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38화 (138/178)

“졸업 시험 준비는 잘되어 가?”

드워프 점원의 키는 테이블보다 약간 작았으므로, 그녀는 쟁반을 머리 위에 얹고 솜씨 좋게 다녔다. 어지러이 놓인 테이블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야무진 뒷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럭저럭? 일단 악몽을 먹는 브로치를 사 놨어. 엄청 긴 꿈을 꾸는 느낌이래서.”

“재밌겠다. 나는 평소에도 꿈 잘 안 꿔.”

“정말? 나는 거의 맨날 꿔. 어제도 꿨어. 아빠가 자기 임신했다면서 나더러 여동생이 좋냐 남동생이 좋냐고 물어봤어. 개꿈이지.”

“달튼 자작?”

“배가 무지하게 나왔거든. 제럴드 퍼셀보다 더 나왔어. 과장 좀 보태서 엎드리면 바닥에 손이아슬아슬하게 닿을 정도라니까.”

네 번이나 치렀던 졸업 시험을 가지고는 대화를 오래 끌기가 어려웠다. 또 제이든은 워낙 과묵한 편이어서, 겹치는 지인을 한 번씩 언급한 뒤에는 딱히 떠들 거리가 없어졌다. 원래 같았으면 실없는 우스갯소리나 그가 항상 질색하는 여친 선발 대회 이야기라도 질리지 않고 했을 텐데, 머릿속에 딴생각이 들어차 있다 보니 그러지 못했다.

쌍둥이에 대한 화제를 언제쯤 꺼내야 자연스러울지 가늠하며 빵칼을 집어 들었다. 파이를 장식한 꿀 절임 배 조각은 너무 얇게 저며져 있어서 잘리는 대신 자꾸 날에 달라붙었다. 접시 가장자리에 빵칼을 마구 쳐서 배 조각을 떨궈 내는데, 문득 목소리가 울렸다.

“궁금한 게 뭐야?”

“티 나?”

“나한테까지 기회가 돌아오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으니까.”

허를 찔린 기분이 되었다. 먹기 좋게 잘린 파이를 입에 넣지도 못하고 뚝딱거리니까 제이든은 농담이라고 답했다. 표정 변화가 미미했기 때문에, 진심을 말하고 있는 건지 도통 헷갈렸다.

돌이켜 보면, 확실히 제이든과는 근래 자주 놀지 않았다.

그도 나도 2학기 들어 부쩍 개인 사정으로 정신이 없었긴 했다. 그래도 복도를 오가며 눈인사하거나 괴롭힘 방패로 쓰는 것 외에도 교류가 있었다면 죄책감이 조금 덜 들었겠다 싶었다. 편의주의로 어울리는 듯이 느껴져서 영 찝찝했다. 얘한테 고백을 받은 게 바로 얼마 전이다 보니 더 그랬다.

월시와의 다사다난한 연애 기간에 도서관에 있는 연애 관련 책은 다 읽은 브리아나-연애 고수-모슬리가 이르길 이성 간 완전한 우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어떤 남자애가 책상 밑에 떨어진 내 물건을 주워 준다면, 그건 걔가 의식하든 그러지 않든 나를 잠재적 연애 상대로 의식한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혹은 나에게서 받아먹을 빵가루가 있거나.

일부 공감했다. 켈란에게 맛이 간 상태만 아니었더라면 옛저녁에 카일에게 홀랑 넘어갔을 게 분명했으니까. 가령 브레넌의 청혼 비행선에서라든가(나는 분위기에 잘 휩쓸리는 편이었고, 그날의 분위기는 충분히 휩쓸릴 만큼 낭만적이었으며, 남매나 다를 것 없다고 해서 우리가 진짜 남매가 되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는 에드가나 제이든이 고백했을 때도 아리엘 달튼의 오십 가지 그림자 중 하나쯤은 ‘눈 딱 감고 사귀면 안 되나?’라고 속삭였던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냥 동의할 수만은 없었다. 시작의 달 연회장에서 공개 고백을 했던 트레버 기븐스에게 나는 도주와 잠수로 답했다. 반면 카일과 에드가, 제이든에게는 확실히 의사를 전했다. 도망치는 게 나은 상황이었음에도 말이다.

