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최초의 수집가
* * *
이번 사천왕은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예전 사천왕은 현실을 한탄하기만 하며 변화를 꿈꾸지 않았더라면 이번 사천왕, 특히 메이블 토진은 에이브(AYV)와 실렉티스의 발자취를 쫓아 진리에 도달하고자 노력했다.
여러 시도가 있었다. 용사 시절 수상함을 느꼈던 이를 습격하여 정신 지배 마법으로 그의 기억을 뒤적이기도 했으며, 용사 생활을 끝내고 용병을 찾거나 여러 길드를 다른이로 변장하여 들락거리곤 정보를 열심히도 캐냈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첫 번째 용사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거였다.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그들도 에이브(AYV)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세대 용사와는 차이점이 있었다.
허나 그 첫 번째 용사들은 에이브(AYV)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두 번째 용사때부터 에이브(AYV)는 그들에게 일절 관여를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에 반발해봤지만 에이브(AYV)의 작은 손짓 한 번에 나가떨어졌고, 그토록 강했던 노젤루스에게 힘을 준 존재마저도 에이브(AYV)임을 깨달은 세 명의 초월자는 그의 전능함을 감히 가늠치도 못하며 깔끔하게 신살을 포기하고 막에서 내려갔다.
“진실을 밝혀라.”
그러니 줄의 입장에선 메이블 토진의 방문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옆에는 다른 세 명의 용사와 작은 악마 여자 아이가 있었고, 줄은 그들을 훑어보곤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번지수 틀렸어. 네가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나한테서 얻어낼 수는 없을 거라고.”
“상관 없다. 내 마법이 네놈의 온몸을 옥죄이면 그제는 말이 달라질 테니.”
“...에휴.”
빠직
줄의 몸에 선명한 전격이 휘감겼다. 그에 맞춰 메이블의 트럼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맞아야 정신을 차릴런지...”
둘은 격돌했다.
그리곤 당연하다시피 줄의 승리였다. 초월자가 된 이후로도 그는 어느 하나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메이블과 마법의 경지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나도 닿지 못하는 존재인데, 네가 닿을 수 있을리가 없잖냐...’
표정을 구겼다. 처량하게 엎어져 동료의 부축을 받는 메이블을 보자 속이 얹히는 기분이었다.
메이블은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눈빛은 여전했다. 무언가 갈망하며 분노에 가득 찬 열기 넘치는 그 눈빛에 줄은 본인이 압도되었음을 느끼곤 손바닥을 꽈악 쥐었다.
“그렇게나 진리에 도달하고 싶나?”
예전의 자신도 저런 표정이었을까.
“누가 이 세계를 조종하는지 궁금하냔 말이다.”
“생각은 하고 말하는 건가? 나와 동료들을 이 세계에 가둔 장본인을 증오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억지로 원하지도 않던 삶,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마왕 토벌을 강제당한 순간부터 속았다는 감정 이외의 것이 피어오르지 않는다.”
“글쎄, 모르는 게 속 편할 수도 있지. 무지가 꼭 잘못된 것만은 아니야. 알아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은 꽤나 불쾌하거든.”
4명의 용사들과 작은 악마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저들 중 실렉티스가 있을 터. 한 술 더 떠서 에이브(AYV)가 애지중지하는 두 명의 몬스터였던 신 포식자일 수도 있다.
‘...아니기만을 바랄 수 밖에.’
줄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표정이 밝게 변했다. 그는 토텔리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철컹
토텔리의 검이 오러를 휘감고 줄에게 맞선다. 조금이라도 더 다가오면 베어 목이 몸에게 작별인사를 해야 할 것이라는 듯 굉장히 위협적인 오러였다.
“호들갑 좀.”
퍼석
그 휘황한 검에 무언가가 올랐다.
새싹이었다. 마치 주술의 것과 비슷한 마법.
주술을 분석하여 제 입맛대로 마법으로 변경한 것이다. 이미 초월자에 올랐고 9서클은 진작에 도달한 줄에게 있어서 이런 수준의 묘기는 간보기에 불과하다.
그는 당황한 역력이 가득한 토텔리를 그대로 지나쳐 문을 열고 자기 집 밖으로 나갔다.
