 몰랐다.
그때 세 용사의 거센 공격은 그에게 정통으로 직격했고, 바비룬은 의식을 잃었다.
그로부터 수어 분이 흘렀다.
팔이 잘려나간 퀸은 치료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장과 케일은 마나와 기를 가다듬으며 워 울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얼핏 들었을 때까지의 대화는 마왕군과 관련한 것일 터인데, 용병들이 귀를 기울이자 장은 마나 장벽을 펼쳤다.
“허어... 제대로 활약한 것도 없이 끝났구만그래.”
허리를 퉁퉁 두드리며 듄이 걸어왔다.
“다친 곳은?”
“나 걱정해주는 거야?”
“그럼 걱정이 안 되겠어?”
그 옆에 기넨이 착 달라붙어 듄의 몸을 점검한다.
이곳저곳 더듬었다. 특히나 거칠게 옷 단면이 찢어진 곳을 집중적으로.
다행히도 워낙 튼튼한 몸인지라 작은 생채기를 제외하곤 너무나도 멀쩡했다.
그저 지쳤다는 것이 그의 주장. 저 괴물들과의 전투 속에서 단순히 지치고 끝났다는 것 자체가 듄도 인간에서 상당히 벗어났다는 걸 증명했다.
“그쪽은 죽였소?”
“뭐... 기가 약해지고 있긴 합니다.”
듄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듄보다도 경악스러운 검귀가 있었다.
음.
그의 옆에는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우드 엘프가 있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우드 엘프.
헛소리. 저 엘프가 변종인지는 몰라도 그는 바비룬의 부관이었다.
‘더러운 놈들.’
세상을 좀먹는 마왕군.
퉤
용병 중 한 명은 드리아스를 향해 가래침을 뱉었다.
철퍽.
드리아스의 뒤통수에 진득한 침이 떨어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시선이 마주했다.
하지만 드리아스는 이 용병을 볼 수 없었다.
그의 눈가에는 핏기가 가득했다.
음이 눈알을 베어버린 것이다.
그것뿐만일까. 플라금의 군인들도 투입하여 드리아스를 난도질했다.
그럼에도 아직 안 죽었다.
곧 죽지만 아직은 살아있었다.
그것이 소름 돋았다. 이질감이 들었다.
음이나 듄보다도 더욱이 징그러운 저 끝없는 생명력의 근간이 무엇인가.
고민할수록 혐오감만이 가득 찼다. 굳이 숨길 이유도 없었다.
“너 하나 때문에 인간과 엘프의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지겠군. 존재 자체가 민폐덩어리. 빨리 뒈지지그래?”
드리아스에게 말을 건넸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퍼석
그대로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발로 뒤통수를 짓밟은 것이다. 피가 흙에 엉켜 덩어리졌다.
꾸우욱
체중을 싣는다.
드리아스는 아무 말도 않고 고개를 처박고만 있었다.
그때 듄이 용병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자극하지 마.”
“...죄송합니다.”
경고라기엔 다소 상냥한 말투.
이 용병이 어째서 이리 행동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왕군에 의해 죽어났던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다.
수많은 생명이 죽었고, 이 용병의 경우에는 하나뿐인 여동생이 바비룬이 이끄는 마수 군단에 먹이가 되어 죽었다. 그의 눈앞에서 말이다.
그 군단에 선두에 있던 자가 드리아스였다.
그가 발치에 있었다. 당장 검만 휘둘러도 죽일 수 있었다.
이성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끓어오르는 살의를 겨우 참아내며 물러섰다.
그를 말렸던 듄 또한 표정이 착잡했었다.
더욱 서글픈 사실은 원한을 가진 것이 방금의 용병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여자만큼은 내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는데... 제길, 제길!”
“씨발년, 씨발년! 이 갈아마셔도 모자른 년이 내 형을 찔러 죽였어. 형태도 알아볼 수 없게끔 난도질을 해놨다고!!”
다키아를 향한 말들이었다.
