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51화 (151/178)

비교적 근처에 있던 볼턴과 제이든이 현장 수습을 위해 도착하자, 켈란은 카일이 나를 기숙사까지 데려다주기를 바랐으며 카일도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엉망진창으로 다친 신사의 에스코트를 원한 바가 없었다.

카일이 어차피 시간이 돌아가면 다 낫는다고 말해서 더 싫어졌다. 자기 몸 귀한 줄 모르는 태도는 둘째 치고, 아직 우리의 퇴로가 전부 막힌 것이 아닌데 벌써부터 실패를 상정하고 있어서였다.

“운명의 물레가 망가지면 너는 손등에 구멍을 뚫은 채로 졸업해야 할 거야.”

나는 화가 나서 엄숙하게 지껄였다.

“그리고 내 이상형은 손이 아주 예쁜 남자야.”

속이 뻔히 보이는 나의 소꿉친구는 그제야 채프먼 교수를 찾아 헐레벌떡 양호실로 갔다. 카일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 딴 데로 새지 말라고 거듭해서 이른 뒤에도 곧장 기숙사로 가지 않았다. 대신 이름 없는 자의 무덤 근처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피츠시몬스 아카데미 총동문회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설치한 여러 조명과 안내판, ‘스티아께서 가로되 미혹하는 영은 너희 안에 있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수 없고 오직 믿음만이 길 밝혀 그의 안에 거하게 하리라’고 쓰인 모금함을 지나니 찾던 사람이 보였다.

나는 서쪽 입구 수험자 명부를 쥐고 제법 큰 나무 그루터기 위에 누운 갈색 피부의 남자 곁에 은근슬쩍 엉덩이를 댔다.

“네 동생 어디 있어?”

“내가 그걸 너한테 순순히 털어놓을 것 같아서 묻는 거냐?”

그가 내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꾸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투였다.

“시험이 끝나면 떠날 거잖아, 너희. 그러기 전에 꼭 알려 줘야 하는 게 있단 말이야.”

호소하듯 말하니 그는 잠깐 표정을 구긴 다음 가만히 있었다. 뭔가 떠올리는 모양새였다. 이내 잇새로 험악하게 내뱉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너였군.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기척이 났거든.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동물인 줄 알았는데.”

가차 없는 평가에 힘이 쭉 빠졌다. 아무리 정교한 환영 마법을 구사하느라고 애를 썼다 쳐도, 고작 그거 했다고 마나 감지 결계에 동물로 분류될 정도면 어디 가서 마법사라고 못 나댔다.

아무래도 마나보다 몸을 써야 한다는 사마귀의 판단은 옳았나 보다. 엄마가 마법 같은 소리 말고 기사 양성 아카데미나 지원하라 할 때 괜히 반항 말걸 그랬다. 그럼 나나 내 친구들이 만신창이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을.

축 늘어진 채 미동도 않던 켈리와 희다 못해 시퍼렇게 질린 케이시의 모습이 떠올라 코가 찡했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패인 카일의 손등. 채프먼 교수의 형편없는 치료술 실력을 생각하면 지금쯤 걔의 상처에서 뭐가 자라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검날을 쥐느라고 왕창 베인 손바닥에다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영원히 하늘을 향해 있을 줄만 알았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아파?”

그가 물었다. 생경한 말투였다. 실은 완전 쓰라렸지만 괜히 씩씩하게 엄지를 세웠다. 최근에 내가 윌리엄 그리피스만큼 믿고 따르게 된 휘태커 판사가 이르길 생떼는 부리다 보면 절로 근거가 생기기 마련이며 있어 보이려고 노력하다 보면 있게 되기 마련이었다.

“말해 봐.”

당당하게 치켜든 엄지를 한심하다는 듯이 보던 그가 문득 지껄였다. 어느 사이 그루터기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반쯤 세운 채였다.

“알려 줘야 하는 게 있다면서. 어디 해 보라고. 잘하면 내가 전해 주고 싶어질지도 모르잖아.”

막상 말하려니까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헷갈렸다. 나는 조금 허둥거리다가 거대 개미에게 깔려 어쩔 줄 모르던 순간을 시작으로 내가 겪은 것들을 되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마귀를.

걔가 다니는 피츠시몬스에는 ‘독거미 달튼’도, 저주스러운 <피츠시몬스 타임즈>도 없었다. 또 육포를 나무껍질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건 걔가 나와는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는 증거나 다를 게 없었다.

물론 육포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자면 신화시대까지 가야 맞았다. 하지만 산지기나 사냥꾼이 먹는 거라는 인식이 강했던 탓에 귀족들에게 퍼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것이다. 길어야 이십여 년가량일까. 즉 사마귀는 나보다 적어도 20년 전에 피츠시몬스를 다닌 인물이었다.

지평선을 따라 가득 펼쳐진 밀밭을 연상시키는 금발에, 군밤처럼 까무잡잡하고, 항상 눈에 불을 켠 사마귀. 입버릇처럼 군주 운운하던 그녀는 쟁취하고자 하는 것을 놓쳐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대체 왜 여태껏 짐작하지 못했던 걸까? 장장 사흘을 같이 보냈는데 말이다.

가방을 뒤져 귀걸이를 꺼냈다. 그녀의 외모만큼이나 화려하게 빛나는 루비 속에서 마구 날뛰는 영혼 조각이 보였다.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이 너무 확고해서인지 마치 꺼내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부터는 내 상상이야.”