긴이 어둠 속에 몸을 숨겨 그의 뒤를 쫓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줄은 머잖아서 무언가를 손에 들고 다시 들어와 메이블에게 다가오고 있었으니 줄행랑의 목적은 아니었다. 도망칠 이유도 없었지만.
“그렇게 궁금한 게 많다면야, 못 알려줄 것도 없지.”
덜그럭
손에 들린 건 골동품처럼 낡은 램프였다. 먼지가 가득한 탓인지 원체 색깔이 그런 건지 잿빛으로 물든 램프는 덜렁 흔드는 것만으로도 기관지가 막힐 것 같은 예감을 풍겼다.
“그렇게 더러운 거 보는 표정으로 보지 마. 이래뵈도 굉장한 물건이니까.”
시선의 의중을 눈치챈 줄이 선수를 쳤다.
그는 램프를 얼굴 앞에 두고 입 안에 마법진을 머금더니 마치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는 것처럼
후!
입김을 불었고, 그곳에서 조그마한 화염이 램프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먼지가 나왔기에 줄은 콜록거렸으나, 어디까지가 멍청한 척 연기인지 아니면 진짜 멍청한 건지 분간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타오르는 램프를 들고 메이블에게 다가갔다.
“죽이려는 거 아니니까 표정 풀어. 죽이려면 진작에 죽였으니까 말이야.”
쾅!
그리곤 아무도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램프로 메이블의 몸을 후려쳤다.
긴과 토텔리가 즉각 반응했으나 그들을 향해 피식 웃어보이곤 자신의 배도 램프로 내려쳤다.
킹 키깅
램프는 바닥에 떨어졌고, 그 속의 불꽃은 여전했다.
그 안에는 심지가 두 개였다.
*
“...여섯 번째 잿빛 램프.”
“오, 이 물건을 알고 있었네?”
줄이 과장스럽게 팔을 벌리며 놀란 연기를 하자 메이블은 지겹다는 표정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확실히 이곳에서라면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얘기할 수 있겠지. 이곳은 완전히 독립적인 공간이니까.”
맥라룬 드파니온이 휴식하기 위해 만든 마도구가 여섯 번째 잿빛 램프다.
물리 법칙따위 무시하는 휴대성과 그 속의 차원 공간. 차원석을 대량으로 쏟아부어 제작됐으리라 예상되는 이 물건의 내부는 굉장히 따스하면서도 눈이 부시지 않는 주황빛으로 가득하다.
그 안에 줄과 메이블이 있었다. 줄은 메이블을 조금 골려줄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절레곤 본론으로 넘어갔다. 둘 밖에 없는 공간에서까지 굳이 장난질을 할 이유는 없었다. 이미지 관리야 지긋지긋하다.
“네가 궁금한 건 네녀석 동료들을 이 세계에 불러들인 존재, 그리고 자꾸만 반복되는 용사와 마왕군의 기묘한 인연에 대한 거겠지.”
사뭇 달라진 줄의 말투와 분위기에 메이블은 저도 모르게 동공을 크게 뜨곤 귀를 열었다.
메이블도 진지하게 응수하자 이야기의 속도는 가속되었다.
“용사와 마왕군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 내가 첫 번째 용사라는 것에 도달한 시점부터 말해 뭐하겠냐만은, 네가 물리쳤던 사천왕 중 2명만이 전대 용사였고, 다른 두 사천왕은 전 마왕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용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채용된 용병에 가까웠지.”
“루나릭과 아가레스.”
“악마도 관리하며, 몬스터도 관리하며, 전대 용사도 관리하는 게 마왕이 아니라는 건 네가 데려온 차기 마왕 여자아이만 봐도 알 수 있지. 마왕의 능력은 사실 사천왕만도 못하다.”
줄은 아스모데우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예외도 있긴 하지만. 하여튼간 너는 내가 그 흑막일거라 생각한 건가? 아니면 내가 실마리를 쥐고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둘 다 가능성을 열어뒀다. 제압하면 뭐든 알아낼 수 있겠다 생각했지.”
“헛소리 집어 치우고,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해. 그 존재를 찾아내면 어쩔래? 덤벼들기라도 할래?”
“그래야지. 이 끝이라곤 없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과연 진실을 알고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글쎄, 어느 무엇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나 확실한 건 지금 메이블의 표정은 생기가 가득하다는 것.
