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과거에 황자가 제 아버지를 독살하려고 들었군. 그럴 만한 자야.”
키제프가 서늘한 눈을 하고는 그리 말하자, 루시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야 퍼즐이 맞춰진 기분이야. 아빠께 어서 말씀드려야겠어!”
아까보다는 한층 생기가 생긴 루시엘의 손목을 잡아 끌은 키제프가 반달 눈을 사르르, 곱게 휘며 웃었다.
“루시엘, 이제야 너다워졌군.”
“그런가?”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변화를 다른 사람이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조금 부끄러웠다.
키제프가 포켓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루시엘에게 내밀었다.
하얀 종이 껍질을 벗겨 내자, 말랑말랑한 분홍색 마시멜로가 나왔다.
“루시엘은 달달한 거 먹으면 머리가 더 잘 굴러가잖아.”
그의 말대로 마시멜로를 입안에 넣자, 딸기 우유 맛이 났다. 더욱 또렷해진 눈망울을 굴리며 루시엘이 말했다.
“우움, 그러게. 머리가 맑아진다! 고마워. 키제프.”
둘은 서둘러 회의실로 다시 돌아왔다. 루시엘은 아직 카드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공작에게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빠,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시칠렌은 힐다 볼라디를 조사하다가 가장 먼저 알게 된 지역이니, 공작과 자르가 단장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자르가는 현재 성에 없었다.
루시엘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차린 공작이 카드를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우리 딸이 부르니 가야지.”
부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는 가족들을 향해, 공작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복도에서 마주친 엘링턴도 궁금했는지 은근슬쩍 따라왔지만, 공작이 무서운 눈빛으로 쫓아냈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루시엘은 공작의 너른 등을 보며 뒤를 따라 집무실로 향했다. 소파에 마주 보고 앉은 그가 물었다.
“무슨 일이지?”
“황자와 카일라의 음모를 하나 알게 된 것 같아요. 바로 와인이었어요.”
“와인?”
“전에 와인 재배지 시칠렌을 조사하신 적이 있지요?”
공작의 물음에 루시엘이 고개를 가만 끄덕이며, 제 추측들을 하나씩 열거했다. 루시엘의 말이 이어질수록, 공작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그러니까 황자와 카일라는 오래전부터 황제의 독살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예요.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 와인 재배지까지 준비해 두었고 계획이 실패할 걸 계산해서 병들게 만들기까지 했던 것 같아요.”
“허,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군. 어쨌든 증거가 있다면 처리할 수 있겠구나.”
공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하지만 그게 문제예요. 독살을 정확히 언제 꾸몄는지 그 시기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잠깐. 나도 한 가지 기억나는 게 있다.”
공작은 자르가가 시칠렌을 다녀와 보고했던 것이 떠올랐다.
‘마을을 돌던 중 시칠렌이 황성으로 와인을 납품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본래 와인의 주 생산지는 리카르도의 피피아노 마을이 유명하지. 원래는 황성의 와인 납품 지역이 그곳이었는데, 5년 전쯤 돌연 시칠렌으로 바뀌었다는구나.”
그의 말에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그때부터 음모를 꾸몄던 걸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지. 어쨌든 동기는 확실한 놈이니.”
“하지만 아직 증거가 없어요.”
“없다면 만들어야지…….”
“네엣?”
“찾아보자는 말이다. 캐서린이 우리를 도와줄 거다.”
무심결에 속내를 드러낸 공작의 스산한 붉은 눈이 굴러갔다. 눈을 동그랗게 떴던 루시엘도 이내 그에게 동조했다.
“찾아보고 없으면 만드는 것도 좋겠어요, 아빠.”
그렇게 해서라도 황자는 끌어내려야 하니까.
과거 황제에게 독을 먹인 행위는 반역죄가 틀림없었다.
그렇게 얻은 권력과 힘을 이용해 벨슈타인을 짓밟고 루시엘을 착취했다. 시클라인은 억울하게 죽었다.
“……역시 그쪽이 낫겠지?”
