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투기장
* * *
[충격! 대충격!! 가면무도회의 정체는 마왕군이었습니다!! 사천왕 바비룬 필라이트를 필두로 한 그들의 부관이 용사를 제압합니다. 어째서 그들이 투기장에 참여한 거죠? 용사를 죽이기 위해?!]
자극적인 말을 뱉자 관객은 더욱 열광한다.
한편으로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용사와 마왕군의 전투를 배팅하며 볼 수 있다는 것은 이들에게 있어 죽음과 맞바꿔도 될만큼의 거대하고 가슴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리를 비우는 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설령 비우더라도 다른 관객이 채운다. 전세계적으로도 이번 투기장 결승은 이슈가 되고 있었다.
마왕군을 붙잡기 위해 북대륙과 동대륙에서 인원도 파견하고 있다는 소식을 방금 막 접했다.
알겠단 대답을 남겼다.
그러자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피할 수가 없구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워 울프는 눈길도 주지 않고 부하들에게 통보했다.
“다녀올 곳이 있다. 자리 잘 지켜.”
“투입은 언제 합니까?”
“내가 신호를 줄 거다.”
“그 신호라 함은”
말이 끝나기 전, 이미 워 울프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향하는 곳은 투기장의 꼭대기였다.
‘무슨 생각인 건지.’
슈가리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경기를 보고 있었다.
이번 투기장에 검은 촛불이 상품으로 나온 것은 그녀의 자의가 아니다.
에이브(AYV)의 뜻이었다.
알고 있다. 워 울프 또한 실렉티스였으니까.
그가 슈가리아에게 품은 의문점은 다른 것이었다.
이 투기장과는 상관 없다. 예전부터 품어왔던 것들이다.
“오랜만이야.”
벌컥 문을 열었다. 강인한 기척을 느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슈가리아는 초췌해진 얼굴로 워 울프를 맞았다. 흘깃 그를 보다가 시선을 다시 경기장으로 향하며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 용사가 불렀어?”
“그래.”
“검은 촛불도 당신 소행이야?”
“그래.”
“...나한테서 얼마나 앗아가려고.”
“모두 다. 네가 데려간 아쿠아와 지금 이 길드까지 모두 다 돌려받을 거다.”
아쿠아의 이름이 나오자 그녀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그녀는 거칠게 뒤돌았다. 그걸 왜 자신을 탓하냐고 물어보려다가 워 울프의 눈빛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그의 눈을 더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
“내 뜻은 너한테 닿지 못했다는 거군.”
“그건 영감탱이나 미련탱이나 똑같잖아.”
“그랬더라면 이번 투기장에 나오지도 않았겠지. 물론 미련한 짓이었다만.”
헤인켈의 얘기였다. 그 얘기를 듣자 슈가리아는 숨이 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검은 촛불을 가져갈 생각이었다고? 사천왕을 물리치고 용사를 물리치고?”
“그랬겠지.”
“헛소리야.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거잖아.”
“허락은 했었지.”
“그걸 순순히 믿는 머저리가 어디 있어.”
“상관 없지. 언제까지 맞출 생각도 아니었으니까. 비록 오만하고 교활하고 역겹지만, 그는 그날 이후로 생각을 바꾼 적 없었다. 눈앞에서 베이플을 잃었는데 복수심이 안 생기면 그거야말로 이상하지.”
과거를 회상했다.
헤인켈, 슈가리아, 워 울프, 그리고 현재 북대륙의 총독인 벡터.
그리고 이들을 이끌던 베이플.
베이플은 죽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아쿠아가 남았다.
하지만 큰 의미는 없다.
이들에게 남은 건 허망함 뿐이었다.
그걸 채우기 위해 정상에 서고자 피땀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
한 대륙의 총독, 대마장, 두 거대 길드의 수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슈가리아는 이곳에서 안주했다.
워 울프는 앞을 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은 마주했지만 바라보는 곳은 달랐다.
그를 느끼자 자괴감이 밀려온다. 애써 삼키며 워 울프의 시선을 흘리자 그는 말했다.
“너는 도대체 뭘 향해 여기까지 달려온 거냐.”
“...생존.”
“더 산들 의미가 있을까. 발버둥이나 쳐보자는 거였다.”
“벡터는 뭐라는데.”
“그도 나와 뜻이 같다.”
“......”
“너는 이제 아니구나.”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담았다.
그녀는 책상 밑에 몰래 석궁을 장전하다가 말았다.
각 길드의 수장이었다.
둘의 힘은 비슷했었다.
그래서 결과는 더욱 뻔했다.
슈가리아의 화살은 이제 누구에도 닿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날의 과거에 머물러있다.
석
그녀의 시야가 핏빛으로 물든다.
착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워 울프가 보인다.
시야가 기울어진다. 퉁 눈이 감긴다. 졸음이 쏟아진다.
