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밤하늘에 떠오른 보름달이 환하게 밝았다. 많은 일을 겪은 긴 하루임에도 달만은 아무 일도 없이 그대로라 좋았다. 평소처럼 그녀를 상냥하게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아서.
루시엘과 키제프, 그리고 마검을 짊어진 길리아트는 천공섬 아스트리야에 도착해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살아 있는 성지를 내 눈으로 다 보는구나.”
“지금은 사람도 없고 낮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요. 할아버지.”
길리아트의 짧은 감상에 루시엘이 덧붙였다. 신관들이 모두 사라진 천공섬의 밤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저 커다란 건물이 신학원이에요.”
루시엘이 앞장서며 안내했다.
신학원 건물 안으로 다다르자, 안드레아 추기경이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는 생략한 채 안드레아의 시선이 길리아트가 들고 있는 처형검으로 자연스레 향했다.
외관상으로 보기에도 특이한 검이었다. 사특하게 빛나는 검고 푸른 아지랑이, 그 주변을 빙빙 도는 검은 원혼의 구슬까지도.
“……그것입니까? 악마가 깃든 마검 블루 익스큐션이?”
“……강력한 파괴 주문인 디스트럭션이나 그 어떤 방법도 통하질 않았소.”
길리아트는 지독하리만치 파괴되지 않는 마검에 질린 터라,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좋습니다. 퇴마를 위해서는 이 검에 깃든 악마의 정확한 이름을 알아내야 합니다. 이제부터 신학원의 서가로 가서 신의 경전을 열람해 볼 겁니다. 저만 따라오십시오.”
안드레아 추기경이 기다란 홀을 짚으면서 안내하자 모두 뒤따랐다. 서가는 신학원의 가장 높은 층에 있었다.
층고가 높은 천장에는 주신 레트라논이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악마와 인간들에게 벌을 주는 천장화가 그려져 있었다.
마치 미로와도 같은 책장 사이사이를 한참 따라가자 안드레아가 은 촛대가 놓인 문 앞에서 말했다.
“여기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하얀빛으로 빛나며 금색의 매듭으로 묶여 있는 반투명한 두루마리가 둥실 떠올라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웅장한 크기였다.
“이것이 바로 주신 레트라논의 경전입니다.”
루시엘은 눈을 반짝이며 경전을 바라보았다.
‘저기에 악마의 이름이 있을까……? 반드시 알아내기를!’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금빛 매듭으로 단단히 묶여 있는 경전을 보며 키제프가 물었다.
“제가 지닌 성물의 힘과 신성력으로 열 수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드레아의 목에 걸려 있던 루미티어스가 반응하듯 빛을 깜빡거렸다. 그가 홀을 거머쥔 채 신성력을 흘려보내자 환한 빛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화아아.
그러자 경전의 매듭이 스르륵 풀리면서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그곳에 모여 있는 모두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나부낄 정도였다.
이내 경전에서 쩌렁쩌렁한 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
‘정말로 신일까……?’
깜짝 놀란 루시엘은 심장이 두근거려 눈을 끔뻑였지만 왠지 물어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안드레아가 그 물음에 답했다.
“자비로운 아버지이시여. 신의 종, 안드레아가 왔나이다. 부름에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드레아가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면서 따라 하라고 손짓하자,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래, 무엇이 알고 싶어 왔느냐.」
“여기 불경한 악마의 검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 악마를 끄집어내 멸하려 합니다. 부디 그의 이름을 알려 주소서.”
안드레아가 길리아트에게서 마검을 받아, 경전 앞에 놓아두자 검이 저절로 허공에 떠올랐다.
경전의 두루마리가 길게 펼쳐 넘실거리더니 마치 블루 익스큐션을 샅샅이 탐색하듯이 움직였다.
“공자비, 그대는 맑은 마나를 가지고 있으니 같이 와서 마나를 보태 주시지요.”
“알겠어요, ……그런데 정말 신께서 오신 건가요?”
루시엘이 작게 소곤대자, 안드레아도 웃으며 답했다.
“항상 목소리를 들려주시는 건 아닙니다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네요.”
그렇다면 자신들에겐 더욱 좋은 일이었다. 신이 도와준다면 악마의 이름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경전의 두루마리 위로 고대 문자들이 촤르르 펼쳐졌다.
루시엘은 안드레아와 함께 루미티어스를 붙잡고, 아까 그 물음을 반복해 입에 담았다.
“부디 그의 이름을 알려 주소서.”
루시엘은 심장 가득히 채워진 마나를 풀어놓으며, 진심으로 기도했다.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블루 익스큐션으로 인해 더는 악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루시엘의 압도적인 마나의 파도가 루미티어스와 경전, 그리고 마검까지 주변 일대를 감쌌다.
파아아아!
“신이시여, 제발. 모두를 구원해 주소서.”
―또롱, 또로롱!
모두를 구하고자 하는 루시엘의 감정이 커다랗고 영롱한 다이아몬드를 만들어 냈다.
두 번째 각성을 하던 순간만큼이나 커다란 다이아몬드였다.
