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다음 날 루시엘은 엘링턴과 함께 황성의 호위를 받으며 타운하우스로 다다랐다.
푸릇푸릇한 잔디 정원에는 이미 노아가 갑옷을 입은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노아, 와 있었구나!”
루시엘이 반갑게 인사하자, 노아의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돌며 고개를 숙였다.
“아가 마님, 불러 주셔서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혹여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건 아닌가 하고.”
루시엘이 이유도 없이 황도로 오라고 할 리 없다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내가 아니라 노아와 관련된 일이야.”
루시엘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두 가지 소식을 알려 주려고 불렀어. 노아의 동생과는 소식이 끊겼다고 했었지?”
잃어버린 동생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접은 지 오래였지만, 막상 루시엘이 여동생에 대해 말하자 노아의 눈이 일순 커졌다.
“제 동생의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간절한 물음에 루시엘은 고개를 끄덕였고 엘링턴이 직접 알려 주었다.
“수소문해 보았는데 자네 여동생은 남작가를 나가서 수녀원에 들어갔다고 해. 이유는 정략결혼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정략결혼’이라는 말에 노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남작이라면 제대로 된 혼처를 구해 주지 않았을 겁니다.”
“그 예상이 맞아.”
루시엘이 무겁게 가라앉은 노아에게 다가와 말했다.
“제국의 모든 수녀원을 뒤져서라도 찾을게. 그러니 그동안 노아는 자신만이 가능한 방법으로 노력해 줘.”
그러나 노아는 여전히 표정이 굳은 채였다.
“잊었어? 제국 제일의 검사가 되기로 한 것 말이야. 드디어 스콰이어 검투 대회 접수 일정이 시작되었대.”
“아뇨, 저는 아직 대회에 나갈 만한 실력은 못 됩니다.”
노아는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르가 단장님께 꾸준히 훈련받고 있잖아.”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아직은 한참 부족합니다.”
검은 날개의 다른 기사들과 간간이 대련 훈련도 하고 있었지만, 다섯 번에 한 번쯤 이길까 말까였다.
루시엘도 당장 결실을 얻으리라는 기대를 하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전생에 노아가 우승을 하게 된 것도 루시엘이 18살이었던 3년 후쯤이었으니까. 그러나 루시엘은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대회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험이 될 거야.”
전투 능력은 전장에서만 습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특히나 노아처럼 경험이 부족한 검사에게는 이런 커다란 대회에서 다양한 검사들의 전투를 보고 배우는 것이야말로 성장할 기회였다.
게다가 노아는 검술 쪽으로는 습득이 빨랐으니까.
지켜보던 엘링턴 역시 루시엘의 의견에 동조했다.
“나도 아가 마님 의견에 한 표. 자네, 언제까지 견습 기사로 지낼 건 아니잖나?”
“윽.”
노아는 루시엘의 지명으로 호위를 맡았지만, 아직 검은 날개의 정식 기사로 임명을 받지는 못한 상태였다.
확실히 그 말은 좀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 잠깐 생각에 젖어 있던 노아가 결심한 듯 말했다.
“말씀처럼 경험 삼아 대회에 참가하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내가 안내하지. 마침 시내 쪽에 볼일도 있으니까. 아가 마님, 저희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요, 엘링턴. 잘 부탁해요. 노아도 잘 다녀와. 나도 같이 가 주고 싶지만, 난 갈 곳이 있어.”
“헛! 제가 따르겠습니다. 접수는 그 후에 다녀와도 됩니다.”
노아의 든든한 말이 고마웠지만, 루시엘은 고개를 살랑 저었다.
“호위가 필요 없는 곳으로 이동할 거니까. 참, 부탁한 쿠키는?”
“던컨 집사장님께 맡겨 놓았습니다.”
“알겠어, 고마워.”
루시엘은 새초롬한 눈을 빛내며 얼른 타운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류프델을 만나려면 메이플 쿠키는 필수니까.
* * *
류프델이 보내 준 포털을 타자 단숨에 밤의 대장간 내부로 도착했다. 집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뒤돌아선 류프델의 땅딸막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류프델, 저 왔어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크흠, 누구시더라.”
