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별관 뒷문으로 이어지는 계단참에 앉아서는 손가락 사이에 풀을 끼워 흔들며 릴루와 놀고 있던 제이든 스펜서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열한 살 먹은 할머니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조그마한 릴루는 거대한 제이든과 함께 있으니 어제 태어난 고양이처럼 보였다.
제이든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내가 입에 담은 이름을 발음한 다음, 릴루를 바라보았다. 그가 풀의 끄트머리로 릴루를 가리켰다. 릴루는 그것을 잡기 위해 크게 점프했지만, 제이든이 잽싸게 손목을 움직이는 바람에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네 고양이야?”
“안녕, 제이든. 그리고 클레이.”
제이든 스펜서의 오른쪽 어깨에 클레이가 앉아 있었다. 전에 봤을 때는 내 팔뚝보다 작았던 것 같은데 얼마나 지났다고 훌쩍 커 있었다. 그래도 제이든의 어깨가 하도 넓다 보니 거기 클레이가 앉았다고 해서 그다지 버거운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클레이는 내가 아는 척을 하자 가슴을 내밀고 좋아했다. 나는 반질반질한 비늘로 감싸인 그의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고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건네었다. 그러자 그가 짧은 앞다리로 사탕 봉지를 야무지게 비틀어 내용물을 꺼내 먹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기특했다. 우리 릴루는 대체 얼마나 더 커야 알아서 뭔가를 하려고 할까.
“내 고양이 맞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릴루가 너를 공격하지는 않았지?”
나는 제이든이 자리한 계단참에 나란히 앉으며 그에게도 사탕을 건네었다. 그가 미묘하게 화색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손톱을 바짝 깎은 탓에, 그는 사탕 봉지를 까기 위하여 클레이보다 오랜 시간을 바스락거려야만 했다.
제이든이 사탕에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릴루에게는 지금 이 순간 그녀를 가장 안달 나게 만드는 풀 쪼가리를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나는 릴루가 제이든의 손아귀를 뚫어져라 보며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할 때 풀을 클레이의 꼬리에 묶었다.
클레이는 릴루의 주위를 가볍게 날면서 릴루를 약 올렸다. 릴루는 클레이의 꼬리가 자아낸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을 쫓는 것에 지쳤는지 금방 제이든의 무릎으로 올라와서는 빵 덩어리처럼 앉았다.
“네가 마음에 들었나 봐. 널 싫어하는 생물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나는 엄청나게 뿌듯해졌다. 모르는 사람은 일단 때리고 보는 릴루가 제이든에게만은 상당히 의젓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열한 살짜리 할머니 고양이가 갑자기 굉장한 정신적 성장을 이룩한 것 같지는 않았고, 제이든 스펜서가 용뿐만 아니라 생물 전반을 다루는 데 특출난 탓인 듯했다.
근방에서 자생하는 동물들이 제이든을 서식지로 삼는 광경을 목격하기란 피츠시몬스 학생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아직 관심이 필요한 새끼 용 클레이는 제이든의 오른쪽 어깨를 침입자들로부터 사수하기 위해 맹렬히 맞서 싸워야만 했다. 동화 속 공주님도 그러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자, 제이든은 어쩐지 다소 시무룩해졌다.
“루이사는 날 싫어해.”
“아냐, 걔도 실은 널 좋아하는데 누군가를 등에 태우는 게 익숙하지 않은 것뿐일 거야. 원래 야생 그리폰이었다면서.”
루이사는 카일과 같이 그리폰 크리켓 부에 속한 제이든 스펜서의 파트너 그리폰이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상할 정도로 제이든을 꺼려해서 그가 가까이만 가도 난동을 피운다고 했다. 나와 양호실에서 만났을 때 그로 하여금 다리에 엉성한 깁스를 하도록 만들었던 것이 바로 루이사였다.
“아니면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오히려 모질게 구는 타입일 수도 있지. 마르퀴즈 볼턴을 생각해 봐.”
나는 울적해서 어깨를 늘어뜨린 그에게 어쭙잖은 위로의 말을 주워 삼켰다. 그랬더니 그가 릴루의 턱 밑을 긁어 주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매우 불쾌해진 릴루가 꼬리로 제이든의 허벅지를 툭툭 쳤지만, 그의 허벅지는 너무 굵었으므로 릴루의 보송보송한 꼬리로는 어떤 자극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카일은 잘 타던데.”
스태포드 교수가 착취하던 픽시는 수사 나흘 만에 유리로 된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픽시가 지목한 범인의 정체는 놀라웠다. 바로 나도, 카일도 아닌 라일라였던 것이다. 가여운 그리폰은 변명 한번 못 하고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지만 우리는 한시름을 놓았다. 라일라의 파트너라는 이유로 카일이 의심을 받긴 했으나, 그의 혀에는 항상 기름칠이 되어 있었으므로 스태포드 교수를 속여 넘기는 것쯤은 식은 수프 마시기였다.
라일라에게는 이번 학기에 남은 기간만큼의 출전 정지 징계가 내려졌다. 카일은 사육장에 갇히게 된 그녀를 달래기 위해 매일같이 말고기 육포를 사다 바쳤다.