끄덕끄덕.
루시엘의 머리를 기특하게 쓸어내린 공작이 소파에 느른하게 기대앉았다.
이내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키제프가 준 달콤한 마시멜로를 먹어서일까.
루시엘의 머릿속에 번개가 치듯 빠르게 무언가가 지나갔다.
“옳지. 좋은 생각이 났어요.”
공작의 귀를 기울이자, 루시엘이 방법을 속닥속닥 알려 주었다.
바로 황자의 방에 숨겨진 통로를 만들어 두는 것이다.
그곳에 모든 증거를 싹 만들어 놓는 것이다.
클로디아에게 듣기를 과거 황자의 사냥터는 없애 버렸고, 황자 궁은 빈터로 남아 있었다.
새롭게 레이놀드가 오더라도 그 방이 아닌 다른 곳에 머물게 될 거라고 했다.
과거 황자가 사냥터에서 단독으로 벌인 행동을 더는 못 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빈 터라면 그곳에 황궁 건축물도 만든 적이 있는 갈리우스 백작을 데리고, 황자 궁 개조 사업을 제안하는 거야.’
이동포탈 가호석을 얻은 다음, 폐지하도로 향하는 이동포탈과 황성의 지하 감옥과 통하는 이동포탈을 만들어 두고, 마지막은 와인에 넣은 독약까지.
“……그러려면 갈리우스 백작을 불러야겠군. 그런데 황성의 지하 감옥은 왜지?”
“지하 감옥의 죄수들을 빼돌린 건 중죄잖아요. 그것도 추가하려고요.”
“……좋은 생각이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이 필요해요. 황자와 발루크 상단의 죄를 증명해 줄 사람들.”
“호, 그렇군. 카일라도 지금은 발루크 후작 부인이니 묶어서 처리할 수 있겠군.”
그의 입가에 악당과도 같은 미소가 차올랐다. 시계를 잠시 확인한 그가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시간이 제법 되었군. 슬슬 그것들이 제단에서 어쩌고 있는지 볼까.”
“네.”
두 사람은 다정하게 다시 회의실로 돌아갔다.
그들에게 죗값을 돌려줄 날이 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 * *
“이러니 마녀인들 안 반하겠나. 하, 참.”
한편 혼자서 거울을 보면서 제 미모를 감상하고 있던 아르제온은 이내 아래층에서 들려온 쿠궁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 들어왔다.’
그간 고독하게 홀로 이 제단을 지키고 있던 그는 저것이 평범한 굉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때마침 그의 은빛 팔찌를 통해 루시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아르제온. 듣고 있어?
“루시엘, 너인가.”
―카일라가 사람들을 이끌고 제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동하고 있어.
“역시 그랬군.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나. 내가 저놈들을 모조리 얼려 버린 후 나가서 제단을 무너뜨릴까.”
―그건 안 돼. 거기에 붙잡힌 사람들이 휘말려서 희생당할지 몰라.
루시엘의 말에 아르제온이 차갑게 말했다.
“어차피 여기 제물로 붙잡혀 온 인간들이 아닌가. 이미 죽은 목숨들이지.”
―아직 살아 있잖아. 그리고 그 사람들이 중요한 증거가 되어 줄 거야. 그 사람들을 보호해 줘. 부탁해!
무슨 증거냐고 되물으려는데, 루시엘의 말이 뚝 끊겼다.
“이봐! 루시엘……. 아니 점점 내가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이내 그는 얼음의 마녀인 척, 루시엘이 준 보석에 들어 있는 마나로 심장으로 채우며 중얼거렸다.
“누굴 죽이는 건 자신 있는데, 구출하는 건 어렵단 말이지.”
아르제온은 텔레포트를 이용해, 아래층으로 가 보았다. 이윽고, 지독한 썩은 내를 풍기는 마나를 발견했다. 그것의 주인인 듯한 여자도.
냄새만 지독한 게 아니라, 끈적끈적하게 기분 나쁜 마나였다.
