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투기장
* * *
등장부터 남달랐다. 이름값이 있으니 당연한 거였다.
[용사가 참여하는 투기장! 여지껏 본 적이나 있었습니까?! 소개합니다, 전송자이자 마법 용사 장입니다!!]
와아아아!!
함성에 귀가 먹먹하다. 묘한 긴장감도 흐른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소개는 마치 악당이라도 나온다는 듯 야유가 가득했다.
[그의 곁에는 들개 길드... 아차, 들개가 아니라 늑대이군요? 이런 실수를 하하하! 아무튼 기넨입니다!]
우우우우
장은 기넨의 반응을 살폈다. 역시나 밝지는 않았다.
“기넨 씨도 유명인사네요. 저랑 다른 의미로.”
“농담도 할 줄 아셨군요. 제 이름은 아무도 관심 없습니다. 늑대 길드라는 게 중요하죠.”
불순물도 이런 불순물이 없다. 독수리 길드가 개최한 투기장에서 늑대가 등장하다니.
하지만 분위기의 과열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야기가 진행되려면 악역은 존재해야 한다. 기넨이 그 악역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에 맞서는 킬러 JH 형제!!]
건너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자들에 대한 소개가 이어진다.
[투기장에서 보면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그 살인귀들이 마침내 독수리 투기장에도 등장했습니다!! 아차,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진짜 무서우니까요!!]
킬러 형제라는 자들은 얼굴에 철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딘가 흉측하고 비정한 느낌. 킬러라는 이름값에는 확실히 어울리는 가면이었다.
그들과 악수를 마쳤다.
‘...정전기?’
악수한 순간 묘하게 따가웠다. 신경쓸 정도는 아니었다.
“마법 용사 장입니다.”
“......”
“킬러는 원래 조용한 법인가요?”
“글쎄요.”
재미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둘 다 입을 꾹 다문 채 악수를 했고, 형식상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매정하게 뒤를 돌아섰기에.
장과 기넨도 그들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진영으로 되돌아갔다.
하기사 우리는 밟고 올라가야 할 대상일 뿐이니 당연 달갑지는 않겠지.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무덤덤하게 기넨에게 말했다.
“기넨 씨와 악수한 사람의 팔에는 돌출식 검이 있더군요. 저자가 어태커로 보입니다. 저와 악수한 녀석은 총을 들고 있으니 키퍼겠고요.”
“검잡이, 총잡이로 부르죠.”
“그러죠. 사실 어떻든 상관도 없겠지만.”
승리는 정해져있는 것 같았다. 느껴지는 마나나 오러, 그런 게 아주 보잘것 없었다.
장의 서클은 7, 기넨의 오러는 익스퍼트급.
상대가 될 수 없는 게임이다.
[그럼 배팅 시~작!!]
악수를 마치고 각자의 진영에 도착하자 사회자가 성급히 무대에서 퇴장했다.
쿠구구구
경기장은 또다시 흔들린다. 그 기술력에 내심 감탄했다.
바닥에서 장애물이 여럿 올라온다. 천장도 시원하게 열렸다. 하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두 가지 물건이 안 나왔다.
‘이게 잔.’
장의 뒤에 거대한 잔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 다섯 명이 목욕할 수 있을 크기.
잔이라는 표현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거인이 사용하는 잔이라면 모를까.
‘우물은 얼마나 크길래?’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바닥이 쪼개지고 장애물이 나뒹굴며 우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이 미친 새끼들이......”
쿠어어어어!!
경기장 한복판에 블루 드래곤이 거대한 수조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
“독수리 길드장!! 지금 제정신이냐?!!”
블루 드래곤이 날뛰기 시작했다. 물이 넘실거린다.
잔도 잔 답지 않듯, 우물도 우물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설령 우물이 맞다고 한들, 그 속에 독도 아니고 드래곤을 풀어놓다니. 제정신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안주할 사실은 새끼 드래곤이다. 다타리오보다야 성숙하지만, 성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작은 크기.
그렇다고 진짜 작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적어도 집 한 채만 하니까, 또한 드래곤의 강력함은 크기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니까.
[배팅액이... 우와! 1차 경기부터 이렇게나 많은 골드를!? 세상에, 부자들만 이곳에 있나? 역대급입니다 역대급!! 선생님들 저도 용돈 좀 주세요!!]