아무튼, 그래서 카일이 라일라 대신에 루이사의 등에 몇 번 올랐다는 소식은 나도 들었다. 슬프게도 루이사의 카일을 대하는 태도는 제이든을 대할 때와 영 딴판이었던 모양이었다. 제이든의 낯빛이 아까보다 더 어두워졌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
내가 빌라드 백작가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빌라드 백작부인이었다. 그다음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들의 맏딸인, 지금은 페터슨 후작부인이 된 이디스가 세 번째였다. 카일은 끝에서 두 번째였다.
다시 강조하겠다. 카일 빌라드는 끝에서 두 번째였다. 놀랍게도, 그는 내가 빌라드 백작가에서 제일 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스펜서 공작가의 방계인 빌라드 백작가는 초대 공작이 강조한 미덕, 즉 화목한 대가정을 공작가보다도 오래도록 유지해 왔는데, 덕분에 카일은 외동딸인 나와 달리 형제가 다섯이나 되었다. 카일의 말썽쟁이 기질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난 게 아니어서, 그의 형제들도 그와 비슷하게 야단법석을 떠는 편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빌라드 백작가에서 고리타분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코넬리아 빌라드의 방에도 ‘최고의 농담’ 트로피가 있었다. 그건 농담의 달 연회에서 제일 재미있는 분장을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아카데미 재학생이나 졸업생 사이에서는 장난꾸러기 보증 수표나 다름이 없었다.
빌라드의 소가주 자리는 불행하게도 그들 중 가장 불량한 빌라드에게 돌아갔다. 내게는 아직도 마베릭 빌라드가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빌라드 백작가를 짊어지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내가 그에게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원한을 차치하고도 그랬다.
“아리엘! 너 남자 친구랑 헤어졌다며? 아직도 나를 못 잊은 거야?”
“아니거든요, 서 빌라드!”
“형! 내가 아리한테 그 얘기 하지 말랬잖아!”
광장에서 본관 정문으로 이어지는 길에 새빨간 머리꼭지가 두 개나 있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이 감지되어 즉시 몸을 돌렸는데, 당최 어떻게 알아본 건지 마베릭이 손나팔을 만들어 나를 불렀다. 모르는 척하기에는 너무 열받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나는 그만 짜증스러운 대꾸를 돌려주고 말았다.
여전하구나, 마베릭 빌라드. 내 평생의 숙적!
그리고 카일 빌라드, 넌 나중에 죽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베릭 빌라드한테 내 사생활을 일러바쳐? 나는 마베릭이 눈을 돌린 사이 카일을 똑바로 보며 치켜세운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마베릭과 나의 역사는 카일과 나의 역사만큼이나 길지는 않았지만 아주 깊었다. 데뷔탕트 전후의 아리엘 달튼은 꿈 많고 사랑도 많은 소녀여서, 바닥을 구르는 낙엽에도 웃었고 꽃잎에 맺힌 이슬에도 눈물지었다. 또한 다수의 로맨스 소설과 음유 시인의 노래로 다져진 비뚤어진 연애관은 나로 하여금 조금 생겼다 싶은 사람이면 죄다 운명의 연인으로 착각하게 했다.
달튼 저택의 마구간지기 쿠엔틴의 아들 아서에게도 그랬고, 카일에게도 그랬다. 근데 그건 말하자면 어린 나이에 할 법한, 소꿉장난 같은 거였다. 혼자서 행동 하나마다 의미 부여하고, 좋을 대로 해석하다가, 마음속에서 연애도 결혼도 해 보고 헤어지는. 진짜는 그렇지 않았다.
빌라드 백작의 장남인 마베릭 빌라드는 이웃한 달튼 자작령의 여자들마저 입에 댈 정도의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본 적이 없었으므로 아득하게 상상만 하고 있었는데, 내가 열셋이 되던 해 지병이 도진 빌라드 백작이 후계 교육을 위해 수도에서 지내던 마베릭을 불러들였다.
그는 나보다 정확히 열 살이 많았으므로 당시 스물셋이었다. 또래 애들과는 전혀 다른 무게감을 가지고, 밀루아 왕실 기사단의 제복을 갖춰 입은 채 빌라드 부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저녁 식사 이후 나는 다리가 풀려 드러누웠다. 인생 최초의 열병이었다. 엄마는 소고기 스튜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거라고 말했지만, 내 몸은 내가 잘 알았다. 나는 불꽃같은 첫사랑에 빠져 꼬박 2주를 끙끙 앓았다.
결국에는 애끓는 연심을 토해 낼 길이 없어 구구절절한 연서를 썼다. 마베릭은 나를 여동생, 그것도 아니면 딸처럼 여겼나 보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달튼 자작가와 빌라드 백작가의 모두가 모인 만찬장에서 그걸 꺼낼 생각을 할 리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마베릭. 바야흐로 스타닉 산에 담자리 꽃이 피는 시기입니다.’를 읽을 쯤엔 의기양양했던 그의 기세는 ‘볕이 가득한 빌라드 저택의 응접실에서 당신을 만난 순간’까지 와서는 사그라들었다. 대충 귀여운 안부 편지겠거니 했던 모양이었다.
기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은 모든 사람이 나를 봤다. 내가 그때 자살하지 못한 것은 아직 메인 메뉴인 애저 요리가 나오기 전이어서, 손에 닿는 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끓는 연심은 불타는 증오로 변모했다. 그날부로 마베릭 빌라드는 아리엘 달튼이 영원토록 이를 갈아 마땅한 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