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39화 (139/178)

“단순한 호기심이야?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 누가 너더러 내 뒤를 캐라고 시켰어? 켈란?”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하려다가 그만 말문이 콱 막히고 말았다. 여기서 뜬금없이 켈란 일레스티아가 왜 나와?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에드가의 기세가 매우 흉흉해졌다.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재빨리 아무 말이나 주절거렸다.

“아니야! 나는 널 도우려고….”

“진짜로?”

“…….”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정확히는, 도울 마음도 분명히 있었으나 그보다 게임의 어느 줄기와 얽혀 있을 에드가의 속사정을 알아내야 하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즉시 긍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니 에드가는 기가 찬다는 듯 짧게 웃었다. 짖는 것 같은 소리였다.

“야, 난 너를 원해. 바빠 죽겠는 와중에도 질투에 눈 돌아가서 얼간이처럼 네 뒤나 밟고 있을 정도로. 알잖아. 그런데 감히 내 감정을 그따위로 이용해 먹어?”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켈란과는 전혀 관계없어. 내가 궁금해서 알아보는 것뿐이야. 너도 제이든도 내게는 소중한 친구니까, 너희가 화해했으면 해서….”

“화해?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를 화해시켜? ‘친구’라서? 진짜 그렇게 여긴다면, 끼어들지 마. 선 넘지 말라고. 내가 누구랑 왜 싸우든, 막말로 어디서 죽어 나자빠지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민감한 과거를 분별없이 들쑤시고 다녔으니 에드가 입장에서 열 받고도 남을 일임을 이해했다. 하지만 내 목적은 나와 소중한 사람들의 손발을 묶은 운명의 물레를 깨부수는 거였다. 게임에 대해 파헤치는 것도 결국에는 에드가를 돕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뭐라고? 죽어 나자빠지든 무슨 상관이냐고?

전신에 흐르던 피가 머리로 쏠리는 감각이 적나라하게 들었다. 그를 포함한 내 친구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되새긴 게 방금인데, 절대 죽지 않겠다고 약속한 주제에 당연하다는 듯이 죽음을 입에 담는 에드가가 너무 야속했다. 경악스럽고 화가 나서 크게 소리쳤다.

“에드가 라모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비뚤어졌어?”

“어차피 친구란 건 고작 그 정도 사이잖아. 농담 따먹기나 하고, 시답잖은 가십이나 나누고, 졸업하고 나서는 졸업생 대상 아카데미 운영비 모금 행사에서나 멀리서 보겠지. 만일 전쟁이라도 나면 등에 칼 꽂을 기회만 노릴 거고. 나도, 너도, 켈란 일레스티아도, 네가 그렇게 싸고 도는 제이든 스펜서도 마찬가지야. 어쩌면 더할 수도 있겠네. 저 자식은 이미 한 번 친구를 배신한 전적이 있으니까.”

“야!”

에드가의 쭉 뻗은 손가락 너머로 너른 어깨를 잔뜩 웅크리는 제이든이 보였다. 너무 애처로운 모습이라 순간 뚜껑이 확 열렸다. 암만 대륙에서 신이나 신의 사도 다음으로 강한 존재라고 해도 내 눈에 제이든 스펜서는 여전히 지켜 마땅한 순둥이였다.

“그럼 제이든이 어떻게 했어야 했다고 생각해? 타국 왕족의 망명을 돕고 대륙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받을까? 부모님이나 사용인, 영지민의 목숨까지 걸어 가면서? 얘한테는 그게 최선이었어! 네가 아직까지 이러는 거, 화풀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찰나, 에드가는 내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곧바로 벼락과도 같은 깨달음이 내리쳤다. 부주의했다고, 주워 담기 어려운 실수를 저질렀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지랄 맞은 단어들이 모조리 내 혀를 떠난 뒤였다.

에드가의 이름은 원래 브라이스였다. 지금은 아니다. 두 사람이 뒤바뀐 시점을 깊게 따져 본 적이 없어서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양손을 겹쳐 입술을 꾹 눌렀다. 실은 아주 후려치고 싶었는데, 요란을 떨어 봐야 나아질 상황이 아니라서 겨우 참았다.