와중에도 배팅액은 잭팟 기계를 돌리면 촤르륵 돌아가는 화면처럼 쉴 틈 없이 오르고 있었다.
전광판의 숫자 단위가 최대 단위로 치닫는다. 사회자는 흥분을 멈추지 못 했다.
[우와!! 1억 달성!! 1억 골드 달서엉!! 말도 안 돼! 다시 말하지만 역대급입니다 역대급!!]
그는 한숨을 돌리곤 상황을 다시 해설했다.
[1억 골드... 작은 단위는 그냥 신경 끄렵니다. 그 작은 단위도 결코 작은 단위는 아니지만요... 하여간, 배율은 9 대 1!!]
생각만큼의 배율이 나왔다.
더 들을 필요는 없겠지. 장은 눈을 거두고 저 멀리에 있는 상대에게 집중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봤네요. 0.9대 1.1입니다요.]
‘...뭐라고?’
[게임 시작합니이다아아아아...!]
말을 왜 저렇게 끌지? 그것보다 당황스러운 건 배율이었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저런 잡배들이랑 용사를 비교하다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퍼어어어어억
어깨춤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 장은 고개를 내렸다.
‘......씨발, 뭐, 뭐야? 언제?! 언제 공격당한 거지?!!’
시선을 내려보니 작살 형태의 총탄이 한 발 박혔다.
그곳에서 핏줄기가 터진 물풍선처럼 쏟아졌고,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앞에서 기넨이 다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지입주웅해애애요오오...! 지이그으음... 여어어기이이... 저언...자앙...”
기넨은 칼잡이와 굉장히 느리게 난타전을 펼치고 있었다.
놀라운 건 두 가지.
하나는 칼잡이의 실력. 그의 오러 등급은 척 보기에 소드 비기너에 불과하다, 허나 그의 검은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지금도 기넨의 피부를 찢고 들어가고 있다. 검에 특수한 무언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다른 하나는 둘의 검과 도끼가 부딪히는 소리마저도 느리게 들린다는 것.
0.25배속, 과장이 아니었다. 이 기이한 환경을 쉽사리 받아들이긴 어려웠지만, 우선해야 할 것은 알고 있다.
“크, 크으으... { φλγα ασπδα 화염 방패 }...”
우선은 몸부터 지켰다.
누굴 돕기에는 어깨의 격렬한 통증, 말을 듣지 않는 몸, 굉장히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 제약이 되었다.
‘신경이 마비된 것처럼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 지금 내 눈앞에 다가오는 건... 또 작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치이이익....
작살이 방어막에 닿아 녹아내리는 것도 굉장히 느렸다.
슬로우 모션을 튼 듯한, 더군다나 모든 게 느리게 느껴진다고 본인이 빠르게 반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깨에 박힌 작살을 뽑고자 힘을 콱 주는 데에도 10초가 넘게 뽑지 못했다. 근력의 문제나, 작살의 깊이 혹은 형태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뽑는 데에 시간이 너무나도 느리다. 몸도 슬로우 모션에 걸린 것 같다.
‘아니...’
문득 전광판에 적힌 시간을 보니 10초는 아직 흐르지도 않았다.
이제야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았다.
‘분명해. 내 몸에 이상이 생겼다. 언제부터?’
화살을 맞은 순간부터는 아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깨에 화살이 박혀있었으니까 그때는 이미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는 뜻이다.
눈으로 확인도 못 할 정도로 화살이 엄청나게 빨랐던 건 아닐까?
그것도 기각. 빨라도 반응 못 할 장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화살이 빠르더라면, 어째서 기넨은 멀쩡히 칼잡이와 합을 나누고 있는가?
‘...아.’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러자 조그맣게 피가 한 방울 새어나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악수, 악수였다. 그때 느꼈던 따가움은, 손바닥에 심어둔 바늘에서 비롯한 거였다.
원인은 알았다. 허나 상황은 완화되지 않았다.
장이 방패로 몸을 지키자 타겟을 변경한 총잡이는 기넨에게 공격을 쏟아부었고, 오러가 바람 앞 촛불처럼 희미해져가는 기넨은 미처 공격을 방어하기 버거워 보였다. 상처가 늘어난다. 검에 의해, 작살에 의해.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시간 문제다.
‘...방심했어. 오러나 마나가 적다고 약하다는 보장은 없는데.’
진 키아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장은 걸음을 옮겼다.