그건 내가 그들을 기븐스에 비해 훨씬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서인 듯했다. 그따위 약아 빠진 감정이 우리가 쌓아 올린 우정에 영향을 끼치길 바라지 않았으므로.

“미안해. 비겁하게 굴어서.”

속내가 어떻든 겉으로는 떨어지는 빵가루 받아먹겠다고 입 쩍 벌린 꼴이었다. 진지하게 사과했더니 제이든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비겁하다면 나도 마찬가지야. 순수한 목적으로만 나온 건 아니니까.”

“어, 진짜?”

“내가 정말로 커스터드 크림 파이 때문에 여기 있는 줄 알았어?”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이든은 너무하다면서 미소 지었는데,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고 기댄 채 여유롭게 웃는 거대한 남자의 모습이 퍽 낯설었다.

“제이든, 너 변했어.”

“싫어?”

“아니야. 좋은 방향으로.”

“잘됐네.”

힘차게 긍정했다. 나는 제이든이 착해서 좋았지만 평생 착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착하게 사는 것보다 약게 살아서 이득 보는 경우가 세상에 너무 많았다. 가령 지금의 나처럼.

“만일 조금이라도 내키지 않는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내가 알고 싶었던 건, 에드가와 브라이스 나돈, 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야.”

내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제이든이 눈을 약간 치켜떴다. 이윽고 무언가 고민하는 것처럼 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을 입술 위로 얹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커스터드 크림 파이를 해치웠다. 마침 아이스크림이 파이 시트에 딱 알맞게 스며들어간 참이었다.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 안 나. 스펜서 공자의 옛 기억은 이그나스의 기억과 뒤섞여 있어서 부정확하거든.”

평생 닫혀 있을 듯이 굳어져 있던 입술이 달싹이기 시작한 것은 접시에 남은 아이스크림을 배 조각으로 싹싹 긁어 먹을 때쯤이었다. 나는 게걸스러운 꼴을 보였다는 수치심에 일부러 딴 데를 보며 주둥이에 대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았다.

“다만 마냥 물정 모르던 시절은 아니었어. 일곱 살? 아니면 여덟 살?”

“뭐? 나는 데뷔탕트 직전까지도 물정을 몰랐는데. 데뷔하면 다들 왕자 만나서 결혼하는 줄 알았단 말이야. 우리 왕자님이 나보다 열두 살 연하라는 걸 알고 포기했지만. 아무튼, 계속해 봐.”

“에드가와 브라이스는, 지금도 그런 면이 있지만, 그때는 정말로 자유분방했어. 정말로 틈만 나면 국경을 넘어 스펜서 저택으로 놀러 오곤 했지. 브라이스는 아주 어릴 적부터 공간 이동 마법에 능했으니까.”

제이든은 억양이 거의 없이 조근조근하게 말하는 편이었다. 또한 유심히 들어 보면 다정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마치 아가 아리 시절의 내가 침대에 누워 들었던 동화 같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가 묘사하는 광경을 머릿속에 그렸다. 공부방과 놀이방, 미로 정원에 고대의 요정처럼 불쑥불쑥 나타나던 빨간 눈의 소년들, 담쟁이덩굴을 헤치면 나타나는 비밀 통로, 거기서 나는 꿉꿉하고 퀴퀴한 냄새….

“너나 카일 못지않게 장난꾸러기였어. 당장 누군가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면 큰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굴었지. 남의 집을 제집처럼 헤집고 다닌 건 물론이고, 왕궁이 지긋지긋하다고, 도망치고 싶다고, 밀루아와 스펜서 공작가가 그들의 망명을 받아 줘야겠다고 습관처럼 불평했어. 무리한 주장으로 어른들을 실컷 당황하게 한 뒤에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더라. 두 사람도 왕족에 걸맞은 교육을 받았으니 타국의 귀족 대상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았을 거야.”

