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전쟁의 상징
* * *
3년 전.
사천왕과 마왕 단탈리온.
그들을 마침내 꺾어내고 나를 포함한 4명의 용사는 각자 원했던 삶을 향해 정진했다.
직장인이었던 검술 용사, 김철수(다르칸).
“나는 검술 조교가 되고 싶어. 그리고 전대륙 검술을 병합해 인간들이 다음 마왕군이 나오더라도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할 거야. 플라금의 영주가 마왕을 토벌하면 극진히 대접해주겠다며 나를 불렀었거든. 그곳으로 가봐야겠다.”
편의점 알바생이었던 주술 용사, 이재홍(바비룬 필라이트).
“나는 술이나 퍼마시며 시시덕거리고 살려고. 집은 정기 풍부한 비옥한 땅이 좋겠다. 가령 비이린이라던가. 거기에 정령이나 요정도 있다며? 그래, 이번 기회에 그토록 강하다는 카이루스라는 새끼나 조져서 용족의 수장이나 돼볼까?”
여고생이었던 암기 용사, 최세린(진 키아라).
“제 기술은 피를 불러올 뿐이고, 누굴 가르쳐도 좋을 게 아니니 평화로운 곳에서 책이나 읽으며 조용히 살려고요. 이 기회에 가축이나 길러볼까 싶은데... 좋아! 저는 서대륙의 따스한 마을 에톰으로 가야겠어요.”
컴퓨터공학과 대학생이었던 마법 용사이자 나, 정윤상(악쿤 토든).
“컴퓨터를 개발할 수도 없으니 마법 책이나 쓰면서 지내려고. 마탑이나 건설할까? 지역은 처음 고블린을 토벌했던 서대륙 작은 마을 데미투가 좋겠는데. 나도 거기서 철수형처럼 다음 마왕군이 나타난들 인간이 대적할 수 있게 마법을 발전시키겠어.”
세계를 구해낸 영웅! 악으로부터 세계를 구원한 평화의 상징!
어느 곳을 가든 우리가 원하는 건 이뤄져야 했다.
마왕군 때문에 자기 모성(??)도 아닌 곳에서 개처럼 일했다.
그에 대한 억울함으로 보상 심리가 작용한 것이리라.
내가 곧바로 데미투의 영주를 찾아간 것도 그 이유였다.
데미투 주민들이 반가운 것도 있지만, 이 짠돌이 새끼한테만큼은 어떻게든 뜯어먹고 싶었다.
“오오! 내가 가장 친애하는 용사 악쿤 토든! 마탑을 건설하고 싶다고?”
그런 생각이 무색해지게 영주는 나를 환대했다.
마왕군의 억압에 기가 눌려 내면에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그의 밝은 미소는 여태껏 보아오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미약한 죄책감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뗐다.
“...예, 어차피 할 것도 없고 스승님도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못 박아뒀으니 마탑이나 만들어 마법사 후계자나 육성할까 합니다. 책도 몇 개 쓰면서 ONE(?)의 전체적인 마법 수준을 높이려고요. 가능할까요? 마탑만 지어주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는데요.”
잠시 고민하더니 영주는 북슬북슬한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우리 마을을 선택한 이유는 있는가?”
“용사 일행 제외하곤 이곳에 가장 친한 사람들이 많거든요. 용사 초반 시절 때 신세 좀 졌죠. 그에 대한 대가로 이곳에 마탑을 지으면 방문객도 많아지고 지역도 발전하지 않겠어요?”
“훌륭하다! 훌륭해! 내 데미투를 이토록 생각해주다니, 그대의 마음씨에 큰 감동을 얻었네!”
짝짝!
영주는 손뼉을 치며 집무실이 떠나가게 크게 웃었다.
우리 용사 시절 때는 아무런 지원도 안 해줬던 쩨쩨한 놈이지만, 저한테도 득이 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선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이번 마탑 건은 긍정적으로 흘러갈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점 찍는 장소가 있는가? 당장 업체를 소개해주도록 하지.”
“오, 감사합니다.”
시작이 좋다. 영주는 흔쾌히 마탑 건설을 허락했다.
*
그 이후로는 아주 바쁘게 지나갔다.
마탑은 5층짜리로 지었다.
영주가 더 큰 마탑이 좋지 않겠냐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나는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영주의 생각이 틀렸단 것도 아니다.
이 마탑은 물론 혼자서 쓰기에는 충분히 높고 넓다. 하지만 다른 마탑에 비해서는 굉장히 조촐한 크기였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중요한 건 알멩이다.
ONE(?)에 마탑은 많다.
