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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47)화 (247/282)

<247화>

“역시 엘링턴. 일 처리가 빨라.”

와이번 후원 투자를 통해 거둔 수익금을 나누어 준 덕분에 루시엘은 이른 아침부터 주방장과 에바, 자르가와 기사들에게 거듭 감사 인사를 받고 있었다.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서 통신구로 연락도 날아왔다. 거절은 거절하겠다고 미리 못을 박아 둔 채 보내서 다행히 모두가 받아 주었다.

루시엘이 일어나자 베시는 돈 봉투를 열어 보고 눈물을 흘렸다.

“아가 마님, 그 조그맣던 아가 마님이 언제 이렇게 자라셔서 돈도 벌어 오시고…… 흑. 아까워서 이 돈을 어떻게…….”

베시의 품에 폭 안기면서 루시엘이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베시가 내게 준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걸. 그러니까 그만 울고 나 옷 갈아입는 거 도와줘. 오늘은 황궁에 가야 하니까.”

“어머, 내 정신 좀 봐, 알겠어요. 아가 마님.”

캐서린이 있지만 루시엘은 베시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는 단장을 더 좋아했다.

‘게다가 캐서린은 아스트리야에 대해 조금 더 조사해 보겠다고 했으니까. 아르제온도 레이놀드를 잘 감시 중이고…….’

잔잔한 꽃무늬가 수놓아진 연노란색 드레스를 베시가 꺼내 왔다. 봉긋한 소매와 허리선 아래로 덧대어진 미색의 샤스커트에는 층층이 프릴도 달려 있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달콤해지는 옷이었다.

“이걸로 할게.”

베시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으니, 낯빛이 더 환해졌다. 리아도 들어와서 은빛 머리카락의 일부를 가느다랗게 땋아 내려 주고, 다이아몬드 머리핀으로 고정시켰다.

입술은 사과처럼 맑은 빨강으로 물들이고, 볼에도 연한 분홍빛으로 톡톡 두드리자 생기가 더 올라왔다.

“자, 다 됐어요. 오늘도 너무 예쁘세요.”

“고마워.”

매끈한 윤이 나는 하얀 펌프스를 신고, 허리에 리본을 묶는 동안 누군가 별궁을 찾아왔다.

“……루시엘,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그녀의 방문을 허락도 없이 열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뿐이었다.

제 남편 키제프.

높다란 콧날이 오늘따라 더 오뚝하고, 가지런한 입술은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하, 눈을 못 뜨겠는데.”

“……응?”

“너무 눈부셔서 말이지.”

키제프가 장난스럽게 제 눈을 손으로 가리는 척하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베시와 리아가 미소 지으면서 얼른 물러갔다.

환한 금발과 어울리게 하얀 슈트를 입은 키제프가 진짜 황자보다 우아하게 느껴지는 건 비단 자신뿐만이 아닐 터였다.

“……오늘 너무 힘준 거 아냐?”

“너야말로.”

키제프가 느른하게 입가를 올리더니 루시엘의 어깨를 팔뚝으로 살짝 밀면서 장난쳤다.

콩닥콩닥.

둘이 남자 루시엘의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두근거렸다. 그녀의 진홍빛 눈망울을 키제프가 빤히 내려다보았다.

키제프가 루시엘의 손목을 붙잡았다.

자못 민망해진 루시엘이 재촉하며 그의 옷깃을 흔들었다.

“어, 얼른 가자.”

“……뽀뽀해 주면 놔줄게.”

키제프가 가까이 다가와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나중에.”

“아내는 남편의 몸과 마음을 보살펴 줄 의무가 있는데. 나는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있어. 자, 빨리.”

그동안 잠잠하다 싶었는데, 오자마자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그를 보자 루시엘은 곤란했다.

“아니면 내가 할…….”

쪽.

촉촉한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하지만 키제프는 멀어지는 루시엘의 뺨을 붙잡고는 몇 번 더 입을 쪽쪽 맞췄다. 감미롭고 달콤했다.

파아아, 루시엘의 심장이 쿵쿵 울리더니 결국엔 선홍빛의 페어리 하트가 또로롱, 허공에 맺혔다가 떨어졌다.

그걸 냉큼 잡아챈 키제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페어리 하트, 커진 것 같은데?”

루시엘이 그의 손안에서 페어리 하트를 가져가 숨겼다.

“아니야. 키제프, 우리 이제 가는 거다?”

“응. 내일도 있으니까.”

“……못 말려.”

루시엘이 열기가 남은 입술을 매만지다가 거울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다 지워졌어.”

“넌 안 바른 게 제일 예쁜데. 이제 가실까요.”

키제프의 눈이 사르르 접히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걸으려는데, 또각거리는 구두가 자못 위태해 보였다.

키제프의 붉은 눈이 열심히 구르며, 주변을 샅샅이 찾아보더니 하얀색 슬리퍼를 가져와 신겨 주었다.

“마차에선 이거 신어.”

“……응.”

그러곤 루시엘에게 하얀 펌프스 두 짝을 맡기고, 공주님 안기로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졸지에 두 사람 다 양손이 바빠, 문은 키제프의 마법으로 열어야만 했다.

“발은 안 아프지만 힘센 남편 두니까 편하다.”

루시엘이 발을 가볍게 흔드는 걸 보며, 키제프가 웃었다.

어느덧 마차를 타는 곳까지 다다르자, 공작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어슬렁 다가왔다. 그는 키제프와는 대조적이게도 금사가 수놓아진 블랙 슈트 차림이었다.

“결혼한 지 한참인데 언제까지 신혼이냐.”

“죽을 때까지요.”

“이놈이……. 내 딸 내놔.”

