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275)화 (275/282)

<275화>

레이놀드는 벨슈타인의 지하 감옥 중에서도 가장 깊은 층의 독방에 갇혔다.

횃불 하나 없이 한 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운 칠흑 속.

눈이 가려지고 양손이 결박당한 채 맨발로 질질 끌려오는 길에는 피비린내와 살이 썩어 들어 가는 악취가 코를 깊숙이 찔러 왔다.

곳곳에서 소름 끼치도록 매서운 한기가 살갗에 스며들고 머리털이 쭈뼛 세워졌다.

어딘가에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그륵, 그르륵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하며 레이놀드는 입술을 짓씹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만, 루시엘과 벨슈타인이 짜고서 저를 계략에 빠뜨렸다는 것만은 알겠다.

‘게다가 반역죄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반역을 꿈꾼 것은 사실이지만 철저히 숨겨 둔 증거를 황성에서 찾아냈을 리가…….

‘어머니가 공작성 안에 있으니, 분명 나를 살릴 방법을 찾고 있을 것이다.’

이내 지하로 터벅터벅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눈에 가린 천을 거칠게 풀어 주었다.

흐릿하던 시야가 선명해지자, 어둠 속에서도 지옥의 짐승처럼 형형한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 루시엘과 벨슈타인의 원수. 네 놈의 뼈와 살을 으스러뜨리고 싶었지.”

“너…… 벨슈타인 공자. 그래, 네놈들 벨슈타인이 전부 꾸며 낸 일이더냐?”

키제프는 대답 대신 레이놀드를 노려보다가 건틀릿을 낀 채로 주먹을 날렸다.

빠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골이 뒤흔들리는 고통이 엄습했다. 입술이 찢어졌다.

“……욱!”

퍼억, 퍽! 퍽!

키제프는 말없이 레이놀드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안면과 복부를 수차례 강타했고, 쓰러지면 일으켜 세워 다시 주먹을 퍼부었다.

“커허윽……!”

입술이 터지고, 이빨이 나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되었다.

“ㄴ…… 난 이, 이 나라의 황…… 아악!”

가소롭다는 듯, 눈을 구른 키제프가 레이놀드의 멱살을 쥐었다가 감옥의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실로 괴물 같은 힘이었다.

퍼억! 콰앙!

이대로라면 맞아 죽을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레이놀드는 찢기고 멍든 고개를 겨우 들었다.

“나, 나를…… 건드리… 다니, 윽!”

레이놀드가 부들부들 떨면서 키제프를 노려보았다.

“상관없다. 네놈을 죽이는 것만으로 도무지 성에 차지 않으니까. 끝없는 고통을 줄 계획이거든.”

“……왜, 끄악!”

키제프의 발이 레이놀드의 복부를 짓밟았다.

“왜냐고?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레이놀드를 향해 비웃음을 보낸 키제프가 고개를 들었다. 마법 랜턴을 든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 어머니?”

별안간 레이놀드의 눈이 희망으로 커졌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카일라는 거울을 비추자 순식간에 다른 이로 변했다.

그가 끝내 갖고자 했던 루시엘로.

“……이, 이, 이게 어떻게 된…… 루시엘이었다고?”

루시엘은 피투성이로 바닥에 쓰러진 레이놀드를 내려다보았다. 꿈에 그리던 복수의 순간에 닿아서일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루시엘은 잠시 숨죽여 과거를 회상했다. 그간 흘러간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래. 루시엘이야.”

“마, ……말도 안 돼.”

경악한 황자의 얼굴을 보며 루시엘은 말을 이어 갔다.

“네가 그렇게 손에 넣고자 했던 크리스털 페어리……. 전생에 너는 나를 보석 노예라고 불렀지.”

레이놀드를 처음 만나 세 치 혀가 흘리는 달콤한 말을 믿어 버린 그 순간부터, 그 후로 이어졌던 추락과 끝없는 고통의 시간…….

“……나를 유리관에 가두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제로 보석을 만들게 했어.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었을까?”

“……나, 난 모르는 일이다! 전생 따위는!”

레이놀드가 귀를 틀어막았다.

“……내 모든 마력이 마를 때까지 너는 멈추지 않았어. 벨슈타인을 치기 위해서. 강해지기 위해서.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봐.”

루시엘이 키제프를 바라보았다. 이내 키제프가 레이븐을 불러냈다.

“레이븐, 부탁한다.”

“알았다. 레이놀드 네놈은 악마도 사직하게 할 놈이야.”

“큿, 무…… 무슨.”

스르륵 그림자에서 나타난 레이븐은 레이놀드의 머리채를 쥐곤, 정신을 연결했다. 이윽고 레이놀드가 전생에 루시엘에게 한 짓들이 환상처럼 흘러갔다.

끔찍하리만큼 루시엘을 뼛속 깊이 이용하는 잔혹한 자신의 모습에 레이놀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직접 눈으로 보니 어때?”

“……저, 저건 내가 아니다. 루시엘. 나는…… 이번 생에선 너를 행복하……!”

레이놀드가 흰자위를 잘게 떨며 부정했다.

퍼억!

듣고 있던 키제프가 그의 턱을 한 대 더 갈겼다.

루시엘은 투명한 눈동자를 빛내며 레이놀드에게 말했다.