특히나 이곳 서대륙과는 다르게 남대륙에는 마법에 인생을 갈아 넣은 자들이 흘러넘친다.
마법사는 음침한 놈들이다. 그에 대한 결과물이 하루종일 처박혀 있을 수 있는 마탑이 된 것이고, 그 안에서 틀어박혀 마법 연구나 주구장창하는 게 그들에게는 희열이자 삶의 목표다.
그들이 마탑에서 연구하는 내용은 개발적이고 혁신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마탑에는 한 가지 오점이 있었다.
그들의 연구는 언제나 돈을 위한 연구였다. 평화를 위한 연구가 아니었다.
가령 자동 청소기라든가, 침입자 경계를 알리는 마도구라든가.
좋다.
다 좋은데, 이건 인간들에게 낚시 방법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를 주는 것과 같다.
남대륙은 지리상 마왕군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어본 적이 없어서 그들의 악독함을 모른다.
마왕군의 잔혹성을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마법을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마법 지식을 전대륙에 공유했더라면 인간이 마왕군에게 그렇게나 무력했을까에 대한 의문을 아직도 떨치지 못했다.
그럼 피해자가 훨씬 적었을 텐데...
짝!
정신 차리자는 의미로 양 볼을 박수하듯 후려쳤다.
얼얼한 기운이 썩 나쁘지 않았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둬야 한다. 이제부터 고쳐가면 된다.
내 마탑의 연구는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마법의 보편화’에 관한 내용이었다.
첫 번째는 기록.
내가 사용하는 마법과 기존에 있던 마법.
남대륙을 포함한 전대륙의 마법을 각 항목에 맞춰 분류해뒀다.
두 번째는 개선.
일반인의 수준에 맞춰 마법을 임의로 조정하는 단계였다.
해당 마법에 사용되는 쓸데없는 룬어를 삭제하여 소모되는 마나를 최소화하고 난이도를 대폭 낮췄다.
세 번째는 지도.
마법을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서민들에게 활로를 제공했다.
내 마법 이론을 정리해둔 책을 집필하여 아주 값싸게 전대륙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 책을 토대로 일반인도 마법을 배워 우리 용사들이 없어도 마왕군의 싹이 다시 돋아나지 못하게 막아줄 수 있는 전력이 되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3년이 흘렀다.
“그만뒀으면 좋겠네.”
“...네?”
영주가 대뜸 나를 부르고선 내뱉은 첫마디였다.
“자네는 데미투를 위해 헌신하려던 거 아니었나?”
“그게 무슨 말이죠? 헌신?”
“그래, 자네는 데미투를 위해 마탑의 건설을 주장한 게 아니었냐고 묻는 걸세.”
“반은 맞습니다. 제 개인적인 욕심과 데미투가 발전했으면 하는 마음이었죠.”
실제로 이뤄졌다.
작은 변두리 마을 데미투는 이제 도시라 해도 좋을 만큼 근 3년 내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내 마탑의 존재만으로 이 땅의 가치가 올랐다.
용사가 건설한 마탑!
용사라는 이름은 브랜드값이 확실했다.
방문객은 많아졌고, 나와 제자들은 그들을 친절히 응대했기에 제법 인기도 많았다.
마을 한복판 알짜배기 땅에 마탑을 지음으로써 이 마을 전체가 내 덕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상인은 내 제자를 희망한 귀족의 부모를 꼬드겨 거래를 따내기도 했고, 유명 관광지가 된 만큼 지역 특산물을 재배하는 농부도 제법 돈을 만졌다.
이런 세세한 예를 들 것도 없이 밖에 나돌아야 할 화폐가 이곳으로 들어오니 지역이 발전하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런데 영주의 표정은 불만이 가득했다.
“책을 계속 집필해야겠나?”
“네. 인간은 무력해서 마왕군에게 죽어났습니다. 영주님이 가장 잘 아실 텐데요. 그를 막기 위한 책입니다. 지식은 곧 힘이죠.”
“그렇다면 마법을 배운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면 어쩔 텐가? 그대가 책임질 여력은 있는가?”
“악한(??)만 책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정의로운 마법사가 그를 물리치겠죠.”
“그자가 터무니없이 강하다면?”
“영주님은 제 책을 안 읽어보셨군요? 총 6개의 책의 첫 장에는 항상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마법은 오로지 본인을 지키는 수단이며, 이 책을 통해 인명을 해치거나 범죄에 가담하는 등 내 비위를 거스르는 짓을 하면 직접 찢어 죽이러 가겠다.’ 이렇게 대못을 박아 뒀습니다. 아무리 강해봤자 용사를 넘어서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 악한도 용사라면 모르겠지만.”
