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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50)화 (250/282)

<250화>

이슥한 밤, 세 사람은 기척을 지운 채 황자궁 터에 모였다.

클로디아가 황성 근위병들의 교대 시간에 맞춰서 그들에게 휴식 시간을 길게 내어준 덕에 인근을 정찰하는 시선을 따돌릴 수 있었다.

주변은 아무도 없이 고즈넉했다. 만약을 대비해 키제프도 주변을 한 번 더 정찰하고 돌아왔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어.”

“좋아, 이제 시작할까요?”

루시엘의 물음에 공작도 고개를 주억였다.

“물론이다. 땅을 파기 전에 위치를 정확히 잡는 게 좋겠군. 어스 빌드는 이쯤에 구현할 거니까…….”

공작이 말하면서 그곳에 나뭇가지를 떨어뜨려 표시했다. 그러고는 스무 걸음 정도 물러나 나무 막대기로 반원을 쭉 그렸다.

“이쯤에 다들 서는 게 좋겠다.”

루시엘과 키제프도 공작을 따라서 위치를 잡았다.

“좋아요. 각자 발밑에 하나씩 토파즈를 묻으면 될 것 같아요.”

키제프의 것만 만들어도 되지만, 보다 안정적으로 어스 빌드를 구현하기 위해 세 명 다 토파즈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세 사람이 모두 가볍게 마법을 발동시켰다.

“디그(Dig).”

우묵하게 적당히 파헤쳐진 구덩이 세 개가 만들어졌고, 덕분에 한쪽에 흙이 소복하게 쌓였다.

루시엘은 토파즈가 십여 개씩 들어 있는 주머니를 각자 공작과 키제프에게 던져 주었다.

키제프의 주머니가 가장 토파즈를 많이 넣어 불룩했다.

챠르륵.

구덩이 세 개에 토파즈를 넣은 다음, 흙으로 덮고는 발로 꾹꾹 눌러 평평하게 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마법진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 키제프.”

이내 루시엘의 말대로 십여 초가 흐르자, 투명한 노란빛 마법진 세 개가 둥그렇게 생겨났다.

“생겼군.”

“이제 마나를 서로 연결하고, 어스 빌드로 비밀 공간을 구현하면 돼요.”

키제프가 그린 비밀 공간의 설계 스케치는 이미 각자의 머릿속에 각인해 놓았다.

루시엘은 이노센트 지팡이를, 공작과 키제프는 검을 꺼내 들고는 각자의 무기에 마나를 채웠다.

파아아앗!

한꺼번에 많은 양의 마나가 넘칠 듯 사방으로 일렁였고, 검과 지팡이가 그것들을 모두 머금어 주변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파아.

세 사람의 마나가 모두 연결이 되는 동시에 나지막이 영창했다.

“어스 빌드.”

토파즈 마법진이 더욱 노랗게 빛나면서 마법이 발현되었다.

쿠르르, 쿠구구궁!

흙이 뒤집히고, 쏟아지면서 땅의 형질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주물럭거리듯 울렁였다.

이윽고 그 움직임이 멈추자, 땅속에 지하 통로와 함께 이어진 너른 공간이 생성되었다.

겉으로는 깊은 굴로만 보였지만 곧 그럴듯한 비밀 장소로 꾸며질 예정이었다.

“……드디어 완성된 것 같군.”

공작이 몸을 숙여 구멍을 통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제법 훌륭하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셋이서 완성해 낸 결과를 바라보니 루시엘은 왠지 모르게 뿌듯해졌다.

그녀도 공작을 따라서 내부를 살펴보며 말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이동포탈과 증거를 놓고 오면 될 것 같아요.”

“내가 다녀올게. 몇 가지 부서진 가구나 물건들도 좀 만들어 두어야겠군.”

그러자 뒤에 있던 키제프가 단단히 각오한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레이놀드를 향한 분노로 일렁이는 서늘한 붉은 눈은 불길이 잦아들지 않고 있었다.

“아니야. 나도 같이 가.”

