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은 돌고 돈다-99화 (99/152)

〈 99화 〉 투기장

* * *

[마법 용사 장의 마법이 경기장에 작렬!! 수준 차를 극명확하게 보여주며 첫 번째 경기에서 승리를 거머쥡니다!! 16강에 올라가는 건 팀명 용사입니다!!]

환호성과 야유가 겹친다. 장과 기넨의 모습은 승리자라기에는 너무나도 만신창이였다.

‘이겼어. 하지만...’

우측 어깨의 출혈이 상당하다. 새어나오는 피만큼이나 자신감도 같이 주르륵 새어나가는 것 같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몸만큼이나 표정 또한 승리자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과 기넨은 대기석으로 가기 이전 치료를 받고자 빛 마법을 사용하는 의사에게 갔다.

돌팔이로 정평이 자자하지만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다행히 얼마 안 가 출혈은 멈췄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으니,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나을 상처이기도 했으니.

경기는 반나절이 넘게 진행되었고, 1차 경기는 조의 절반이 마쳤다.

‘더 강해져야 돼. 그따위 잡술수에 당할 수준이라면 서클이 무슨 상관이 있겠어.’

장의 내면은 본인에 대한 혐오로 가득 찬 채였다. 악쿤을 죽이겠다며 복수심에 타올랐던 그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침대에 팔을 교차하여 머리를 받힌 채 누워 생각에 잠겨 있었다.

똑똑­

그 생각이 먹구름이 걷히듯 싹 사라졌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조용히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케일 아니면 늑대의 용병이지 않을까.

아직 피곤을 떨쳐내지 못 했다. 빨리 내보내야겠다며 문고리를 돌리고 당겼을 때,

“초면이죠?”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굉장히 거슬리는 그 특유의 하이톤.

장은 습관적으로 룬어를 읊다가 겨우 참아내었다. 눈앞의 여성은 그만큼이나 원망스러운 자였으니까.

모래를 떠올리게끔 하는 푸석푸석한 황색의 단발, 예쁜 유리구슬 같은 붉은빛 눈동자.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고, 그 로브에 달린 모자를 벗자 더욱 확신이 들었다.

장이 아는 그녀가 확실했다. 그녀는 애교살 가득한 눈을 초승달처럼 만들곤 빙긋 웃었다.

“반가워요.”

“무슨 용건입니까? 저희가 밀담을 가질 만큼 사이였던가요. 길드장님.”

“길드장님은 너무 딱딱한 호칭이잖아요. 슈가리아.”

그녀의 본명. 으로 알려져 있지만, 무척이나 베일에 쌓인 인물이기에 신뢰가는 정보는 아니었다.

장은 문을 닫았다. 아니, 닫으려고 했다. 그 틈 사이에 슈가리아는 손을 집어넣었고, 문틈 사이로 기묘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너무 문전박대하는 거 아니에요? 야심한 시각에 여성이 남자 방을 찾아왔는데... 혹시 그쪽은 아니죠?”

“헛소리. 얌전히 돌아가시죠. 고자든 동성애자든 그쪽 알 바 아니니까.”

“비싸게 구신다 정말~ 저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많다. 정말 많다.

길잡이도 없이 시련의 던전을 어떻게 찾아낸 것이며, 또한 어떻게 그 던전을 공략한 것이며,

검은 촛불을 어째서 회수한 것이며, 그걸 제공하긴커녕 투기장 우승 상품으로 내걸 생각은 누구 머리에서 나온 것이냐. 등등, 그녀의 속내가 궁금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표정은 호기심이 가득한데? 손 좀 치워봐요.”

손에 힘줄이 드리웠다. 차가운 밤공기가 손잔등을 스친다.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자존심이 참 강하다~ 가끔은 숙일 때도 필요한 건데.”

“숙이면 뭐가 달라집니까? 검은 촛불을 가져올 것도 아니잖습니까.”