구불구불한 나이테 위로 대충 늘어진 그의 손을 붙잡아 살살 펼쳤다. 바다거북의 등딱지처럼 널찍하고 거친 손바닥 가운데에 귀걸이를 올려놓은 뒤 말을 이었다.

사마귀는, 솔직히 걔가 방심했을 거라는 생각은 별로 안 드니까, 무시무시한 음모에 당했다고 치자. 아무튼 어떠한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그녀는 손에 넣은 줄만 알았던 왕관을 잃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실패한 왕위 계승 후보자들이 대부분 그러듯이 목숨을 노린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수저질 한번 편하게 못 했고 밤마다 불안에 떨며 잠들었다.

다른 형제들처럼 무력하게 뒈져 나가지 않기 위하여, 사마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왕좌를 차지한 배신자의 침실에 적을 두는 것. 굴욕적이었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순응할지언정 순종하지 않았다. 전부 그녀가 짜 둔 판에 불과했으므로.

“왕위에 오르고자 하는 사마귀의 집념은 누구도 막지 못할 정도였어. 내가 아는 그녀라면,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숨을 죽이고 몸을 낮춘 채.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두 아들이 그녀의 뜻을 깨닫길 기대하며.”

“……”

“간단히 말하자면, 네가 가야 할 두 갈래 길에 실은 샛길이 있었다는 거지. 그 끝에 놓인 건 너희가 그토록 바라던 거고.”

에드가 라모스도 브라이스 나돈도 왕위에 오르길 바라지 않는다. 반면 로즈마리 왕비, 로, 나의 사마귀는 어떠한가. 그녀가 미쳐 버린 이유는 여왕이 되길 바라서였다. 마법에 지지리도 재능이 없어 아티팩트에 의존하는 마법사와 꿀벌 여왕이 그녀에게 영감을 선사했다.

사마귀는 입맛을 다셔 가며 탐내었던 독거미의 아티팩트를 기억하며 루비 두 개에 스스로의 영혼을 쪼개어 넣었다. 그러고 나서는 자신을 꼭 닮은 쌍둥이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완벽하게 미쳐 버리기 위해서였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스스로마저 속였다. 계획은 철저할수록 좋았다. 귀걸이와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낼 때쯤이면 그녀의 아들들은 계승 전쟁에서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만큼 장성해 있으리라.

둘째 아들의 미들네임으로 ‘로즈마리’를 박아 넣은 이유는 그가 어머니를 유독 잘 따라서이기도 했으나, 그녀의 존재를 잊지 않길 바라서이기도 했다. 이름을 불릴 때마다 그녀를 떠올리고, 염려하고, 사랑한 결과 그녀에게 영혼과 왕좌를 되찾아 주기를.

만일 둘 중 하나라도 충분히 힘을 갖추지 못했거나, 둘의 사이가 협력할 만큼 원만하지 않은 경우라면 사마귀의 영혼은 영원히 보석 안에 잠들고 그녀는 역사서에 미친 왕비로만 남을 것이었다.

개의치 않았겠지 싶다. 어차피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는 이상 그녀가 원하던 바를 이루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하는 한 그녀의 삶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어쨌든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아들의 손바닥 위에서 설치는 사마귀의 영혼을 꾹 누르자 사납던 기세가 다소 사그라들었다. 기분 탓인지 내게 아는 체를 하는 듯이 보였다. 혹은 고마움을 표하거나. 입매를 깊숙이 당기며 뻐겼다.

“어때, 에드가 막시밀리아노 라모스?”

“뭐야, 알고 있었어?”

“전에 말했잖아. 한 번은 속아 주겠다고. 나는 그런 부분에서 철저하다니까.”

우쭐대는 것처럼 턱을 들었더니 에드가는 김이 팍 샌 듯이 도로 누웠다. 어머니의 영혼을 손아귀 안에 단단히 말아 쥔 채였다.

꽤나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에드가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갑작스럽게 접한 새롭고도 놀라운 정보와 그것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선선한 바람이 흐트러뜨린 머리카락 사이로 고집스럽게 뻗은 눈썹과 주름 잡힌 미간이 언뜻 보였다.

하릴없이, 나는 나뭇잎이 흔들리며 서로 비벼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나 했다. 에드가를 기다린 것이다. 그가 충분히 준비가 되기를. 그런 다음에 입을 열었다.

“지난주 내내 너를 찾았어. 내가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거든. 홧김에 해선 안 되는 말을 지껄였잖아.”

“됐어, 그건. 나도 네게 심하게 군 면이 있으니까.”

에드가의 목소리가 제법 누그러져 있어서 어느 정도는 까불거려도 되겠다고 느꼈다. 조금 키득거리며 검지와 중지를 구부려 몇몇 단어에 강세를 두었다.

“물론 어디서 죽어 나자빠지든 말든 상관없는 ‘친구’ 사이에 불과하니까… 너에게는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내게는 너와 쌓은 우정이 별거에 속하거든.”

“와, 소인배다.”

뻔뻔하게 남 탓을 하는 소인배 때문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속절없이 깔깔거리자 에드가도 슬쩍 웃었다. 평소 짓는 느긋한 미소에 비하면 어색했는데, 가까스로 꾸려진 화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나름대로 노력한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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