하지만 그를 혼자 보내기에는 걱정이 되었다. 지반이 단단한지 확인하려면 내부를 살펴보기도 해야겠고.

몸을 일으킨 공작이 손을 털고는, 주변을 살폈다.

“한 명은 밖에서 동태를 살펴야 하니, 나는 여기 있으마.”

공작의 말에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부탁드려요.”

“얼른 다녀오거라.”

키제프가 가뿐히 구멍으로 뛰어내렸지만, 루시엘은 그가 걸어 준 부유 마법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석벽으로 둘러싸인 길을 따라가자, 마치 아주 오래전에 비밀 기지로 사용한 듯, 그럴싸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살핀 루시엘이 만족감을 드러냈다.

“굉장하다. 진짜 같아.”

키제프가 아공간 포켓에서 빛나는 이동포탈 가호석을 꺼내 들었다.

“이건 안쪽에 설치하면 되려나?”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응. 이쪽으로 와. 여기가 좋겠어.”

키제프가 네모난 이동포탈 가호석을 바닥에 내려놓자, 찰그락 소리와 함께 큐브처럼 가호석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정육면체 큐브의 한쪽 면에는 수치를 입력하는 칸이 활성화되었다.

‘고대 지도법에 따른 좌표의 위치를 입력하면, 해당 장소로 이동하는 포탈을 생성할 수 있어요.’

루시엘은 차분하게 류프델의 추적 마도구에서 얻어 낸 좌표의 위치를 입력했다.

파아아앗.

그러자 큐브가 회전하며 푸른빛의 이동포탈이 생성되었다.

“됐다.”

확인 차 루시엘이 이동포탈 위로 들어가 보니, 버려진 시칠렌 와인 재배지의 창고로 통했다.

키제프도 따라서 들어와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완벽하군. 이제 마무리하고 돌아가자.”

루시엘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은 서둘러 황궁의 감옥과 황도 시내, 발루크 후작저 등 몇 개의 이동포탈을 더 생성했다.

그리고 미리 아공간 포켓에 챙겨 왔던 부서진 가구들로 안을 꾸미고 그 사이에 독이 든 유리병을 굴렸다.

‘잠깐. 빠뜨린 게 혹시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곳의 위치도 기록해 놔야겠어.’

만약을 위해 마지막으로 비밀 공간의 위치까지 지팡이에 각인해 두었다.

그간 준비해 왔던 일들이 점점 마지막을 향해 다가가는 것 같아서 루시엘은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아직 가장 커다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레이놀드의 죄를 증명하는 것들은 마련해 놓았으니. 다음은 신전 맞이구나.’

루시엘은 상념을 털어 내고 키제프에게 다가갔다.

비밀 공간에서 빠져나오자, 공작이 그곳을 흙과 바위로 감쪽같이 뒤덮었다.

“모두 고생 많았다.”

“네, 아빠랑 키제프도요.”

“어서 가자.”

서로 눈빛을 교환하면서 속삭인 세 사람은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와 귀빈들이 머무르는 로제궁의 응접실로 이동했다.

그곳에 있던 엘링턴이 세 사람에게 물을 한 잔씩 내어주면서 말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무리는 제대로 하고 오신 거겠지요?”

“네, 잘하고 왔어요.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어요.”

루시엘이 생긋 웃으면서 대답했고, 두 남자는 이미 기운을 소진한 맹수처럼 소파에 늘어진 상태였다.

“자, 어느 분께 먼저 업무 보고를 하면 되겠습니까.”

보좌관을 총괄하다 보니, 새로운 인력이 들어와도 엘링턴은 여전히 분주했다.

눅진해진 공작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잘 시간이 지났으니, 루시엘부터 알리고 재우지.”

“아…… 예옙. 잠시만요.”

엘링턴이 서류 뭉텅이 몇 개를 뒤적거리더니, 거기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가 마님, 지난번에 알아봐 달라고 하신 소녀의 행방 말입니다.”

고단함에 루시엘도 잠시 멍하던 눈동자가 반짝 뜨였다.

“소녀요?”

“예, 호위 기사 노아의 여동생인 미아라는 소녀 말입니다.”