“왜요? 가져올 수도 있는 거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어라, 후회할 텐데.”

그녀는 재빨리 문틈에 발을 끼워 넣었다. 여유가 생긴 손으로 코트 안쪽에 있는 물건을 꺼냈다. 장의 표정이 급격히 바뀐다. 분노와 짜증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혹감?

“이제 얘기할 마음이 생겼어요?”

“...속셈이 뭡니까.”

“우리 잘생긴 단발머리 아저씨랑 얘기하는 거.”

슈가리아의 손에 들린 건,

평범한 촛대였다. 하지만 심지에는 이리저리 흔들어도, 스산한 밤바람이 거칠게 스치고 지나가도 결코 꺼지지 않고 조용히 타오르는 검은색 불꽃이 있었다. 검은 촛불, 마법 용사 장의 아티팩트.

“어라 생각보다 넓진 않네? 돈 많잖아요, 좋은 숙소 좀 쓰세요~ 뭣하면 내 방에서 자도 되는데.”

“......”

“실례할게요~”

슈가리아는 기어코 방에 비집고 들어왔고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은 닫혔다.

그 문은 다음날 1차 경기가 벌어지기 전까지 열리지 않았다.

*

하루가 지나, 어제자 치뤘던 경기와 오늘자 이뤄지는 경기를 보고 분석해야 할 시간이었다.

아직 경기는 시작하기 전이다. 패이가 마나로 모니터를 조작하며 어제자 1경기를 제한 모든 경기의 녹화본을 틀었다.

눈에 띄는 경기, 담아둬야 할 경기는 없었다.

킬러 형제만큼이나 권모술수를 발휘하는 용병은 많았지만, 상대방도 똑같은 자들이었기에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이었다. 가히 암거리 투기장에 어울리는 듯한 추잡한 싸움. 전투라고 불릴 것이 못 되는 급 낮은 것들.

“올해는 용사라는 이름값 때문에 기권패가 좀 많나? 견제되는 팀은 정말 하나도 없네요. 내일 게임이 뭐든 참가자들 수준이 이 정도라면 크게 긴장할 필요는 없겠어요.”

패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다음 경기도 수준이 비슷하다면 방심하지 않고서야 우승은 이견 없이 용사 일행일 것이다.

“어, 오늘 1경기 시작하네. 다들 화면 보소.”

듄이 우락부락한 근육을 꿈틀거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를 뱉었다. 조명을 난반사하는 머리에 케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전히 너구리 가면을 쓰고 있는 사회자. 옷차림은 조금 바뀌었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똑같았다.

[오늘자 첫 경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참가자에 조금 변동이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그가 조금은 신경 쓰이는 말을 뱉었다. 장이 움찔하며 반응하였다. 다른 경기는 하품을 연신 내뱉으며 지켜봤던 그가 조금은 긴장한 몸짓으로 화면으로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기권하는 팀이 나왔더군요. 하지만 별로 아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이 암거리에 몸 담군 지 10년이 가까이 되어가는데, 한 번도 이름을 들었던 적 없던 사람들이었거든요. 어차피 경기력도 그저 그랬겠죠.]

[하지만 대체되는 팀은 아, 정말이지 다릅니다. 느껴지는 아우라? 그런 거 아시죠? 마나나 오러 같은 게 아닙니다. 저는 그런 거 느끼지도 못하고요. 하지만 사람이 착­! 하거나 번뜩­! 하고 느낌이 올 때가 있잖습니까? 육감! 그래, 잘 말해줬어요. 육감이라고도 하죠.]

[그게 오더라고요. 어라 말하고 보니까 촉이라 말하는 게 나았으려나? 아무튼간에, 이번 참가자는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영양가 없는 얘기를 실컷 떠들고 난 다음에야 뒤바뀐 참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팀명은 가면무도회! 이분들은 외견처럼 하나같이 베일에 쌓인 인물들입니다!! 팀원은 총 4명! 이번 잔을 채워라 경기에 출전하는 2명 또한 모든 정보가 오리무중!]