왜인지 편했다.
이제야 이 속박에서 벗어나는구나.
이번 투기장을 관리하는 길드장이 이번 그녀의 역할이었다.
나름 완성했다. 바비룬에게 한 방 먹여주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저, 저걸...”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어 손가락으로 책상 위 편지를 가리켰다.
누구에게 보낼 건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편지 정중앙에 쓰인 마크에는 물방울이 있었기에.
“수고 많았다.”
“......미안해.”
“조만간 보자고.”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머잖아 절망으로 물들었다.
멀어져가는 워 울프에게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러다 말았다. 손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래, 어차피...’
안주하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치욕적인 죽음마저도 어째서인지 편안했다.
베이플의 곁으로 가는 거니까.
쿵
문을 닫고 나섰다.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뇌리에 들려온다.
역겨운 년.
[잘 해결했나요?]
카넬루아, 요정족의 여왕이자 에이브(AYV)의 앞잡이.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슈가리아를 죽였고, 이제 차차 마왕군을 적당히 몰아내며 용사를 구하겠다고.
그녀는 알겠다 대답했다.
그리곤 머릿속 무언가가 툭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다른 자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씨발년.”
저절로 입술이 달싹인다.
이곳에서 옛 동료가 죽었다.
옛 동료를 죽였다.
옛 동료의 유일한 혈족은 팔려갈 것이다.
그게 그분의 뜻이기에.
“나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한단 말인가.”
비단, 카넬루아만이 원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가장 죽이고픈 것은 당연히 이 세계를 관장하는 신이다.
[격투 용사의 팔이 잘려나갔습니다! 아아, 이대로 세계는 멸망하는 것인가?]
요란스러운 사회자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폴암의 뒷부분으로 유리창을 박살냈다.
와장창! 유리 파편에 맞은 이들을 제하곤 워 울프를 눈에 담지도 못했다.
창문에 걸터앉아 상황을 살폈다.
퀸은 팔이 잘려나갔다. 바비룬이 홧김에 저지른 것이다.
케일은 비교적 멀쩡하다. 조금 지친 것 같기는 하다.
장은 검은 촛불을 개방했다. 생각보다 참모장 부관에게 애먹은 듯하다.
그래도 제압은 완료했다. 꽤나 지친 것 같기는 하다.
듄은 뭐... 알아서 살 것이고.
우선순위를 살필 시간이다.
경기장에 있는 8명이 눈에 들어온다.
저들 중 누굴 죽여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도 지긋지긋해졌다.
이제는 지쳤다. 슈가리아의 눈에는 미래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을까?
무슨 소리야, 앞에 기다리는 것은 파멸뿐인데.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슈가리아는 현실에 탄복했고,
워 울프는 현실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가장 지쳐보이는 저 여자부터.”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
“자비라도 베푸시는 건가요?”
“닥쳐.”
아콜드의 서에서 나온 마력이 디안의 몸을 휘감고 있지만, 그녀는 전투 불능이다.
마력 탈진 증세 중 하나인 마비, 디안은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마법진은 커녕, 간단한 룬어를 발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저 대화나 나눌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다른 이가 와서 구해주길 기도하는 수밖에.
“검은 촛불은 어떻게 얻은 거죠?”
“말해줄 이유가 있나?”
“얄미우시네...”
“내 눈에 너가 딱 그랬어.”
디안도 인질로서의 가치가 충분했다.
마왕군의 2인자는 악쿤이다. 그의 부관이니 바비룬 포획이 실패한다면 디안과 빈을 교환하자고 요청해봐도 될 것이다.
그러니 아직 죽일 수는 없다.
장은 무거운 몸을 이끌며 퀸과 케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두근
그때 마나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퀸의 마나였다. 그녀의 난폭한 마나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뭐지?”
저 멀리에서 누군가의 괴성이 들려온다.
동시에 거구의 호랑이가 포효했다.
“상황이 이상한 것 같아.”
괴성은 아마 케일의 것이었다.
그리고 퀸이 마나가 요동친 것도 마음에 걸렸다.
마나가 폭주한 것일까? 아니면 목숨에 위협이 왔었나?
뭐가 되었건 상황은 좋지 않다. 장은 마나를 다리로 흘려보내며 이들에게로 다가갔다.
바비룬에게 가까워질수록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퀸의 마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결국 마주했다. 케일은 퀸을 뒤로 보내고 바비룬에게 맞서고 있었다.
“오빠!”
케일이 울먹이며 말했다. 바비룬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 털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케일 뒤에 피투성이가 된 퀸을 보자 장은 말이 없어졌다.
[디안이 졌구나.]
“{ λκο φλγα 화염 늑대 }”
[매너라고는 없는 새끼네.]
시커먼 화염이 바비룬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케일의 얼굴에 약간의 화색이 돋았다.