이 유치한 문답을 통해 영주가 내 뜻을 납득했으리라는 건 알기 어려웠다.
이해한 척 고개는 끄덕이지만 그는 표정이 아직도 우중충했다. 내게 뭘 바라는 걸까.
“...흐음.”
“저는 이 세계를 발전시켰을 뿐입니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책임을 묻는다면 할 말이 없죠.”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금방 물러서는 걸 보니 책에 대한 걸 추궁하려던 건 아닌 것 같다.
무슨 속내가 있는 걸까, 지금까지는 그걸 떠보기 위한 서두에 불과한 걸까?
“자네의 마법 지식은 현재까지 집필한 책에 모두 담겨있는가?”
차를 한 모금 홀짝이곤 자세를 고쳐앉았다.
지금부터가 본론이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태반은 그렇죠.”
“태반이라는 뜻은? 숨겨둔 마법이 있다는 건가?”
“제 시그니처 마법이죠. 일정 서클에 도달하면 독단적인 연구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마법. 그건 세상에 내놓을 게 못 됩니다.”
마음먹는다면 당장 마왕군을 부활시킬 수 있는 위험한 마법이다.
어디까지나 내가 제공하는 건 일정 수준까지다.
내 책을 보고 아무리 공부해봤자 나를 넘어서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나도 속 좁은 인간이다. 나보다 뛰어난 마법 실력을 지닌 자는 이 세계에 스승 한 명이면 족하다.
“흐으음...”
영주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 의미를 모르겠어서 살짝 웃음 짓자 영주는 말을 이었다.
“그 시그니처라는 마법은 따로 기록해두지 않는 건가?”
“기록해뒀습니다.”
“어디에 말이지?”
“여기에요.”
톡톡.
머리를 검지로 두드렸다. 그걸 본 영주의 표정이 바싹 굳었다.
“하... 하하... 악쿤. 농담이 제법 늘었군.”
“말했잖습니까. 세상에 내놓을 마법이 못 된다고.”
“...알겠네. 잡담은 이쯤 할까 하는데.”
“말씀하시죠.”
꿀꺽.
차를 한 모금 털어 넘긴 영주가 잠시 입가를 찡그리며 말을 삼키더니 내 눈을 끈적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데미투를. 아니, 그걸 넘어서 우리 서대륙을 위해 그 마법을 쓸 생각이 있는가? 일이 잘 풀린다면 그대에게 대마장(大??)의 자리를 약속하고, 서대륙, 남대륙, 아니 전대륙의 마법 생도는 모두 그대의 마법 지도를 받게 될 걸세!”
“그만하시죠.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아니길 바랐건만 불길한 예감은 어째 벗어나질 않는 건지.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데미투의 영주의 뜻인지, 우리 잘나신 국왕의 뜻인지는 몰라도 전쟁을 펼치자는 헛소리였다.
“잠깐만! 악쿤! 그대가 원하는 모든 걸 이뤄줄 수 있네! 명예? 부? 여자? 권력? 모두 말만 하게! 이 드넓은 ONE(?) 전체가 자네의 손에 들어올 걸세!”
“추합니다. 그만하시죠.”
슬슬 떠날 때가 되었다고는 생각했다.
마법 이론 책을 6권까지 집필한 이 시점, 마탑에서 내가 원하던 건 모두 이뤄냈다.
인류는 더는 마왕군에게 무력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거다. 이쯤 만들어줬으면 나머지는 알아서들 해야 할 일이다.
마탑에 받아들인 5명의 제자들이 약간 가슴에 걸렸으나 어떻게든 되겠지 싶다.
그들에게도 내 6권의 마법 교본은 있는 것은 물론이오, 내게서 직접 지도까지 받은 녀석들이다.
내가 더 가르칠 건 없다. 나머지는 스스로 이뤄내야 한다.
마탑은... 뭐, 알아서들 지지고 볶고 하겠지.
쩔그럭.
곧장 마탑으로 돌아와 여행에 필요한 기초적인 금전만 챙기고 여벌 옷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제자들은 내 기척을 눈치채지 못 했다.
이미 침묵 마법으로 내 존재를 지워둔 터라 꿈에도 모를 거다.
‘자, 어디로 가볼까.’
3년이라는 시간이 갖는 의미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마법 교본의 완성,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시그니처의 완성이었다.
마법의 끝이라 할 수 있는 8서클,
그리고 그걸 넘어서는 9서클의 마법이자 본인만의 시그니처.
내 시그니처는 마침내 완성됐고, 이걸 써먹을 곳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음... 누가 좋을까.’
머릿속에 떠오른 건 용사 일행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