제이든이 말한 공간 이동 마법에 능한 브라이스는 아마 에드가일 것이었다. 그러나 벨벳 커튼을 헤치고 나온 브라이스 나돈은… 농담의 달 연회 날의 기억이 아득히 되살아났다. 닥치는 대로 쏘아대던 에드가의 목소리와 그를 달래는 형제의 목소리. 스펜서 저택을 ‘브라이스’로서 떠나기로 결심한 건 그였다고.

스펜서 저택의 발코니에서 벌어진 사건을 단순한 어리광으로 치부해선 안 되었다고 느꼈다. 어쩌면 그들은 정말로 도망치려 했나 보다. 지긋지긋한 왕궁을 빠져나와, 갈망하던 자유를 거머쥐려 했지만, 그게 뭔지 잘 몰라서 망설이다가 친구를 찾았을는지 모른다. 그토록 끔찍이 여기는 어머니의 존재를 까맣게 잊을 만한 괴로움에 시달리는 중일 수도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제이든의 잘못은 없지 않았으나 지극히 적었다. 그는 쌍둥이의 친구이기 이전에 스펜서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지극히 합당한 대처를 했다. 에드가도 충분히 이해했을 거다.

그러나 이해와 용서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어쨌든 제이든이 누설한 비밀로 인해 쌍둥이의 신분은 완전히 뒤바뀌었으며, 한때 형이었던 동생은 그의 동생이었던 형에게 씻을 수 없는 부채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내가 방금, 에드가 라모스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 자리에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켜 사라지는 에드가를 막지 못했다. 염치도 없이 손을 뻗어 보았으나 닿는 거라고는 쓸쓸한 기운뿐이었다.

가게의 반절 가량이 난데없는 마나 폭풍에 휩싸였다. 과자와 음료는 물론이요, 식기마저 전부 공중에 뒤섞였다.

얼굴을 온통 뒤덮은 크림을 앞치마로 닦아 내며 다가오는 드워프 점원에게 제이든이 금화를 주머니째로 건네었다. 용기 있는 몇몇이 짜증스레 ‘저기요’라고 말했다가 그의 몸집을 보고 분노를 조절했다.

“미쳤나 봐, 진짜, 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볼에 얹어 막 때렸다. 그랬더니 착하고 깜찍하지만 다소 맹목적인 구석이 있는 나의 친구는 고민하는 척도 않고 고개를 젓기부터 했다.

“네 잘못 아니야.”

“내 잘못이야, 제이든! 가만 보면 너도 나한테 완전 후한 것 같아. 도대체 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이는 거야?”

“좋아하니까….”

솔직히 기쁘긴 한데 도움은 안 됐다. 거칠게 마른세수한 뒤에 제이든을 똑바로 앉혔다. 오묘하게 빛나는 이끼색 눈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자, 따라 해 봐, 제이든. ‘아리엘 달튼은 얼간이야’.”

“넌 얼간이가 아니야.”

“‘아리엘 달튼은 못됐어’.”

“하나도 안 못됐어.”

“‘아리엘 미첼 달튼은 못돼 처먹은 얼간이야’.”

“…….”

따박따박 말대꾸하던 제이든은 끝내 침묵으로 반항하기를 택했다. 고집스레 다물린 입매를 노려보다가 난장판이 된 테이블에 넙죽 엎드렸다. 여섯 번째인데, 어쩌면 여섯 번보다 훨씬 많이 반복했을지도 모르는데, 여전히 참 어려웠다. 열아홉 살 여자애로 산다는 게.

***

에드가 라모스가 결계술 교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원래 수업에 잘 안 나오는 자식이긴 했는데, 그와 갈등을 겪은 직후이다 보니 통 신경이 쓰였다.

뻥 안 치고 온종일 에드가를 찾아 헤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방황하다가 어디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냅다 뛰곤 했던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사과할 건 하고. 내 추측대로 어느 날의 스펜서 저택에서 쌍둥이가 뒤바뀐 것이 맞는다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열 좀 받는다고 되는 대로 지껄여서는 안 될 문제였다.