“어리광 한 번 살벌하네…”

“어리광이었지. 의심할 여지 없이. 적어도 그날까지는.”

어느 여름에, 쌍둥이는 스펜서 공작가의 연회장 구석,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진 발코니에 조용히 등장했다. 오로지 제이든 스펜서만이 그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냐면 형제와도 같은 친구들이 비밀을 지켜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않고 며칠을 보냈다. 다만 맘에도 없는 반찬 투정을 해서 빵이나 초콜릿 같은 간식을 잔뜩 얻어 낸 다음 소매나 바지춤에 쑤셔 넣기나 했다. 침대 아래 고양이를 두고 기를 때와 비슷했다.

대충 여드레가 지났을 즈음 공작 부부가 근심스레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돈의 막내 왕자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제이든은 연회장의 발코니에 있는 두 사람이 고양이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했다. ‘형제 같은 것’과 ‘형제’인 것은 전혀 다르며, 그가 스펜서의 403번째 아들로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밤에 엄청나게 무섭게 생긴 기사들과 마법사 두어 명이 공작가를 찾았다. 그들이 붉은 벨벳 커튼 앞에서 ‘왕자 저하’를 몇 번 외치자 브라이스 나돈이 나타났다. 말끔한 얼굴이었다.

다음으로는 에드가 라모스가 나왔다. 그는 아주 통곡을 했으며, 기사에게 끌려가는 동안 제이든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너 같은 건 친구도 아니라고, 당장 꺼져 버리라고, 더는 자기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악썼다. 그런 뒤에는 두 번 다시 스펜서 저택에 방문하지 않았다.

쌍둥이가, 특히 브라이스 나돈이 그의 혈통을 증오하는 걸 알았다. 누군가는 태양 아래 묶이고, 누군가는 그림자 속에 묻혀야 하는 처지를. 형제의 불신으로 다른 형제의 악의를 상대하는 짓거리에 진절머리가 난 것도.

하지만 그 모두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존재하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로즈마리 왕비가 미쳐서나마 숨을 쉬는 이상 두 사람은 지긋지긋한 왕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왕족의 어리광은 살벌한 데다가 뒤끝이 길었다. 제이든이 말을 마친 뒤에도 내게는 그 정도의 감상만이 남았다. 적어도 그가 날 선 증오를 십 년이나 받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는 못했던 것이다. 에드가의 입장은 또 다를 수 있겠지만서도.

거기까지 생각했는데 불현듯 어깨가 무거워졌다. 곧 더운 숨과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내 과거가 궁금하면 나를 찾아야지, 자기야.”

슬쩍 시선을 돌리자 내게 눕듯이 기대 나를 빤히 보는 에드가가 지나치게 가까이 있었다. 웃음기 어린 말투와 달리, 과장되게 휘어진 눈에는 서슬 퍼런 기운만 가득했다. 퍼뜩 놀라 몸서리치니 그는 몸을 반쯤 돌린 다음에 내 의자의 등받이와 테이블 끄트머리를 쥐었다.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에게도 같은 걸 물어봤었지. 메이브에게 접근한 이유도 동일할 테고. 갑자기 신상을 파고 다니길래 나한테 관심이라도 생긴 줄 알았는데.”

에드가는 정확히 내가 허리를 뒤로 젖히는 만큼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우리의 거리는 여전히 가까웠다.

“내 착각이었나 보네.”

가볍게 지껄인 에드가가 흥미를 잃었다는 듯 물러나자 거짓말처럼 긴장감이 사라졌다. 나는 꽉 쥔 주먹만큼 힘껏 참았던 숨을 살며시 뱉어 냈다. 곁눈질로 제이든을 보니 그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빵칼을 끼우고 엄지로 칼날을 툭툭 치는 중이었다. 하마터면 큰 소동이 벌어질 뻔했음을 직감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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