‘독은 시간이 지나면 풀리겠지. 하지만 게임은 우리의 패배로 끝날 거야. 저들이 느릿느릿한 나를 무시하고 잔에 물을 채울 테니까.’
독을 풀 수단은 없다.
하지만 상황을 역전시켜야 한다.
기넨 혼자서는 무리다. 어떻게 하면 될까?
물론 방법은 있다.
‘블루 드래곤이 미쳐 날뛰겠지만...’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어떻게든 작용할 것이다.
장은 마법진을 하늘에 설치했다. 바닥을 향하며.
“{ κασωνα 폭염 }.”
쿠구구구
지독한 열기가 경기장을 향해 스멀스멀 다가오고자 모습을 드러낸다.
*
화면 너머의 블루 드래곤이 열기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킬러 형제 두 명은 바닥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킬러 형제가 초반에는 승기를 잡는 듯했으나, 결국 마법 용사는 마법 용사라는 건가? 격의 차이를 보여주며]
삑
악쿤은 화면을 종료했다.
어차피 기세를 잡은 이상 더 볼 필요도 없었다. 첫 경기는 장의 승리다.
“제가 말 했잖습니까. 장은 강하지만 경험이 너무나도 부족하다고.”
“진짜네.”
케다시는 납득하는 동시에 의아하단 반응이었다.
킬러 형제는 실렉티스나 마왕군과는 일절 관련 없는 인간이다.
또한 그들의 마나나 오러의 경지는 장이 알아봤듯 굉장히 낮다.
하지만 장은 난관을 겪었다. 자칫 반응이 느렸더라면 죽었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아직도 하찮습니다. 저런 놈이 절 언제쯤 죽일 경지에 이른단 말입니까?”
장이 아랫사람이라는 듯 한참이나 얕잡아보며 말했다.
그런 근거가 있었기에 가능한 어투였다.
“저였더라면 악수했을 때 역으로 저들의 몸에 빙결 속성의 마나를 흘려 넣어 게임이 시작되는 동시에 얼려버렸을 겁니다. 정정당당히 승부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 저급하고 비열한 암거리 투기장인데.”
“그렇지...”
“방심이라는 단어로 자위하는 건 수준 낮은 놈들이나 떠드는 겁니다. 장은 아직도 저런 얕은수에 당하는 조무래기죠.”
“근데 나였더라도 당했을 것 같은데? 악수하면서 독을 심어뒀을지 어떻게 알았겠어.”
“또 섭섭하게 말씀하시네요. 저 자리에 케다시님이 장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건 방심이 아니라 자신감으로 불러야 마땅하죠. 저들의 독이 감히 케다시님의 몸을 해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준비된 것처럼 말을 쏟아내는 악쿤에게 말문이 막혔다.
허나 한편으로는 본인을 지켜세워주는 말이기에 은근하게 입가가 올라갔다.
“흐흐... 우리 기장이가 방심을 많이 하긴 하지.”
“그러니 답답하죠. 실전 감각을 키워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이번 투기장인 거죠.”
실렉티스인 독수리의 길드장,
에이브(AYV)는 그녀에게 검은 촛불을 탈취하라 일렀다. 케다시의 입김이 들어간 탓이다.
“장에게도, 퀸에게도, 케일에게도 이번 투기장은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그치~ 우리 윤상이가 말하는데 이견이 있겠냐~ 의심한 내가 바보지.”
칭찬을 받은 덕에 기분이 좋은지 케다시는 껄껄 웃으며 산책로에서 앞장섰다.
그 뒷모습을 보는 악쿤의 표정은 정말이지 싸늘했다. 케다시에게 보이는 표정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실컷 웃어둬라.’
언제나 그에게 미소짓던 악쿤은 어디에도 없었다.
“뭐야, 내가 걸음이 빠른가? 왜 이렇게 안 와.”
그때 케다시가 뒤돌았고, 파츠를 갈아끼듯 접대 모드로 곧장 돌입한 악쿤은 헤헤 웃었다.
“하하, 잠시 딴 생각 좀 했습니다.”
“짜식 실없기는. 근데 오늘 저녁이 뭐랬지?”
“저번에 말씀하신 커리에 돼지고기를 찐 음식을”
식사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케다시와 악쿤의 투샷은 참으로 다정했다.
케다시가 악쿤이 속으로 ‘시간을 더 벌었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는 걸 알 도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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