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50화 (150/178)

“아니, 마, 맞아… 실은… 너희도, 봤지? 쟤, 쟤가 갑자기 나와서… 라미레즈랑 케이시한테… 그렇지?”

‘마, 마법 같은 건 못 쓰는 척을 하더니….’ 중얼거리면서, 블로썸은 카일과 켈란을 번갈아 봤다. 입술 양 끝을 짝짝이로 비튼 채였다.

“아니야, 마도구를 썼을까? 그래, 마도구를 쓴 거야… 아, 너무, 무서워….”

가냘픈 모가지는 기이한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화가 치미는 것도 잠시, 울렁거리는 감각이 구석진 곳에서부터 비스듬히 밀려들기 시작했다.

쟤 말이 맞나?

마치 투명한 손이 내 두개골을 뚫고 뇌를 쥐어흔들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 의식에다가 대고 끈질기게 같은 말을 속삭였다.

내가 한 건가? 마도구로?

아니라는 걸 알아도 머릿속을 직접적으로 파고들어 오니 견디기가 어려웠다. ‘시도 때도 없이, 비이성적으로, 부자연스럽게 솟구치는 가짜 감정의 덩어리.’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서 켈란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켈리와 케이시를 공격한 게 나였던 거야?

그의 말마따나 역겹기 그지없었다. 헛구역질을 참기 위해 턱을 들었다가 카일과 시선이 맞았다. 꽉 맞물린 잇새에 비치는 붉은색이 눈에 들어오자 꿈에서 깬 기분이 되었다. 아리엘, 이 멍청이. 정신 똑바로 차려.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야?

로즈마리 블로썸에게는 아무 죄가 없어. 모든 잘못은 내가 저질렀으니까.

거세게 도리질을 치며 켈란을 봤다. 표정은 아리송하였으며 관자놀이와 목줄기에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나는 만일 켈란이 블로썸의 비열한 수작에 속아 넘어간다면 무지하게 슬프겠다 싶었다가, 더는 그에게 구애되기 싫어졌다.

인정해.

우리의 반응이 블로썸이 기대하던 것과 달랐나 보았다. 점차 난폭해지는 호흡과 비례하여 내 피부 안쪽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가짜 생각 또한 적나라해졌다.

내가 다 망쳤어. 로즈마리 블로썸에 대한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열등감에 시달리다가 맛이 가 버린 거야. 겉으로는 마냥 정의로운 척이나 하면서 실은 걔의 교복이나 교재를 더럽히며 내재된 폭력성을 표출하고 있었지.

진짜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 폭력성은 결코 내재된 바가 없었으며 여태껏 월시나 볼턴, 독거미 달튼의 악성 팬을 향해 자랑스럽게 표출되어 왔다. 반박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으나 말 대신 신음이 나왔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켈리는 알고 있었어. 걔가 나를 계속해서 말렸는데, 듣는 체도 안 했어. 그러기는커녕, 졸업 시험을 치르기 위해 챙겨 두었던 마도구로, 아….

문득 옆구리가 쓰라리기에 내려다보았다. 켈리의 머리카락들이 여러 방향으로 뭉쳐 내 어깨를 타고 오르는 중이었다. 옷깃 안쪽으로 파고들어 목덜미에서부터 서서히 감겨 오는 머리채는 끄트머리가 뾰족하게 갈라져 있었다. 검은 뱀의 혀나 지옥 문지기의 손톱처럼 말이다.

케이시는 켈리를 감싸다가 크게 다쳤어. 어쩌면 죽을지도 몰라. 전부 내 부정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야. 누군가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건 나야.

가짜 생각이 주장하는 바가 얼토당토않은 거짓부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목을 감싼 켈리의 머리카락이 내 트라우마가 만들어 낸 헛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나 숨통이 조이는 착각에 빠지고 나니 침착하게 사고할 여유가 사라졌다.

내 무릎을 부수고 싶어.

아무리 들이마셔도 숨이 가빴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주변을 더듬어 적당히 묵직한 돌조각을 찾았다. 그걸 들고 무릎을 봤다. 있는 힘껏 내려치면 숨을 쉴 수 있게 될까?

손톱을 뽑고 싶어.

돌을 감아쥔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들쭉날쭉 대충 정리된 손톱. 혐오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돌멩이를 내려놓은 다음 손끝을 물어뜯었다. 비릿한 맛이 났다.

심장을 도려내고 싶어.

얼룩덜룩한 열 개의 손톱이 끝내 향한 곳은 나의 가슴팍이었다. 긁고, 두드리고, 신음이 나올 만큼 강하게 쥐어뜯어 보았으나 심장에는 닿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허리춤에 달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숨이 너무 막혔다. 숨이….

나는 지옥에 떨어져야만 해.

내 검은 몸체가 길어서 뭘 도려내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하릴없이 거꾸로 뒤집었다. 손잡이를 멀리 두고 검날 중간 부근을 움켜쥐니 손아귀가 아려 왔으나 개의치 않았다. 딱딱 부딪히는 이를 악물고 검을 치켜들었다.

다음 순간 커다란 충격이 심장을 옥죄었다. 으레 닥치리라 기대한 아픔이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나 내 왼 가슴을 감싼 손등이 빨갛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햇볕에 가벼이 그을린 색과 투박하게 불거진 손뼈, 검지와 중지 사이에 박힌 작은 점이 눈에 익었다.

“카일!”

소스라치게 놀라 외치자 카일은 자유로운 손으로 그의 다른 손등에 박힌 검을 확 빼고는 멀리 던졌다. 차마 못 다 참은 신음이 귀에 꽂힌 찰나 찬물을 맞은 듯이 정신이 또렷해졌다. 나는 울지 않기 위해 애쓰며 그의 손을 부여잡았다. 처참하게 찍힌 상처는 뼈가 보일 정도로 깊었다.