“아니, 이번에도 똑같았을 거야. 나를 손에 넣고 나서는 악독하게 보석을 착취했겠지. 당신의 죄를 나는 온몸으로 기억해. 그래서 억울하게 죽고도 이렇게 시간을 되돌렸는지 몰라. 당신을 단죄하기 위해서……!”

전생의 고통스러운 기억에 치를 떨며, 입술을 질끈 깨문 루시엘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또롱, 또로롱.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면서 루시엘의 심장을 가득 채운 마나가 새까만 옵시디언과 사파이어를 만들었다.

레이놀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이, 이건 꿈이다. 그래, 모든 게 꿈이야! 어머니, 어머니 어디 계십니까. 제발 저를……!”

흐느껴 우는 레이놀드를 보며 루시엘이 말했다.

“네 어머니 카일라는 유리관에 가둬서 죽였어. 아주 처참하게……. 너도 그렇게 만들어 주고 싶지만, 반역죄인은 단두대에 올라가야겠지. 그러나 그 전에 볼일이 남았지?”

루시엘이 말하는 동안, 벨슈타인 공작과 쇠몽둥이와 온갖 연장을 챙겨 든 심문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두려운 눈으로 레이놀드가 뇌까렸다.

“……차, 차라리 나를 죽여 줘!”

“곱게 보내 줄 거라고 생각하다니 순진한 구석이 있었네. 난 죽여 달라고 매일 울면서 기도했어. 진짜 복수는 이제 시작이야, 레이놀드.”

루시엘은 그제야 눈물을 떨쳐 내고 후련한 미소를 지으며, 페어리 문의 사슬을 길게 뻗었다.

이내 레이놀드의 몸을 금빛 사슬이 속박하며 조여 왔다.

“크아아악!”

퍼버버벗, 번쩍!

폭죽처럼 터지는 번개에 레이놀드는 그대로 몸이 굳어, 마비가 되더니 풀썩 기절했다.

“루시엘, 고생했다. 이제 뒷일은 아빠에게 맡기고 가도록 해라.”

“네, 아빠. 가기 전에 황자의 치료를 하고 갈게요.”

루시엘이 반쯤 곤죽이 된 레이놀드의 몸에 성수를 뿌리고는 다이아몬드를 대 주었다. 이내 환한 빛과 함께 그의 상처가 아물며 몸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황자에게 죽지 않게 무한 고통을 준 다음 신체를 원상 복구해 놓고 황실에 넘길 셈이었다.

“여기 다이아몬드 더 드리고 갈게요.”

“……그래. 이건 널 위해 쓰마, 내 딸. 앞으로 저놈이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

“네, 아빠. 우리 벨슈타인은 원수를 잊지 않으니까요.”

공작이라면 자신과 벨슈타인의 모든 복수를 완벽하게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루시엘은 도리어 후련함에 마음이 편해졌다.

“고맙다, 루시엘. 네 복수는 이 아비 손으로 마무리하도록 하지.”

공작의 커다란 손이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늘한 그 손에 이제는 도리어 따뜻함을 느끼는 걸 보니 자신은 정말 완전한 벨슈타인이 된 게 분명했다.

절대 떨어질 수도 갈라 낼 수도 없는 가족.

루시엘은 그제야 마음 깊이 눌러 두었던 괴로움과 분노를 떨칠 수 있었다.

이제는 과거 힘들었던 자신의 내면과도 작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곁에 선 키제프의 손을 잡으며 루시엘은 할 일이 남은 공작을 위해 한 발 물러났다.

“그럼 이놈을 어찌 굴려 볼까.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조져야겠군.”

다이아몬드를 받아 든 공작이 서늘하게 눈을 굴리며, 레이놀드의 몸을 가늠하듯 살폈다.

그가 내뿜는 차가운 살기에 정신을 차린 레이놀드가 겨우 소리를 질렀다.

“허…… 사, 살려 주시오! 가……감히 황자에게 이런 법은……!”

“여긴 내가 법이다. 버러지만도 못한 놈. 뭐 하나, 묶어.”

“예.”

이내 심문관들이 레이놀드를 끌어다가 형틀에 앉히고 묶었다.

제게 닥친 무시무시한 상황에 레이놀드는 까무러칠 듯 발버둥 쳤다.

“끄어아악!”

“시끄럽군.”

이내 레이놀드의 입에 커다란 재갈이 물렸다. 죽음보다 더한 진짜 고통의 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엘도 더는 뒤돌아보지 않고 감옥을 떠났다. 이제 레이놀드와의 악연도 끝이었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비명을 무시하며 키제프와 맞잡은 손을 꾹 쥐었다.

“……루시엘, 괜찮은 거지?”

지하 감옥을 벗어나는 루시엘을 보호하듯 감싸며, 키제프가 물었다. 마음 여린 루시엘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복수였다.

“응. 오랜 숙제를 풀어 버린 느낌인걸. 그래도 나 잘했지?”

루시엘이 애써 밝게 웃자, 키제프가 선선히 고개를 주억였다.

“……잘했어. 저놈을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하는 게 한이지만.”

“우리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잘도 계략을 꾸몄으니까.”

“그건 그렇군. 이제 마검을 처리하는 일이 남았나.”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추기경님과 잠시 이야기했는데 아스트리야 신학원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 마검도 가지고 가야 해.”

“마검은 지금 할아버지께서 지키고 계셔.”

“얼른 합류해서 신전으로 가자.”

둘은 서둘러 신전으로 향했다. 이제 모든 일의 고지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