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237)화 (237/282)

<237화>

페넬로페는 아직도 제단에서 마지막 보았던 풍경들이 눈에 선했다.

제 목을 내려치던 거대한 석상.

자신을 죽이라고 외치던 카일라 황비.

강제로 저를 붙들어 두던 영혼 없는 눈동자의 일꾼들.

하나뿐인 구원자라고 생각했던 카일라는 자신마저 죽음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었다.

실로 악몽보다도 더 무서운 현실이 눈앞에 펼쳐져 괴로워하던 끝에 찾아온 수마가 도리어 고마웠다.

문득 목을 더듬어 보았지만 멀쩡했다. 돌이켜보면 갑자기 잠든 건 자못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이상하고 괴이한 일들을 경험했기에 그다지 의심은 들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일어난 페넬로페가 우두커니 앉아 중얼거렸다.

“나 아직 죽은 건 아닌가. 여긴 어디지? 머리 아파…….”

낯선 방에는 침대와 간소한 테이블 하나였다.

문에 달린 창살 사이로 밖이 보였다. 간수들과 검은 로브를 걸친 마도사들이 사방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기사를 대동한 은발의 소녀가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눈부시게 환한 은발과 보석을 그대로 박은 듯한 눈동자.

크리스털 페어리, 루시엘.

그제야 멍하기만 하던 페넬로페의 눈동자가 또렷해지며, 불길이 확 일었다.

‘저 망할 계집애. 루시엘이 왜 여기에 있는……!’

그때 기사의 어깨에서 휘날리는 휘장이 보였다.

‘……잠깐. 저 기사의 문장은 벨슈타인!’

자신이 벨슈타인 가문에 붙잡혀 있는 것이란 걸 깨달은 페넬로페의 표정이 구겨졌다.

동시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병사 하나가 무언가를 슥 밀어 넣고는 다시 문을 쿵 닫았다.

찍찍, 시커멓고 더러운 쥐였다. 징그러운 긴 꼬리를 가진 그것을 보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페넬로페가 창살 너머 루시엘을 노려보며, 문을 쿵쿵 거칠게 두드렸다.

“……루시엘! 웃기지 마! 고작 쥐 한 마리에 내가 겁먹을 것 같아?”

분노로 씨근덕대는 페넬로페와 달리 루시엘은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녕, 페넬로페. 너와 대화를 하려고 왔어.”

“……대체 무슨 꿍꿍이야?”

“자신만만한 척도 할 줄 알고, 제법이네. 네가 쥐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거 알고 있어. 봐, 지금도 쥐에게 닿기 싫어서 까치발을 들고 있지?”

루시엘의 말에 페넬로페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니 나에게 쥐를 이용해서 괴롭혔지……. 쥐뿐만이 아니었어.’

사냥개를 데려와 루시엘의 팔을 물게 한 적도, 오물을 넣은 식사를 내어 온 적도 있었다. 힘센 시종을 시켜 어두운 방에 가두고, 괴롭힌 일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가장 크게 괴롭힘당한 건 페넬로페가 카빌 후작의 귀한 골동품을 깨뜨린 걸, 루시엘이 몽땅 뒤집어썼을 때였다.

그 일로 루시엘은 삼 일을 굶고, 마구간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또 보석을 얻고 싶으면, 루시엘에게 거짓 미소와 친절을 보였다. 바보같이 페넬로페를 또 믿었다. 그렇게 저 아이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

“닥쳐, 루시엘! 죽여 버릴 거야!”

페넬로페가 길길이 날뛰며 초록 눈을 굴렸다.

‘멍청하긴. 지금은 내게 적대적으로 굴수록 너에게 더 불리해. 페넬로페.’

루시엘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잠자코 있었다.

지금 이 모습도 전부 공작을 비롯해 가족들이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아가 마님을 모욕한 죄를 묻게 해 주십시오.”

대신에 검은 망토를 두른 기사와 마도사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루시엘이 그들을 제지한 다음 페넬로페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괜찮아요. 페넬로페, 여긴 벨슈타인 공작성이고 넌 갇혀 있지. 내게 적대적으로 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 진짜! 짜증 나.”

페넬로페가 홱 뒤돌아서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이를 꽉 깨물었다. 분하지만 루시엘 계집애의 말이 맞았다.

“지금부터 네 대답에 따라서 달라질 거야.”

“뭐가?”

“그 쥐 한 마리에서 끝날지…….”

루시엘이 지팡이를 소환해 플라이 마법으로 쥐를 둥실 허공으로 떠오르게 했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한 쥐는 네 발을 마구 휘저으며 더욱 발버둥 쳤다.

뒷걸음질 치던 페넬로페는 찍찍거리던 쥐가 얼굴과 점점 가까워질수록 미친 듯 고개를 저었다.

“흐으…… 싫어.”

소름 끼치는 풍경에 페넬로페는 거의 벽에 달라붙었다.

“……괴물로 변하는 쥐와 인사하게 될지 말이야.”

루시엘의 시푸른 마나가 일렁거리며, 페넬로페가 갇힌 독방 안으로 스멀스멀 차올랐다.

이내 쥐의 번뜩이는 검은 눈과 마주친 페넬로페가 그만 쥐가 마물로 변하는 줄 알고 소리를 질렀다.

“꺄아아악!”

페넬로페가 덜덜 몸을 떠는 사이, 루시엘은 쥐를 다시 바닥으로 풀어 주었다. 덕분에 겁에 질려 엎드린 페넬로페의 손등 위로 쥐가 기어 올라왔다.

또 한 번 비명을 지른 페넬로페가 그만하라고 난리를 쳤다.

“그, 그, 그만해! ……젠장! 좋아, 뭘 원하는데?”