‘마음 속에 깃발 같은 게 있다면 튼튼하겠군. 내 것은 너덜너덜해졌을 거고.’
내심 메이블이 부러워졌다.
줄은 진실을 말했다.
“저 위의 존재다.”
“...예상은 했지.”
신(?).
메이블 토진, 김진영에게 있어선 종교적으로밖에 접근할 수 없었고 더욱이 실리주의자였던 그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뜬구름 같은 소리였지만 지구인에게 있어선 이곳 ONE(?)이 신보다도 더욱 뜬구름 같은 세상이었다.
의심하는 것 자체가 피곤한 작업이다.
신은 죽었다? 심정은 알겠지만 신은 있었다.
그 불가사의한 존재를 대입하는 것만으로도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느낌이다. 아마 수많은 톱니바퀴를 모두 돌릴 수 있는 힘이 있을 것이고, 또한 이 세계의 중심부가 그의 자리일 것이다.
“에이브(AYV). 나도, 내 동료도 그에게 도전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안주해보자면 그는 첫 번째 용사들에게 흥미를 잃었고, 방해만 하지 말라 으름장을 놨었으니 그의 바람대로 조용히 지낸다면 살아있는 역사이자 전설로 길이길이 남아 살아갈 것이다.
‘그 자체가 한심한 생각이야.’
어차피 조작된 세상이다.
실렉티스처럼 에이브(AYV)의 입맛대로 놀아날 생각은 없다.
그저 때를 기다리고 있다. 발톱을 숨긴 매처럼, 송곳니를 감춘 이리처럼.
줄의 마법 연구는 에이브(AYV)를 하늘에서 끌어내리기 위함이었다.
과거 사랑했던 그녀를 찾는 건 그다음으로 정했다. 또 역행의 부작용을 맞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됐다.
그녀를 만나러 떠나는 건 노젤루스를 죽인 다음으로 정해뒀었다.
허나 그 목표 자체가 에이브(AYV)가 설정해둔 것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의 불쾌감은 이로 말할 수 없다.
아콜드를 죽인 건 노젤루스가 아니라 에이브(AYV)다.
계산은 마치고 떠나야 한다.
“에이브(AYV)를 죽였을 때 ONE(?) 자체가 무너질 가능성은? 신의 존재가 없는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거지?”
메이블의 질문. 합당한 답을 줄 수는 없었지만 뜻 정도는 말할 수 있었다.
“나도 몰라. 근데 정신병자 신이 관리하는 세상 따위는 없는 게 낫지 않아?”
줄은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감정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
줄은 메이블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다. 뜻은 같았으나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기에 각자 방법을 찾고자 머리를 굴렸다.
“나는 다음 세대 용사 중 하나를 제자로 받을 거다. 너는 이미 구정물이거든.”
‘말 하는 꼬라지 하고는.’
쳇, 혀를 차며 말했다.
“방법을 찾겠다. 놈을 하늘에서 끌어내릴 방법을. 그리곤 다음 세대 용사에게 넘겨주지.”
죽겠다는 말이 아니다.
“만약의 경우다. 만약... 어차피 성공 아니면 죽음이다. 신에게 죽나, 다음 세대 용사에게 죽나.”
차선책이었다. 최선책은 메이블이 방법을 찾고 줄을 비롯한 첫 번째 용사 일행들이 에이브(AYV)를 죽이는 것.
그러니 조심해야 했다. 외부적인 것보다 내부적인 것을 말이다.
“좋아 메이블. 이 램프에서 나가기 전 하나만 잘 기억하면 돼. 내가 목숨 걸고 알아냈던 정보니까 허투로 듣지 말라고.”
“지겹도록 말했잖은가. 벌써 열 번은 들은 것 같다고.”
“그토록 중요하니까 그래. 정 따위 잊어. 냉철하게 잘 판별해. ‘설마’라는 말 자체를 머리에서 지워. 불길한 예감은 대개 들어맞는 법이니까.”
손가락을 척 세웠다.
3개였다.
“용사는 세 명. 네놈들 중 한 명은 가짜다. 잘 기억해둬.”
한 명은 용사를 가장한 신 포식자임을.
말을 끝마친 줄은 램프에서 메이블을 내보내고 저도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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