시커멓게 타올라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숯덩이가 된 그녀.
워 울프가 단숨에 그녀를 폴암으로 짓이겨 죽였다.
그게 전부였다.
그렇다고 원한이 사라질리 없었다.
사실 본인이 죽였어도 그 한 깊은 원한은 갈 곳 없을 것이다.
복수 끝에 남는 것은 허망함 뿐이니까.
늑대의 용병들, 그리고 이 경기를 지켜봤던 관객들도, 플라금의 군인들도.
이들 중 마왕군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그야 당연했다. 악쿤 토든의 지시에 따라 전국, 전대륙을 휩쓸고 다녔으니.
마왕군의 악명을 그칠 줄을 몰랐다.
그 사악한 집단의 고위 간부들이 이곳에 있다.
독수리의 경기장은 갈 곳 없는 원한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바비룬은 아직 살려둬야 된다고 했던가.”
그를 착잡하게 바라보던 워 울프가 폴암에 묻은 피를 닦았다.
“네, 인질 교환을 신청해야죠.”
이것이 바비룬을 살해하는 것이 아닌 포획했어야 하는 이유였다.
괴물 같던 놈인지라 워낙 힘들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한계는 있었다.
제압에 성공했다. 실제로 지금은 미동 조차 않고 조용히 고개를 처박고 있다.
죽은 것은 아니고, 잠시 기절한 상태일 테지.
그의 놀라울정도로 넘쳐나는 기, 마나, 생명력이 그것을 설명한다.
“그럼 저 인간 마법사는 어쩔 텐가.”
다키아는 죽었다.
스프라임도 곧 죽는다.
워 울프는 디안을 가리킨 것이다.
외상이 짙지는 않지만, 마력이 모두 바닥나 움직일 수도 없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야 여유가 생겨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사파이어처럼 푸른 머리칼과 눈동자.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장보다도 어려 보였다.
‘지혜와 비슷할 나이겠구나.’
그래도 달라질 건 없다.
무고한 이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했던 마왕군이다.
더군다나 본인이 가장 증오하는 악쿤의 부관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잿더미로 만들고 싶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마나가 바닥이 난 디안, 항마력도 자연스레 낮아졌을 터.
불길로 어루만져주면 그녀의 살갗은 시뻘겋게 익고, 검은 연기와 오징어 탄내를 토해낼 것이다.
그때의 악쿤의 표정을 너무나도 보고 싶다.
하지만.
“저자는 아직 놔둘 생각입니다. 물론 몰래요.”
“악쿤에게서?”
“예.”
그가 과연 바비룬과 빈을 얌전히 교환해줄지도 확신이 없어서 그렇다.
뿐만일까, 악쿤이 이곳에 등판했을 때 과연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감이 안 잡힌다.
어쩌면 마왕군 패배에 격분하여 이곳에 거대한 얼음 구체를 마구잡이로 떨어트릴수도 있는 일이다. 바비룬을 신경도 안 쓴 채 말이다.
그래서 디안이라는 카드를 아껴둘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보험이었다.
디안 정도라면 마왕군에서도 상당한 실력자일 터.
그 전력이 아쉬워 악쿤은 장을 섣불리 공격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력을 강제로 억누르는 마도구도 많다.
그러니까 최상의 시나리오는.
바비룬은 이번 교환 카드로 쓰고,
디안은 다음을 위해 아껴두는 것이다.
“흠...”
워 울프는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의중을 분석할만큼 시간 여유가 있지는 않은 터라 디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마법 용사.”
“말할 힘이 있나?”
“그럼요.”
퉤
장의 얼굴에 침을 뱉으려했으나 잽싼 몸놀림으로 피해낸 터라 신발에 묻었다.
장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가 오른팔로 그녀의 머리칼을 강하게 붙들었다.
“끄윽”
그리곤 바닥에 내팽겨쳤다.
마나도 없는 몸이다. 허수아비처럼 쉽사리 그녀는 자빠졌다.
