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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26화 (26/178)

26화

그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베릭의 커다랗고 거친 손바닥이 내 정수리에 와 닿았다. 머리카락의 일부를 땋아 묶은 모양새가 마구 흐트러졌다. 나는 릴루가 사냥을 할 때처럼 맹렬히 그의 손을 쳐 냈다. 카일이 내 손을 잡아끌어 제 왼쪽에 세우고 나와 마베릭의 사이로 섰다.

“왜 하필 마베릭이 온 거야?”

“아버지 허리가 또 말썽이거든. 그래도 내가 와서 좋지, 아리엘?”

“제발, 형!”

카일이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마베릭과 함께 있을 때면 카일은 평소보다 어른스럽게 굴었다. 마베릭이 그만큼 나잇값을 못 하는 탓이었다.

우리는 광장에 마련된 차양막 아래 앉았다. 브레넌의 마법 자물쇠 좌판이 깔려 있었던 자리에서 커크패트릭이 레모네이드를 팔고 있었다.

브레넌과 카일은 닷새가 채 지나기 전에 마법 자물쇠로 가득 차 있던 궤짝 두 개를 비우고 거기에 금화를 담았다. 브레넌은 그걸 알뜰하게 써서 가장 낭만적인 청혼용 마력선을 빌렸다. 마력선은 사랑의 달 연회의 마지막 날 밤에 피츠시몬스 하늘을 장식할 것이었다.

친구가 행복해하는 것을 본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는 정말로 이마를 바닥에 대어 가며 감사를 표하던 브레넌을 떠올렸다.

1학년 때의 그는 출신에 대한 열등감 때문인지 누구보다 더 귀족스럽게 행동했었다. 엎드리기는커녕 신발 끈을 묶기 위해 숙이는 것조차 수치스럽게 여겼던 게 브레넌 스톡스였다. 사랑이 뭐라고 그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을까. 궁금했다. 부럽기도 했다.

세 잔 같은 두 잔의 레모네이드를 사고야 말겠다는 카일과의 실랑이에서 패배한 커크패트릭이 씩씩거렸다. 나는 그의 아버지와 미스 프록터가 지금쯤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을 것을 상상하며 카일이 가져온 레모네이드를 들이켰다. 시고 달아서 입술이 일자가 되었다.

“리즈!”

“싫어요!”

문득 어딘가에서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와 카일과 마베릭과 심지어 커크패트릭마저 한 곳을 보았다. 브레넌 스톡스의 여자 친구인 엘리자베스 맥카시가 거기에 있었다. 그녀의 부모님과 함께였다.

“말했잖아요, 남자 친구가 있다고요!”

“설마 네가 말하는 ‘남자 친구’가 그 남작가 나부랭이는 아니겠지?”

“브레넌을 ‘남작가 나부랭이’라고 말하지 말아요!”

리즈는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악을 썼다. 맥카시 백작부인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수많은 시선이 자신들을 향한 것을 깨닫자 눈을 질끈 감았다. 백작은 화가 많이 난 모양인지 얼굴이 울긋불긋했다.

“아, 맥카시 백작의 둘째 딸인가 보군.”

“알아, 마베릭?”

“저 아가씨와 대릴 코완이 약혼을 한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왜, 코완 후작가의, 공무원 하는 자식 있잖아.”

“뭐? 약혼?”

“약혼?”

우리가 동시에 대꾸하자 마베릭은 크게 당황했다.

“어. 안 돼?”

“안 되지! 리즈랑 브레넌은 4년 내내 사귀었다고!”

“아카데미에서 연애하는 거랑 결혼이 무슨 상관이야? 게다가 ‘남작가 나부랭이’인 것 같은데, 듣기로는.”

“첫째, 브레넌은 나와 아리의 친한 친구니까 아무리 형이라도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둘째, 걔는 곧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할 예정이야.”

카일이 손가락을 접으며 정색을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베릭은 머쓱한 듯이 귓가를 긁었다.

“잘될지 모르겠네, 그 청혼. 너희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새 맥카시 백작가 형편이 그다지 좋지가 않아서 말이야.”

“왜?”

“작년이 워낙에 흉년이었잖아. 어쩔 수 없이 고리대를 빌렸는데 감당이 안 되나 봐. 하긴, 돈 나올 구석이라고는 영지뿐인데 맥카시 백작이 또 수탈이 체질은 아니다 보니.”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코완 후작가의 지참금은 맥카시 백작가에겐 최선의 선택이야. 게다가 대릴 코완은 한량인 것도 아니고, 성격이 모난 것도 아니고, 나이도 적당하잖아. 사실 최선 수준이 아니라 차고 넘치지.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나 보던데? 네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아이, 씨.”

내가 위협적으로 주먹을 흔들어 보이자 마베릭이 잽싸게 몸을 물렸다. 그러자 카일이 그것을 손으로 감싸 내리며 말했다.

“형 말은 알겠는데, 엘리자베스가 저렇게 거부하는데도 약혼이 될까?”

“언제까지 거부할 수 있겠어? 쟤라고 해서 귀족의 결혼이 감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닐 텐데. 가족뿐만 아니라 영지민들의 목숨까지 걸려 있는데, 그걸 못 본 체하겠다면 귀족이라고 할 수 없지.”

마베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말에도 확실히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나와 카일은 지극히 심각해졌다. 피츠시몬스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각자의 작위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을 없애 보다 다양하고 긴밀한 교류를 가능하게끔 했지만, 귀족으로서의 의무 또한 잊게 만들곤 했다.