루시엘이 보석을 만드는 크리스털 페어리란 걸 모르던 안드레아도, 알고 있는 키제프와 길리아트도 그 경이롭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감탄했다.
“공자비께선 도대체…….”
“……마치 기적을 보는 듯하군.”
지켜보는 모두가 눈앞에서 만들어지는 황홀한 광경에 루시엘을 응원했다.
눈을 꼭 감은 채로 기도하며 보석의 빛을 퍼트리는 루시엘에게는 흡사 성녀와도 같은 신성한 빛이 감돌았다.
파아아!
뒤이어 생성된 다이아몬드 여러 개가 허공에 떠올라 신의 경전과 공명하듯 팽그르르 회전했다.
루시엘은 여전히 집중한 채 기도하다가 궁금함에 눈을 반쯤 떠 보았다.
‘잘되고 있는 걸까?’
경전에 적혀져 있던 고대 문자들이 일련의 순서대로 빛나기 시작했다.
한 글자, 한 글자씩.
이내 그것을 전부 조합해 읽어 내려가자 악마의 이름이 나왔다.
“메피스토…… 펠… 레스?”
루시엘이 그 이름을 입에 담자, 블루 익스큐션이 반응하듯 진동하며 우웅 거렸다.
안드레아가 고개를 주억였다.
“예, 신께서 경전을 통해 직접 알려 준 이름이니 틀림없습니다.”
길리아트도 아까 마검의 반응을 기억하곤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루시엘, 네가 이름을 부르니 마검이 반응하는 것 같더구나. 여태껏 잠잠하던 놈이 말이지. 그럼 이제 다음은 어떻게 하면 되겠소, 추기경?”
“이제 악마를 마검에서 꺼내려면, 자연의 네 가지 속성을 가진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네 가지 속성이라면…… 불과 얼음, 땅과 바람을 말하는 겁니까?”
마법을 아는 자라면,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자연의 네 속성이었다.
“……그거라면 제게 있어요.”
루시엘은 늘 챙겨 다니는 보석 주머니를 꺼냈다. 불 속성을 가진 루비와 얼음 속성을 가진 사파이어, 땅 속성을 가진 토파즈와 바람 속성을 가진 에메랄드까지.
“……이것도 공자비께서 만든 것이지요?”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이며 선선히 인정했다. 추기경에게는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고 모든 걸 눈으로 봤으니 안 밝힐 수가 없었다.
“네…… 저는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크리스털 페어리, 요정의 핏줄이에요. 보시다시피, 감정을 강렬하게 느끼면 보석을 만들어 내고요…….”
루시엘의 고백에 안드레아는 그제야 퍼즐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래서였습니까. 어쩐지! 이제야 당신이 가진 그 어마어마하고 맑은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정체는 무엇인지 의문이 풀렸습니다. 내내 궁금했습니다. 혹시 진짜 성녀님이 나타나신 게 아닌가 하고…….”
“……제가 성녀라니, 그건 말도 안 돼요.”
루시엘이 푸스스 웃으면서 블루 익스큐션을 보았다.
“그럼 이제 악마를 검에서 끄집어낸 다음, 이름을 부르러 가면 되나요?”
“예, 하지만 아스트리야는 신성한 영역이니 여기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안드레아가 홀을 들어 경전의 두루마리를 다시 매듭으로 묶어 놓는 걸 지켜보던 길리아트가 나섰다.
“우리 벨슈타인은 마계와 곳곳이 닿아 있지. 악마를 소환할 곳은 내가 안내하겠소.”
이어 길리아트가 초록빛 이동포탈을 생성했다.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마법 수련장이었다.
“……여긴.”
“아주 익숙한 곳이지? 악마궁을 다시 갈까 하다가 여기가 더 넓어서 말이다.”
“마법 수련장이 마계에 닿아 있는 줄은 몰랐어요.”
루시엘은 이곳에서 마법을 자주 수련하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
“벨슈타인의 어마어마한 마력이 집중되는 곳이니, 평범한 땅이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거란다.”
길리아트가 그리 설명해 주는 걸 듣고 나자 안드레아가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 보석 하나씩을 들고 동서남북 방향으로 일정 간격 흩어져 서 계십시오. 그러면 소환을 시작할 겁니다.”
그러자 길리아트가 소매를 뒤적여 나침판을 꺼냈다.
“그러면 이게 도움이 되겠군. 여기.”
“고맙습니다.”
안드레아가 감사를 표하며, 루비를 가지고 뒤로 물러나 자리를 잡았다. 사파이어는 루시엘이, 에메랄드는 키제프가 마지막 토파즈는 길리아트가 쥐고는 동서남북으로 섰다.
루시엘이 고개를 기울이다가 별안간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피닉스와 아르제온.
“……음, 제게 누구보다 강한 불과 얼음의 힘을 가진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을 부를까요?”
“예? 그게 누구이지요?”
쉬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루시엘이 자랑스레 말했다.
“제 권속 피닉스는 강력한 불의 힘을 가졌고, 아르제온 또한 얼음의 심장을 가진 얼음 속성의 능력자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