장과 기넨이 등장했던 곳에서 새카만 로브에 사회자처럼 특이한 동물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집으로 보아 남성과 여성이었다. 화면 너머인지라 아우라 같은 건 느낄 수가 없었다.

“장 씨? 낯빛이 왜 그러세요.”

허나 누군가는 저 수수께끼의 참가자들을 보곤 예민하게 반응했다.

다른 게 맞물린 것이라기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멀쩡했던 장이었다. 모두가 의구심을 띄우고 장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이 장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아, 배가 좀 아프네요. 잠시...”

끝내 시선을 버티지 못 하고 전략실에서 비틀거리며 나갔다. 가면무도회라는 팀을 본 순간부터 어딘가 불안한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게 척 봐도 눈으로 보였고 그것은 복통과 연결되었는지, 그는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로 걸어갔다.

“...나도 잠시.”

퀸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화장실로 가는 길은 우측으로 두 번 꺾으면 나온다. 하지만 장은 한 번만 꺾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기척을 지우고 은밀히 그 뒤를 따랐다.

“제 말이 맞죠? 아직도 모르겠으면 직접 특등석으로 움직여도 돼요.”

퀸은 벽에 바짝 붙었다. 장에게 말을 건네는 여성의 목소리는 언젠가 들어봤던 낯익은 것이었다.

“지금 투입해도 되잖습니까. 왜 내버려두는 거죠?”

“말했잖아요. 이건 덫이라고. 사냥감을 잡으려면 미끼를 놓아야죠.”

“어제도 말했지만 아직 전 당신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저도 어제 말했지만, 마법 용사님을 신뢰하지 못한답니다? 킬러든 뭐든 떨거지들한테 당하는 수준인데 무슨 큰일을 도모할까요.”

“...도발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겁니다.”

“도발이라뇨, 제가 마법 용사님을 도발해서 얻는 게 뭐가 있죠? 기억을 잘 더듬어보세요. 전 언제나 호의적이었답니다. 우리 길드에 극빈으로 모시고자 기차표까지 손수 끊어드리고 사람도 보내서 마중까지 나갔고, 식사도 대접하겠다 했는데 모조리 거절한 건 당신들 아니었나요?”

말하는 내용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는 특유의 비꼬는 듯한 말투, 하이톤의 목소리, 대화의 맥락도 살펴보면 장과 대화하는 자는 독수리의 길드장 슈가리아가 틀림 없었다.

퀸은 대화에 더 귀를 기울였다. 혹시 모를 경우도 대비하여 아티팩트까지 천천히 소리가 들리지 않게 장착하면서.

“그만큼 당신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는 말이죠. 됐으니까 지금 주시죠. 제가 직접 기습에 나설 테니까.”

“그건 안 되겠는데요.”

“어제랑 얘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당연하죠. 여긴 제 식구들이 먹고 사는 구역이에요. 장소와 시간을 정할 권한은 제게 있어요. 지금 건네드렸다가는 피해자가 속출하겠죠. 대피 방송을 했다간 물고기가 도망갈 테고.”

물고기, 기습, 피해자가 속출?

단어들을 조합하며 주제를 유추하고 있었다. 그때 복도에서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는 걸 보았다. 퀸은 본능적으로 한쪽만 끼워진 건틀렛에 마나와 오러를 섞어 휘감으며 그에게 반응했는데, 곧장 후회했다.

“검둥이?”

“끼에? 끼에에?”

그림자의 끝에는 조그마한 흑룡이 있었다.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뱉었는데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있나요?”

“퀸?”

“...”

장과 슈가리아가 당혹스러운 눈길로 이들을 바라본다. 정작 일을 벌린 다타리오는 애교를 부리며 장의 머리에 올라탔다.

‘아뿔싸.’

퀸은 이들의 시선을 피하며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이기장.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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