플라금의 군인들이 넘어진 그녀를 일으켜세우고 건물 안쪽으로 들어섰다.
이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마왕군은 이제 바비룬만이 유일했다.
장은 다시 워 울프에게로 걸어왔다.
디안마저도 처리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 무어라 말하려다가 워 울프는 애써 참았다.
대신 다른 주제를 꺼냈다.
“약속한대로 이 독수리 길드의 재산 등은 늑대가 도맡겠다.”
이것이 워 울프를 비롯하여 늑대 길드 전체를 고용할 수 있던 근거이자 의뢰 비용이었다.
독수리는 용사의 앞길을 막았고, 더군다나 마왕군과 내통했다.
그것만으로 독수리를 처부술 대의명분은 완성됐다. 그 중심에는 용사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자유 도시 달리아락, 법이 없는 곳.
자유로웠던만큼 위험이 드사린다. 독수리를 지켜줄 울타리 따위는 없었다.
약탈? 아니, 승리하여 얻어낸 전리품이다.
독수리의 날개는 늑대의 송곳니에 찢겨졌다.
이제 이 투기장을 비롯한 독수리의 건물은 늑대가 관리하게 될 것이다.
“...알겠어요. 근데 좀 나중에 다시 얘기하실까요.”
“확실히...”
쩌어어억
그 지분에 대한 얘기도 잠시, 허공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차원문이었다.
“전투 태세를 취하라!”
“모두 모이세요.”
워 울프와 음이 소리치자 용병과 군인이 차원문에 창과 검, 총을 겨누며 대형을 이뤘다.
꿀꺽.
그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올 게 왔구나.’
긴장의 끈을 강하게 붙들었다.
저 너머에서 건너오는 존재는 장에게 있어서 트라우마나 다름 없었다.
케일은 코를 틀어막았다. 머잖아 거대한 악취가 날 것이다.
그 악취가 가시화된 것처럼 시커먼 기운이 차원문 주변을 휘감는다.
그리고 알아챌 수 있었다. 곧 나타나는 존재의 것과 자신의 오러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이게 무슨 추태인지.”
푸른 로브, 새하얀 정장을 입은 사내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난폭한 표정을 지으며 차원문 건너로 나섰다.
그의 뒤에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와이번이 하늘을 그림자로 뒤덮었고, 오우거들이 대지를 뒤흔든다.
“아...... 둘 다 죽었구나......”
그 오우거의 선두에 있는 자는 시커먼 갑옷을 입은 채 대검을 들고 있었다.
표정은 밝지 못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곤 절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참모장 악쿤 토든과 군단장 다르칸이었다.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용사도 각기 무기를 꽉 붙들었다.
“흠......”
악쿤의 시선이 장에게 머물렀다.
그러다 살짝 고개를 돌렸다.
디안이 끌려갔던 건물이었다.
“어설픈 것들은 마무리도 어설픈가.”
그는 중얼거리다가 왼손을 건물로 향했다.
“{ Ελευθρωση 방출 }”
그의 마법진이 고속으로 회전한다. 룬어를 읊음과 동시에 마법진은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 마법진은 무언가를 토해내지 못했다.
회전의 속도가 늦춰진다. 악쿤이 조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 회전은 완전히 멈췄다.
반대쪽에서 마법진을 끌어당기듯 부자연스러웠지만 결국 멈췄다.
“{ Ματαωση 캔슬! }”
장의 마나가 악쿤의 마법진에 간섭했다.
멈춰버린 마법진은 검게 물들기 시작했고, 아래에서부터 조금씩 부서져내려 안개처럼 사라졌다.
악쿤은 마법진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누가 어설프다고?”
그곳에는 화염을 의인화 한 것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장이 있었다.
이건 허세였다. 마지막 마나를 짜내어 자신은 괜찮다는 듯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오호... 이제 7서클이 되었구나.”
“계속 그렇게 내려다보다간 언젠간 내 마법이 널 불태울 거다.”