“앗, 찾았나요? 만났어요?”

루시엘도 키제프 옆에 기대앉아있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녀석 여동생?”

키제프도 힐끔 관심을 보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엘링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만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녀는 남작가를 떠나 1년 전에 수녀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남작이라는 작자가 나이 든 귀족에게 팔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

루시엘은 과거 팔려 다니던 자신의 신세가 생각이 나 남작을 향한 분노에 주먹을 그러쥐었다.

동시에 루시엘의 눈동자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노아는 누구보다 여동생의 소식을 기다렸을 텐데.

“……우선 수녀원 쪽을 집중적으로 찾아 주세요. 그리고 스콰이어 검투 대회 접수 일정은 아직일까요?”

루시엘의 물음에 엘링턴이 크, 하고 감탄했다.

“과연 우리 아가 마님 촉은 기가 막히십니다. 내일부터 접수 일정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예년보다 시일이 제법 당겨진 듯합니다.”

과거 스콰이어 검투 대회는 여름을 대표하던 행사인데, 봄인데도 벌써 접수 일정이 시작된 걸 보면 확실히 그런 듯했다.

“그러게요. 노아에게 황도의 타운하우스로 와 달라고 해 주세요. 당장 대회를 접수해야겠으니까요.”

“예, 전달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키제프가 관심을 보였다.

“스콰이어 검투 대회라. 대륙 제일의 검사를 뽑는 그 대회 말이지?”

“응. 검사라면 모두가 꿈꾸는.”

“나도 나가 볼까.”

느른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키제프의 말에 루시엘이 당황해 물었다.

“키제프도? 왜?”

“……그냥. 심심하니까.”

사실은 루시엘에게 관심도 받고, 점수를 딸 수 있을 것 같아서였지만.

게다가 루시엘이 묘하게 노아가 나가면 무조건 우승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니, 질투심도 생겼다.

‘그놈이 얼마나 강한 검사이길래?’

과거를 알고 있던 루시엘이라면 가능성 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노아가 우승을 하는 모양이군.’

“……키제프도 나가고 싶어? 그렇다면 응원할게.”

의외로 루시엘은 키제프에게 참아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나가서 덜컥 우승해 버리면, 네 기사가 우승 못 해서 안 좋은 거 아니야? 아니면 그자가 나보다 뛰어난 검사인가?”

키제프의 추측에 루시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곳에 나가 우승을 하든 못 하든 키제프도, 노아도 모두 주목받을 게 틀림없어. 두 사람 다 굉장한 실력을 가졌으니까.”

루시엘이 맑게 웃자, 키제프는 견딜 수 없어서 그녀에게 바짝 다가와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미안. 내가 속 좁게 굴었군. 사실 대회는 관심 없어.”

제국에서 그들 기준대로 정한 대회 따위. 마음만 먹으면 키제프도, 공작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강한 힘을 지녔다.

제게는 한낱 유희 거리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명예가 반드시 필요한 거겠지.

“알고 있어. 키제프는 대회보다 더 대단한 수련을 해 왔으니까. 우리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러 갈까? 밤에도 황성 식당 냉동 창고에 가면 있대.”

“좋아.”

키제프가 얌전히 고개를 주억였고, 루시엘은 응접실 밖으로 나가려다가 뒤돌아서 엘링턴과 공작에게도 물었다.

“두 분도 드실래요? 클로디아 황녀님이 맛있다고 알려 주셨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내 몫까지 먹어라.”

루시엘이 도도도 달려가 기다리던 키제프와 손을 잡고는 밖으로 나섰다.

그런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던 공작과 엘링턴이 대화를 나누었다.

“가만 보면, 아가 마님은 인생을 몇 번은 사신 것 같다니까요. 키제프 도련님을 저렇게 길들이시다니요.”

“뿐만이 아니지. 나도 그랬으니까. 벨슈타인의 모두가. 아니 루시엘은 만나는 사람 모두를 길들여 버리는지도 모르겠군. 근데 그게 몹시 마음에 들어.”

공작의 붉은 눈이 화톳불처럼 따스한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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