낭패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감쳐무는 블로썸에게서는 죄책감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만일 걔한테서 어떤 감정을 캐낸다면 나를 없애려는 시도가 좌절됨으로 인해 느낀 언짢음뿐일 것이었다.

혹은 막연한 공포. 아마도 인간의 말을 하는 개미가 달려들 적에 나를 사로잡았던 두려움과 비슷할. 블로썸의 기준에서 우리는 멋대로 영혼을 가져서는 안 되는 존재였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아무래도 블로썸이 우리의 삶도 그녀의 삶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었음을 이해하길 바라기는 무리가 있었다.

근데 그건 쟤 사정이고. 고통에 덜덜 떠는 소꿉친구를 보고 있자니 화가 나서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도대체 얼마나 나를, 카일을, 모두를 괴롭게 해야지 만족스러울는지 몰랐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주인공이 아닌 인물들을 마음껏 다루어도 된다는 법은 없었다.

주먹을 말아 쥐고 다리를 세웠다. 전지전능한 주인공이고 자시고 조져 버리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릴 것만 같았다. 고작 동네 말괄량이에 지나지 않는 나로서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되리라는 냉정한 판단은 뇌리에서 지운 지 오래였다. 깨질지언정 쳐야 했다.

그때였다. 블로썸의 뒤통수에서 웬 손이 튀어나와 그녀의 눈을 가렸다. 곧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빛이 번쩍인다 싶더니만 블로썸의 자세가 크게 허물어졌다. 나와 대치하느라고 방심한 틈을 타 켈란이 그녀를 기절시킨 것이었다. 위협하듯 윙윙거리던 소용돌이가 허무하게 흐트러졌다.

긴장이 풀리자 힘이 쭉 빠졌다. 서서히 무너지는 내 몸뚱어리를 카일이 가까스로 받아 냈다. 나와 소꿉친구는, 배경 인물과 서브 캐릭터는 만신창이인 채 서로에게 매달렸다. 마치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듯이.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켈란이 입을 열었다. 그는 우선 학생회장으로서 블로썸의 폭주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함을 표했다.

“라미레즈와 케이시는 학생회가 책임지고 치료할 거야. 아리를 맡길게. 많이 놀랐을 테니.”

너무 건조해서 먼지가 묻어날 것만 같은 음성이 고요한 공기 밑바닥에 깔렸다.

“너….”

켈란의 발화 어느 부분이 카일을 자극했나 보았다. 혹은 일견 사무적인 듯하나 묘하게 짜증스러운 그의 태도가 그랬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카일은 원래도 켈란에게 꽤나 예민했던 것이다. 그가 사납게 내뱉었다.

“일부러 기다렸지. 진작 제압할 수 있었으면서. 로즈마리 블로썸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아리가?”

아무래도 켈란은 이번에도 나를 믿지 않기로 정한 모양이었다. 역시 슬펐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나는 켈란 때문에 울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가 있었으며 사마귀가 이르길 여자란 한 입으로 두말해선 안 되었다.

무언가 지껄이는 대신 카일의 어깨에 이마를 대었다. 사방에 진동하는 피 냄새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자 카일은 내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피스 전시관 앞에서 내 발을 만졌을 때처럼 말이다. 그러고 나서는 이렇게 말했다.

“야, 켈란 일레스티아. 나는 여태껏 네가 이 빌어 처먹을 세계에서 가장 운 좋은 자식인 줄 알았어… 부러워서 미칠 것 같다고 생각했지.”

여느 때와 비슷하여 선선하고, 일말의 장난기까지 느껴지나 끄트머리만은 뾰족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나는 카일이 아주 많이 화가 났음을 짐작했다. 내가 그의 마력선 모형을 부수었을 때보다 훨씬 더.

“지켜보려고 했어. 왜냐면 아리가 널 선택했잖아. 몇 번이나. 너희 결혼식에서 읊을 축사까지 연습했어.”

기다란 거울 앞에 서서 좋아하는 여자애의 결혼식을 준비하는 카일을 상상해 보았다. 짝다리를 짚었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고블릿 잔을 드는 각도를 이리저리 바꿔 보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그려 보기도 하면서. 애틋해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생각이 바뀌었어. 더는 너 안 부러워해.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을 거라고. 솔직히 말해서, 요새 좀 가능성 생긴 거 같아.”

내가 절찬리에 흔들리는 중이라는 사실을 카일도 안다기에 쪽팔렸다. 한편으로는 그가 가능성 운운하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궁금해졌다. 켈란이 어떤 표정으로 그걸 듣고 있는지도. 켈란을 등지고 카일에게 기댄 채였으므로, 나로서는 정황을 귀로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아무렴 어때 싶어졌다. 만일 켈란이 나에 대해 미약하고 나약할지언정 가끔씩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감정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일부러 매들린의 사과파이를 언급하며 카일을 열받게 했다 하더라도, 당최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 생각에 사랑과 신뢰는 떨어져선 안 되었다.

“우리 결혼식에 축사를 읊어 준다면 영광스럽겠어.”

또한 열받게 굴기를 카일 빌라드만큼 잘하는 자식은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없었다. 진짜로 구름 같은 인파가 오로지 그를 때리기 위해 모일 정도였는데, 그중에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공간 이동 멀미를 감수한 에드가 라모스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만일 수확의 달 연회가 다시 열린다면 카일의 ‘펀칭 부스’ 앞에 우아하게 선 켈란을 볼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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