“루시엘이 왔어요.”
“난 그런 사람 모르겠소만.”
뾰족한 귀를 쫑긋 세웠다가 고개를 홱 돌리는 류프델을 보며 루시엘이 속으로 웃었다.
‘단단히 토라지셨어.’
“하찮은 요정 꼬맹이요.”
“……!”
흠칫, 살짝 웃음을 참는 듯 류프델이 어깨를 떨었다. 이윽고 루시엘이 류프델의 퉁퉁한 어깨를 주물러 주면서 냉큼 쿠키를 내밀었다.
“이제 마음 좀 풀어 보세요. 피넛 메이플 쿠키 가져왔단 말이에요.”
“…….”
땅콩 크림까지 더해 더욱 고소한 맛이 일품인 새로운 메이플 쿠키였다.
힐긋. 살펴본 그가 쿠키를 낚아채더니 그제야 속내를 말했다.
“인석아. 기다리다가 목 빠져서 도로 붙여 놨다.”
“죄송해요. 그렇지만 최대한 빨리 온 거예요!”
루시엘의 말에 류프델이 피넛 쿠키를 두 개 해치우고 난 다음 손을 털며 집 안으로 안내했다.
“좋아, 따라와라. 그런데 네 할아버지는 요새 왜 연락이 되질 않는 거냐.”
“아, 할아버지는 잠시 바쁜 일이 있으셔서요.”
집 안으로 들어간 류프델은 달그락거리면서 서랍장을 이리저리 뒤지더니, 반투명한 헝겊으로 싸 놓은 물건을 척 내밀었다.
“바쁜 척은……. 자, 이놈이다. 이걸 보여 주려고 불렀다.”
“이게 무엇인데요?”
“요정의 용광로라는 거다. 난쟁이 경매소에 나와서 냉큼 들였지.”
류프델이 헝겊을 풀어내자 작은 은빛의 가마가 나왔다. 용광로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차를 우려내는 포트와 다름없는 작은 크기였다.
“굉장히 작네요. 이걸로 무얼 할 수 있어요?”
루시엘의 물음에 류프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이어 갔다.
“요정들은 이 용광로에 보석을 종류별로 넣은 다음, 새로운 힘을 가진 보석을 만들었다는구나.”
“그게 정말이에요? 이걸 가지고 있던 사람은 어떻게 손에 넣었던 거고요?”
루시엘은 어쩌면 크리스털 페어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비밀 경매라 물건을 판매한 자의 정보까지는 모르겠다만, 수집벽이 있는 난쟁이 영감 하나가 죽었거든. 그 영감이 가진 물건을 후손이 정리한 모양이다. 사 올 것이 제법 많았는데 용광로 하나 가격이 자그마치…… 에그, 아니다.”
류프델은 놓쳐 버린 많은 물건들을 떠올리며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시다가 고개를 저었다. 보아하니 보통 고가가 아닌 모양이었다.
루시엘의 은빛 눈썹이 살짝 늘어지며 물었다.
“얼마가 들었어요? 제 보석을 위해 사셨으니까 제가 가격을 지불 하는 게 마땅해요.”
‘수억 틸링 정도 되려나……? 그러면 나 혼자서는 무리긴 하지만…….’
루시엘은 속으로 얼마를 내어주어야 할지 가늠하다가 계산을 멈추었다.
“애는 그런 거 몰라도 된다. 어쨌든 상식선에 있는 가격이라 냉큼 사 온 거다. 이런 건 두 번 다시 구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니까.”
“그런 귀한 물건을 그들은 왜 팔았을까요?”
“도구라면 마땅히 그 쓰임이 있어야 하는 법. 요정의 보석이 없다면 그 용광로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
류프델이 이빨을 딱 부딪치면서 웃었다.
“그건 그렇네요.”
외알 안경을 쓴 채로 용광로 안을 자세히 훑어보던 류프델이 흘끔 그녀를 건너다보며 물었다.