사실 루시엘은 쥐를 괴물로 변하게 만드는 마법 따위는 몰랐다.

검은 날개의 마도사는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잠깐 겁을 주니 생각보다 쉽게 페넬로페가 태도를 바꾸었다.

“……카일라를 끝낼 수 있게 협력해 줘.”

“뭐라고?”

페넬로페의 초록 눈에 또다시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내가 너를 도와줄 것 같니? 그딴 제안을 다 하고 말이야.”

페넬로페의 말에 루시엘의 진홍빛 눈이 짙어지며 침잠했다.

“제안 아닌데. 왜냐면 넌 선택지가 없으니까. 믿었던 카일라에게 버림받았으니 이제 돌아갈 곳이 없겠지.”

그 말에 정곡이 찔린 페넬로페가 파르르 손을 떨면서 흥분해 외쳤다.

“……나, 난 돌아갈 집이 있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카빌 후작가는 망했다. 돈도, 명예도 잃어버릴 허울뿐인 후작가를 페넬로페가 선택할 리 없었다.

제집을 두고, 몇 년 동안 카일라를 따라다닌 것도 같은 이유였다.

황금과 보석, 높은 신분과 으리으리한 집, 권력과 부.

페넬로페가 그토록 바라고 꿈꾸는 그 모든 것들.

“잠깐, 문을 열어 주세요.”

루시엘의 부탁에 병사가 문을 열었다.

끼이익, 쿵.

무거운 문이 열리자 루시엘은 총총 페넬로페에게로 다가가기 전 두르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가려져 있던 옷차림이 드러났다.

자연스레 루시엘에게로 페넬로페의 시샘 어린 시선이 달라붙었다.

일부러 보란 듯이 걸치고 왔다.

향기를 머금은 분홍빛 실크 드레스와 다이아몬드 머리핀과 목걸이 등 장신구가 눈을 뗄 수 없게 눈이 부셨다.

황녀보다도 호화스러운 차림은 그야말로 벨슈타인이기에 가능하단 말이 절로 나왔다.

“……지금 내 신세를 비웃으면서 날 비참해지게 하려는 거야?”

페넬로페의 얼굴에 떠오른 열등감에 루시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페넬로페.”

누구보다 사치와 허영을 좋아하는 페넬로페에게는 잘 통하리라 생각했다.

“카빌 후작가는 망했고, 네가 꿈꾸는 부잣집은 없잖아. 이번 일에 협력하면, 목숨을 살려 주고 다른 부유한 귀족가의 혼처를 알아봐 줄 수도 있어.”

“……!”

루시엘의 달콤한 유혹에 페넬로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바지런히 눈을 굴렸다.

“뭐야…….”

“내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저게 사실이라면 생각지도 못한 황금 동아줄이 하늘에서 내려온 기분이었다.

어릴 적에는 철이 없어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벨슈타인 공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

그래서 그런 가문의 아들을 잡은 루시엘이 더 부럽고 짜증이 났다.

제 아버지 말을 들어 보면, 루시엘은 본래 노예 출신이었을 테니.

그 출신도 비루할 터.

하지만 루시엘은 물론이고, 벨슈타인과는 원수 같은 관계였는데.

‘날 이렇게까지 생각해 준다고?’

페넬로페가 속으로 궁리하는 사이, 루시엘은 그녀의 굴러가는 머릿속을 빤히 알 수 있었다. 가문을 등에 업는 걸 좋아하는 페넬로페라면, 자신의 제안에 혹하기도 하겠고, 저를 의심하기도 할 터였다.

“우린 오랫동안 원수같이 지냈잖아? 어째서 그런 호의를 베풀겠다는 건데?”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루시엘의 말에 흔들렸다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협박, 제안 다음은 감정으로 호소해야겠다.

루시엘이 은빛 긴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감정을 다잡았다.

“……페넬로페, 그동안 너를 미워했던 건 사실이야.”

‘사실은 지금도 널 미워해.’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로 루시엘이 바라보자, 페넬로페도 말하기 어려운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

“하지만 지금은 그 악마에게 이용당한 너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해. 무엇보다 카일라를 처치해야겠다는 절실함이 더 커.”

“……그 잘난 벨슈타인인데. 내 도움 없이 불가능하다고?”

페넬로페가 입술을 삐죽였다.

“너도 나처럼 되고 싶었겠지. 그 맘 이해해. 나는 운이 좋았어. 페넬로페, 너도 나처럼 기회를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야. 인생을 새롭게 살 기회.”

루시엘이 진지한 얼굴로 그리 말하면서 제 손을 내밀었다.

‘자, 얼른 내 손을 잡아. 페넬로페. 이용하고 버려 줄 테니까. 네가 나에게 그랬듯이.’

복수를 위해서라면, 잠깐 연극쯤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페넬로페는 아직도 머뭇거린 채 루시엘을 쏘아보았다.

자존심과 고집이 강한 페넬로페에게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

루시엘이 그만 뒤돌자, 그사이 누군가 탁탁탁, 소란스럽게 오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공작이었다. 서늘한 붉은 눈이 구르며, 페넬로페를 향하더니 미간을 좁혔다.

“……우리 새아가에게 혀를 잘못 놀리다니, 실성했구나.”

“아빠……! 다 듣고 계셨던 거예요?”

“당연하지, 루시엘, 협박의 기본은 xx부터 xx 하는 게 기본이다. 그래야 버러지가 기어오르지 않지.”

“…….”

느닷없는 공작의 팔불출 행동에 루시엘은 자못 민망해졌으나, 의외로 페넬로페에게 효과가 있는 듯했다.

달싹거리기만 하고 꾹 닫고 있던 페넬로페의 입술이 열렸다.

“……좋아, 루시엘. 카일라를 잡는 일에 협조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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