검은 촛불을 사용한 것이다.
시기가 왔다는 거겠지. 이제 바비룬을 붙잡을 일만 남았다.
분명 상황이 완화됐다.
하지만 장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가득했다.
그는 케일과 퀸에게 물었다.
“바비룬 짓이지?”
[아, 미안. 홧김이었어.]
대답한 것은 바비룬이다.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부은 꼴,
마치 죽이려면 진작에 죽일 수 있다는 듯 거들먹거리는 그것이 장의 눈에는 너무나도 역겹게 보여서, 이 자리에서 바비룬을 어떻게든 쓰러트려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무작정 달려들어선 곤란했다.
혹여나 바비룬 제압이 어려울 경우를 대비한 계획을 따로 세워두었던 것이다.
그 계획으로 가야 했다. 큰 전력인 퀸이 커다란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 근거다.
‘참자... 참아야 해......’
바비룬과의 격차는 알고 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디안을 상대로 얼마나 고전했는지 결코 잊지 않았다.
검은 촛불이 있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
적어도 8서클에는 도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1 대 1로 싸워줄 생각도 없었다.
일단 적당한 서클의 마법을 던지며 묶어두는 것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그가 와야 계획이 시작된다.
그때였다. 쩌적 무언가에 균열이 생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장와 케일, 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케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장은 그녀에게 턱짓하며 말했다.
“지혜야.”
쩌적 쩌저적
금 가는 소리는 여전히 들린다.
그 소리의 간격은 점차 짧아지고 있었다.
“네 오빠.”
“퀸 데리고 일단 피해.”
“나, 나 아직 할 수 있”
“시끄러워. 지금이면 팔 붙일 수도 있으니까 나 믿고 빨리 이곳에서 나가.”
그 대화를 듣다가 바비룬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앞발톱으로 장을 가리켰다.
[무슨 놀이공원 왔냐? 여기 이공간이야. 안에서는 못 부숴.]
“나도 알아 씨발아.”
[허이구, 욕도 할 줄 알아 단발 소년?]
화르륵!
그의 도발을 무시하며 마법을 던졌다.
가소롭다는 듯 그 마법을 대놓고 맞으며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에 맞춰 장도 마력을 다리로 끌어모았다. 전력으로 달려나가며 시간을 벌기 시작했다.
콰직
균열이 커지는 걸까? 소리가 조금 달랐다.
바비룬의 몸이 잠시 멈췄다. 그는 하늘을 바라봤다.
[...뭐냐?]
쩌적 쩌저적
경기장의 하늘에 균열이 생겼다.
균열은 거대해진다.
“왔구나.”
콰장창!!
균열이 깨지고 경기장이 파괴됐다.
다시 독수리 길드의 그곳이 나타났고, 사회자와 관객은 일순 당황하며 혼비백산하게 도망치기 시작한다.
[...정윤상 짓은 아니고.]
바비룬의 어금니에 박힌 이가 이글거린다.
그는 상념에 잠겨 있다가 수많은 생명력에 반응해 주위를 둘러봤다.
“...수호 대장.....”
스프라임의 온몸에 칼이 꼽혀 있었다.
그 칼을 꼽은 자들 중 가장 선두에 있는 자의 얼굴은 익숙했다.
“......”
반면 그의 옆을 지키던 다키아는 미동도 없었다.
화륵
대신 등에서 화염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머리칼을 비롯해 모든걸 불태우며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그 화염의 주인 또한 아는 얼굴이었다. 바비룬의 눈매가 사납게 변한다.
[크르르륵.........]
본능에 가까워진다.
스프라임에게 칼을 꼽은 음과 다키아를 불태우고 있는 워 울프는 말했다.
“괜찮나요 퀸, 케일?”
“화가 많이 났구만...”
크르르륵!
바비룬이 워 울프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때 바비룬의 몸 전체에 각기 다른 크기의 마법진이 수십 개가 생겼다.
“{ αλυσδα 사슬! }”
한 남성의 구호에 맞춰, 마법진의 빛들이 더욱 진해진다.
촤라라락! 사슬이 튀어나와 바비룬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곤 쿵 바닥에 강제로 눕혔다. 몸부림쳤지만 더 많은 사슬이 튀어나올 뿐이었다.
“의뢰대로 포획 완료.”
워 울프가 장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팀명 용사는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장의 오른손에 커다란 마법진이 이글거린다.
퀸의 왼손에 오러와 마나가 뒤섞이며 붉은 형태를 구현한다.
케일의 검이 찬란한 오러에 휩싸인다.
이들의 마법진, 건틀렛, 검이 빛을 뿜었고, 그것들은 일제히 바비룬에게로 날아갔다.
......쿠구구구............!!!
경기장 전체가 흔들렸고, 독수리의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