대화의 키는 이제 브레넌 스톡스에게로 틀어졌다. 우리는 브레넌이 어디에 있을지, 과연 이 소식을 접했을지, 아직 접하지 못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전해야 그가 덜 상처받을 것인지에 대한 심도 깊은 의견을 나누었다.

또 우리는 마법사인데, 어째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마법 주문 같은 건 세상에 없는지에 대해서도.

***

자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마법 주문에 가장 가까운 것은 돈이었지만, 돈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심신의 안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엘리자베스 맥카시에게 심신의 안정을 줄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여자들만의 시간이었다!

나는 리즈의 마물학 교재에 작은 초대장을 그려 그녀를 우리 방에서 열리는 밤샘 살롱에 초대했다. 드레스 코드는 잠옷이었고, 애완동물을 포함하여 누군가 동반하는 행위는 금지되었다(릴루는 질투가 아주 많았으므로 다른 동물이 자기보다 관심을 더 끌면 미치려고 했다.).

또, 모든 손님은 반드시 매점에서 한 종류 이상의 과자를 사 와야 했다. 나는 ‘예를 들어 : ’ 옆에 ‘4대 원소 감자칩’을 세 번이나 적었다. 4대 원소를 매운맛, 짠맛, 단맛으로 표현한 과자인데, 정확히 따지면 3대 원소지만 봉지에 과자보다 공기를 더 많이 채움으로써 콘셉트를 지킨 뻔뻔함이 내 취향을 저격해 요새 한참 빠져 있었다.

리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가 완전히 짓물러 있어서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또 괴상한 가발을 뒤집어쓰고 보조 마법 실습실에 들어온 카일에게 얼핏 듣기로는 브레넌도 거의 넋을 놓았다고 했다.

나는 브레넌을 카일에게 맡기고 브리아나-똑똑이-모슬리에게 자문을 구했다. 브리는, 처음에는 그녀의 어머니를 통해 ‘오리’에게 편지 몇 통만 보내면 맥카시 백작가가 급한 불은 끌 만한 황금알을 낳아 줄 것이라고 했다(‘오리’는 브리가 아버지를 부르는 별명이었다.).

내 생각에 그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브리는 밀루아 사람이 아니었고 타국의 귀족으로부터 받는 원조가 밀루아 왕실에 어떻게 비칠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자칫 브리아나의 존재가 일레스티아에 알려질 가능성도 있었다. ‘오리’의 배가 갈라지면 그녀는 평생 황금알을 얻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명쾌하게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그럼 우리가 해 줄 건 하나뿐이네.’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하고 나서, 나는 리즈를 우리만의 밤샘 살롱에 초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살롱에 예술이 빠질 수 없었으므로, 5학년 최고의 음유 시인 켈리 라미레즈도 함께였다.

결계술에 뛰어난 켈리는 잠옷에 밴조를 메고 방의 모퉁이마다 마법진을 그렸다. 그것이 방음 결계가 되어 흥겨운 연주와 은밀한 비밀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해 줄 것이라고 했다.

나와 브리의 침대 사이에 놓인 테이블에도 조그마한 결계가 쳐졌다. 이건 인간이 먹는 건 다 입에 대야만 직성이 풀리는 욕심쟁이 고양이를 위한 조치였다. 릴루는 우리가 테이블에 늘어놓은 과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몸을 던졌으나, 영문도 모른 채 바닥에 널브러질 수밖에 없었다. 멍청하고 귀여운 릴루.

“난 고양이를 싫어하지만 쟤는 좀 귀여운 것 같아.”

끝내 죄 많은 고양이 릴루의 매력에 굴복하고야 만 브리가 속삭였다. 나는 4대 원소 중 흙을 형상화해 초콜릿이 씌워진 감자칩을 앞니로 부러뜨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동물과 남자는 바보 같을수록 귀여운 법이야.”

켈리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케이시에게 헌정하는 곡이라며, 빵빵한 근육의 백치남을 찬양하는 자작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노먼 케이시와 켈리 라미레즈는 그들이 3학년 때 잠깐 사귀었는데, 연애할 때 상대를 구속하길 좋아하는 케이시가 켈리의 자유분방함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헤어졌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 달랐다. 켈리는 케이시가 ‘장래 희망’을 ‘장례 희망’이라고 적는 것을 보고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고 했다.

“이제 곧 졸업인데 좋은 장의사는 찾아 두었니, 오, 노오먼.”

“노오먼.”

나와 리즈는 켈리의 노래에서 제일 인기 있는 구절에 놓치지 않고 화음을 넣었다. 너무 웃겨서 오열 중이던 브리는 가까스로 마지막 세 음절만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켈리의 열창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는 정적이었다. 과자를 먹는 소리와 포기를 모르는 릴루의 발톱이 결계에 닿는 소리를 가르고 엘리자베스가 대뜸 말했다.

“넌 좋겠다, 아리엘.”

목소리가 퍽 울적했다.

“너랑 카일은 아무도 안 막을 거 아니야, 결혼하는 거.”

“내가 걔랑 결혼을 왜 해?”

“맞아, 둘이 별거 없댔어. 그저 같은 욕조에 들어가 본 것뿐이래.”

나는 오해 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브리의 팔뚝을 찰싹 두드렸다. 나는 손이 제법 매운 편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하얀 팔뚝은 내 손바닥의 면적만큼 빨개졌다. 켈리가 그것을 삿대질하며 낄낄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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