“메일리에서는 분명 5서클이었는데... 역시 전송자는 전송자라는 건가.”
“깔보지 말라고 방금 말했을 텐데?”
“상당히 날이 서 있군. 하지만 내가 네놈의 상태를 모를까.”
쩌적 쩌저적
하늘에 둥그렇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와이번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건물 위에 자리잡고 습격할 준비만을 하고 있으니.
다르칸이 신호를 보내는 순간 저들은 브레스를 내뿜으며 하강할 것이다.
그때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될 것이다. 그 지경까지 가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둥그렇고 커다란 그림자는 와이번의 것이 아니었다.
더한 위협이, 상식을 벗어난 방대한 마력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싸아아아......
악쿤의 마법진이었다.
그 마법진의 회전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회전시키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절망하라는 뜻이었다.
“알고서도 역산할 수 없을 테지. 네놈에겐 남은 마나가 거의 없거든.”
장을 비웃듯이 말했다.
하지만 용병들과 군인들의 표정이 장보다도 더욱 절망적으로 물들었다.
저런 마법이 폭격되면 모두가 얼음에 매장당할 것이다. 막아야 한다.
워 울프와 음은 무기를 고쳐잡고 악쿤에게 달려들고자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그 앞에는 다르칸이 시커먼 오러를 풀풀 풍기며 떡하니 지켜서고 있었다.
방해하지 말라는 듯 검을 바닥에 꼽은 채 무표정으로 이들을 눈에 담고 있다.
“내게 거래를 요구하려던 것 같더군. 바비룬과 궁술 용사를 교환하자고?”
악쿤이 하늘에 마법진을 휘감은 손을 든 채 말했다.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말이야... 이런 생각은 못 해봤는지 묻고 싶다.”
마법진이 빛난다.
방출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는 신호다.
“내가 이 자리에서 그대들을 모두 죽인다면 과연 거래가 성립되겠냐는, 그런 생각 말이다.”
“공격해!!”
이판사판이었다.
워 울프와 음, 그리고 케일이 악쿤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때 다르칸이 발을 굴렀다.
끼에에에!!
그에 맞춰 와이번들이 지상으로 내려와 불을 뿜기 시작했고, 오우거들도 땅을 울리며 이들의 앞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용병들과 군인들도 그들에게 맞서기 시작했다.
투기장에는 다시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카가각!!
음의 검과 다르칸의 대검이 맞닿는다.
오러도 오러거니와 근력에서부터 밀렸다.
음의 발이 땅에 질질 끌리기 시작했다.
다르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니, 조금은 슬퍼 보였다.
“많이 컸구나.”
“...봐주는 겁니까?”
“아니, 그럴 여유는 없어서...”
콰앙!
음을 근력만으로 밀쳐내고 왼손을 뒤로 휘둘러 무언가를 붙잡았다.
케일의 클리브 솔리스였다. 그 검을 맨손으로 콱 붙들곤 케일을 바닥에 짓누르기 시작했다.
“네가 검술 용사구나.”
“군단장 다르칸!”
“클리브 솔리스... 끔찍한 검이야.”
투웅
워 울프가 가세했다.
그의 폴암이 대지를 찍었고, 다르칸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덕에 케일은 물러날 수 있었다. 그리곤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맨손에 검이 깨질 뻔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클리브 솔리스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 질렀다.
‘아파! 아파!!’
“미안해. 하지만...”
그렇더라도 저들을 놔둘 수는 없다.
이대로 전면 전쟁이 붙게 되리라는 것도 염두했었다.
최악의 시나리오이지만, 어떻게든 솟아날 구멍은 있을 터.
시간은 용사의 편이었다. 서서히 마왕군을 타도하고자 북대륙의 원군이 도착하고 있다.
하지만... 마법이 시전되자 그 희망은 파도 앞 모래성처럼 부질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 πγο μετωρο 얼어붙은 운석 }”
거대한 얼음 구체가 대련장을 향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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