죽어라고 달려 봐야 속수무책이었다. 상대는 대륙 끝에서 끝까지 마나를 타고 움직이는 천재 마법사 에디였다. 그가 작정하고 나를 피하려 드는 이상 도리가 없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느라고 종아리만 실컷 단단해졌다. 이따 기숙사 가면 브리한테 안마해 달라고 해야지. 걔는 요새 나에 대한 부채감에 젖어 있어서, 내 부탁은 어지간하면 다 들어 줬다.

별 소득 없이 한나절이 갔다. 오늘의 마지막 수업은 마도구 제작 실습이었다. 나는 되도록 긍정적인 생각으로 머리를 채우려고 노력하며 북쪽이 아니라 잃어버린 물건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마법 나침반을 제작했다.

마음가짐과 달리 계속해서 유감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다. 내 손을 탄 나침반은 다른 애들 것과 달리 바늘이 되게 방정맞게 움직였다. 잃어버린 물건이 너무 많거나 마법 회로에 마나가 너무 빨리 도는 모양이었다.

하릴없이 마나 코어와 중심 회로 사이에 설치할 압력 조정기를 빌리러 탤론 시청 마도구 관리 부서 채용 내정자의 자리를 기웃거렸다. 카일은 내 나침반의 환상적인 춤사위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의 압력 조정기에 조그마한 하트를 그려 건네었다.

그러고 나서는 에드워즈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슬쩍 귀띔했다. 드디어 피츠시몬스에서 가장 매끄러운 혀가 크리스타 에드워즈의 철옹성을 무너뜨렸나 보다. 하루 동안 들은 소식 중에 제일 반가웠다.

땅딸막한 드와이어 교수가 폴짝 뛰지 않고 연단을 내려가기 위해 애쓰는 틈을 타 신문부실로 갔다. 그랬더니, 세상에, 줄을 설 필요가 없었다. 이마에 이따만 한 혹을 단 글렌 차베즈는 나를 발견하자 죽어라고 노려보면서도 순순히 문을 열었다.

문간에 다리를 티 나게 뻗는 차베즈를 무시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발이 걸려서 휘청대는 척하면서 뒤꿈치로 차베즈의 정강이를 콱 찍었다. 나의 욕구와 그의 욕구가 동시에 충족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닐 수 없었다.

차베즈의 찢어지는 비명이 차츰 멀어졌다. 혀를 길게 내밀어 보인 뒤 돌아서자, 에드워즈가 귀를 틀어막고 있던 손을 성의 없이 흔들어 나를 불렀다. 꽤나 쌀쌀맞은 동작이 아닐 수 없었다.

“네게 직접 듣고 싶어서 불렀어.”

테이블에 무작위로 흐트러진 기삿거리들을 두 뭉치로 분류하는 에드워즈의 머리카락은 끄트머리가 곱게 말린 채였다. 사뭇 발랄한 모양새였다. 반면 안색은 매우 흐렸다. 도무지 뭐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아무튼 에드워즈의 명패를 기준으로 왼편에 쌓인 종이들에는 내 이름이나 별명이 심심찮게 적혀 있었다. 오른편에 놓인 것은 여느 때처럼 학생회를 소재로 한 아무래도 좋은 가십이었다. 나는 이 대담이 에드워즈와 피츠시몬스 타임즈가 향후 취할 태도를 결정할 것임을 직감했다.

“농담의 달 연회 때.”

이윽고 에드워즈가 던진 질문은 내가 그녀로부터 얻으리라고 상상한 어떤 것도 아니었다.

“빌라드가 나에게 춤을 신청한 건 네가 시켜서였어?”

의자에 앉으려다 말고 버벅거렸다. 카일은 대체 얘한테 무슨 소릴 지껄인 걸까? 마시멜로 동물 경주를 빛낼 최고의 바람잡이, 빌라드 중 제일가는 달변가, 가장 믿음직한 허풍선이 칭호도 옛말 같았다.

뭐가 어찌 되었건 간에, 내가 에드워즈라면 버터가 되든 치즈가 되든 진실을 알고 싶을 듯했다.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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