공작이 미간을 좁혔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보던 루시엘은 키제프의 품에서 내려와 공작의 에스코트를 받고 마차에 올랐다.

“엘링턴이 갈리우스 백작과 막스 하멜을 데리고 올 테니, 우리는 먼저 이동하자.”

“네, 아빠.”

“루시엘, 카빌가의 세 버러지들은 곧 가족 상봉을 하겠더군. 아버지가 후작 놈을 잡으러 암흑상에 잠입 중이니까.”

루시엘의 옆자리를 사수하고, 쿠션을 건네주며 공작이 말했다. 루시엘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아…… 통신구도 꺼 놓으시고 마탑 업무로 바쁘셨던 게 아니었어요?”

“네가 아스트리야에 가 있는 동안 움직이셨지.”

이어서 그가 자초지종을 조금 더 알려 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루시엘의 얼굴에 걱정과 미안함, 고마움이 차올랐다.

카빌 후작의 일도 놓치지 않고, 계시다니 든든했다.

“그동안 할아버지께서 혼자 고생 중이셨네요. 혹시 제가 도울 일이라도…….”

공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도 계시고, 솔리아페도 있다. 검은 날개가 얼마든 지원을 나갈 거다. 그보다 일단 우리는 중요한 건이 있으니 그쪽에 집중하도록 하자.”

“네, 알겠어요.”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 가족이 이렇게 힘을 합쳐 맞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힘이 되어 주었다.

결국 건너편에 앉게 된 키제프가 루시엘의 무릎 위에 구름 같은 담요를 덮어 주며, 불만을 표했다.

“……남의 신혼은 왜 방해하십니까.”

“누가 남이야. 내 딸이다.”

“제 아내입니다.”

“……흐암. 저 자도 돼요?”

“그래, 어서 자라.”

루시엘이 하품을 한번 하자, 두 사람은 이내 그녀가 잘 수 있게 입을 굳게 다물었다.

* * *

오랜만에 만난 갈리우스 백작과 막스는 쉼 없이 유리온실에 대해 토론 중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수로로 온전히 쏟아지게 만들면, 더 멋질 것 같은데요.”

“그렇지, 내 말이 그 말일세.”

두 전문가가 만나니 나눌 이야기가 많은지 마차에서 내려서도 끝이 없었다.

루시엘은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분의 빛나는 실력을 다시 보게 되어서 기뻐요. 부디 황실의 마음도 사로잡으면 좋겠어요.”

“그럴 겁니다. 루시엘 공자비님의 아이디어는 이번에도 빛날 겁니다.”

“고마워요. 이번 일도 기대가 커요.”

황성에 방문하기 위해 막스도 제법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와서 보기 좋았다.

어느새 황성의 안내인을 따라서 도착하니, 클로디아 황녀가 알현실이 있는 정원 앞으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제국의 별 클로디아 황녀님을 뵙습니다.”

“어서들 오세요. 알현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응접실에서 잠시 숨을 돌리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예의를 차린 인사들이 오갔고, 그녀가 루시엘을 살짝 불러냈다.

“공자비는 잠깐 나와 산책 좀 할까요?”

“좋아요. 저 잠시 황녀님과 산책 다녀올게요.”

클로디아가 루시엘의 손을 이끌면서 저를 따르는 호위 기사와 시녀인 라라 부인까지 물러가라고 일렀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클로디아가 긴히 말했다.

“공자비, 아스트리야에서 보름 후에 신전 맞이를 온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레이놀드가 곧 황궁으로 완전히 귀환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일에 차질이 생길 것 같은데…… 황자궁 사업을 훼방 놓지 않을까요?”

클로디아의 얼굴에는 자못 걱정이 서려 있었다. 루시엘도 사방을 경계하며, 조용히 목소리를 낮췄다.

“황녀님, 걱정하지 말아요. 그는 황성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될 거예요. 일단 여기보다는 황녀님 방으로 잠깐 갈까요?”

“내 방으로요?”

루시엘이 눈을 맞추며 답했다.

클로디아를 지지하기로 할 때부터 결정했던 일이었다.

“네, 이제는 말씀드릴 때가 된 것 같아요. 제가 언젠가는 꼭 털어놓을 이야기가 있다고 했었지요?”

“……그랬지요.”

클로디아도 그것이 내내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언젠가는 루시엘이 이야기해 줄 거라고 여겼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루시엘을 데리고, 황녀궁의 가장 안쪽 장소로 안내했다.

순백의 진줏빛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자그만 별채였다.

“여기는 내가 명상을 하는 곳이에요. 혼자서 조용히 생각할 일이 있을 때 머물곤 한답니다. 여기 틀어박히면 시녀들도 오지 않아요.”

“그렇구나.”

루시엘이 클로디아 앞에서 드래곤 마나 목걸이 부적을 풀고는, 말했다.

“역시 말보다는 보여 주는 게 효과가 빠르겠더라고요.”

루시엘은 클로디아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보랏빛 눈동자에 파문이 일며, 무얼 보여 줄지 고대하듯 침을 꼴깍 넘기는 게 보였다.

“얼마 전 훌륭하게 성장하신 클로디아 황녀님을 보고, 뿌듯함과 선망의 감정을 느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클로디아 황녀를 떠올리면 느끼는 선망과 동경의 감정.

루시엘의 물결치던 마나가 모여 또롱, 하고 보랏빛의 자수정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렇게 보석을 만들었어요.”

“루, 루시엘……. 이 힘은 도대체. 아, 제국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요정도 보석을 만든다고 했는데……!”

“맞아요. 제가 그 크리스탈 페어리니까요.”

루시엘은 맑게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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