“루시엘, 네가 지금 만들어 낼 수 있는 보석의 종류가 전부 몇 가지더냐?”
“왜요, 류프델?”
“여기 이 용광로 안을 살펴봐라.”
루시엘은 그가 건넨 용광로를 살펴보았다.
안에는 눈금 같은 것이 그려져 있고 가장 위쪽에 숫자가 적혀 있었다. 12였다.
그러고 보니, 루시엘이 지금까지 만들어 낸 보석도 모두 열두 가지였다.
“여기 12라고 적혀 있네요. 제가 지금까지 만든 보석의 종류도 열두 가지예요!”
“호, 그러면 다 모은 거로군! 일단 보석을 종류별로 다 넣어 보자.”
“네!”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이고는, 가방에서 보석을 꺼냈고 그걸 눈금에 맞춰서 하나씩 용광로에 넣어 보았다.
“……이제 불로 달구어야지!”
류프델이 얼른 요정의 용광로 밑에 작은 초를 놓고는 불을 피웠다.
그러자 용광로가 달그락거리면서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음,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는 모양이로군.”
턱을 짚으면서 고심하던 류프델이 그렇지, 하고 다른 방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그는 초록빛 액체가 들어 있는 투명한 병 하나를 가져왔다.
“야광 벌레와 유니콘의 뿔, 새벽이슬에서 추출한 마법 연마제를 빠뜨렸지 뭐냐…….”
끈적이는 그것을 한 방울 톡 떨구자 화아악! 녹색 불길이 일어났다. 류프델이 루시엘의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뒤로 물러나거라!”
이내 활활 타오르던 녹색 불길 속에서 보석들이 하나씩 용광로 위로 떠올랐다.
그러더니 루시엘의 심장에 가득 채워진 마나와 용광로가 연결이 되었다.
루시엘은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감정들에 몸을 지탱하기 어려웠다.
심장이 미친 듯 쿵쿵 뛰었다.
루비는 분노를, 사파이어는 슬픔을, 종국에 마지막에는 페어리 하트의 사랑까지.
열두 가지의 감정들을 느끼던 그 순간들의 기억이 차례로 떠올랐다. 이러다가 이 감정들을 한꺼번에 전부 느끼면, 감정의 강도가 조금이라도 높아지면 미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읏…… 머리랑 심장이 아파요!”
루시엘은 가쁜 호흡을 몰아쉬면서 외쳤다. 당황한 류프델이 그만두려고 물을 끼얹고, 용광로의 뚜껑을 덮으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용광로의 불길조차 사그라지지 않았다.
“허…… 루시엘, 아무래도 불완전했던 모양이다. 우선 지팡이를 꺼내라! 지팡이가 보석의 힘을 조금이라도 흡수해 줄 테니까!”
“……윽.”
루시엘이 겨우 이노센트 지팡이를 꺼냈다. 그러자 보석의 강한 힘들이 지팡이로 분산되었고, 그제야 용광로의 불이 꺼졌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보석의 힘에 놀란 피닉스가 루비에서 뛰쳐나왔다.
“……루시엘, 이게 무슨 일이냐!”
피닉스가 다급하게 루시엘을 살피면서 자신의 장미를 손에 쥐여 주며,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루시엘은 가까스로 지팡이로 바닥을 짚은 채, 정신을 차렸다.
“고…… 고마워요. 피닉스. 이젠 괜찮아요.”
“네 보석의 힘들이 불균형했던 것 같구나. 아니면 무언가 부족했나…….”
불이 꺼진 용광로 안 다른 보석들은 전부 사라졌지만, 자수정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수정만 남아 있네요…….”
“젠장! 이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잠자코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피닉스가 뜨거운 용광로를 뒤집어 보았다.
“루시엘, 여기 뭐라고 적혀 있다.”
그녀의 지적에 루시엘이 그걸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는 것이 힘.>
그녀가 알지 못하는 다른 비밀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까지 보자 루시엘은 새로운 보석 생성이 실패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에리카에게 연락해야겠어. 자수정만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알아내지 못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