‘저건 대체 뭐지?’
* * *
스윽.
파아아, 쿠구구궁.
“꺄아아악!”
희생된 여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카일라가 일꾼 중 하나를 방 안에 밀어 넣자, 추락한 터였다.
일꾼들의 머릿수가 아직은 넉넉했다. 열두 명을 채우고도 넘쳤다.
얼음의 제단을 오르는 일이 생각보다 지연되자, 카일라는 날카로워져 있었다.
“박사는 아직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검을 만져 보기도 전에 다 죽겠습니다.”
크루거 백작이 정장에 묻은 얼음을 털어 내면서 말하자 페넬로페가 초록 눈을 굴리며 물었다.
“그런데 왜 마검이 이런 곳에 있는 거예요? 찾아오기 귀찮게.”
“그건 지키기 위해서란다. 이렇게 위험한 곳에 묻어 두면, 누구든 쉽게 가져가지 못할 테니까.”
페넬로페의 순진한 질문에 카일라가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헨드릭 황실의 보물, 블루 익스큐션을 훔쳐 달아난 건 생전의 일이었다.
임신해 부른 배를 붙잡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 그녀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점쟁이 노파가 말하기를 제 배 속에 든 아이는 사내아이가 맞다고 했다. 제국의 황제가 되어 줄 아들이 틀림없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나 자신만을 사랑하겠다 말할 때는 언제고, 노이슈반 황제는 보란 듯이 황후의 침실로 향했다.
‘황후에게서 더는 후사를 보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우리 아기만을 완벽한 황태자로 만들어 줄 거라 믿었는데.’
제국법으로 황위는 남성에게 우선적으로 계승되었다.
이미 태어난 황후가 낳은 여자아이야 멀리 정략결혼을 보내 버리면 처리가 간단했지만, 만에 하나! 아들이 태어난다면 제 아이의 앞길이 순탄치 않을 거라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아무도, 아무도 믿을 수 없어.’
결국 이사벨 황후의 회임 소식을 들은 카일라는 그날 결심했다.
훗날을 위해 자신과 제 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해야겠다고.
닥치는 대로 방법을 찾았다.
오랜 고서를 뒤졌고, 삿된 것이든 아니든 미래를 가질 방법을 찾았다. 돈을 써서 황실 관리인들을 매수했고, 결국 헨드릭 황실의 창고에 들어갈 수 있었다.
황실에는 아주 흥미롭고 귀한 보물들이 많았으나,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부르는 검이 있었다. 푸르고 검은 아지랑이가 너울대는 검.
‘블루 익스큐션, 처형 검이라 마음에 들어.’
그것을 홀린 듯 갖고 나와 머리맡에 두고 잠든 날 밤, 악마의 방문이 있었다.
산양의 뿔, 염소의 발굽을 가진 악마가 웃으며 제안했다.
“여인이여, 아기를 지킬 힘이 필요한가?”
“그래, 필요해.”
“뭐든 할 수 있어?”
“물론이지. 사람도 죽일 수 있어.”
“좋아. 그럼 네 아기가 세상에 군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게. 저 마검을 더 강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악마가 내민 것은 마검을 소울 이터로 만드는 방법이 적힌 고서였다.
카일라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황자인 레이놀드를 낳자 황제는 다시 그녀에게 사랑을 주고 황태자로 만들어 주기로 약속했었지만 카일라는 이제 그를 믿지 않았다.
황후와 황후 배 속의 아이를 반드시 죽여 후환을 없앨 것이다. 그래야만 레이놀드, 제 아기가 무사히 황제에 오를 수 있을 터이니.
황후에게 저주를 걸었고 그것이 통했는지, 그녀는 결국 유산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제국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내 아드님, 레이놀드. 내 보물.’
레이놀드가 황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레이놀드에게 제국을 선물해 주겠노라 다짐하는 순간, 운명의 장난처럼 기이한 불치병에 걸렸다.
온몸이 시커멓게 문드러지는 기이한 병이었다.
혹자는 악마와 거래를 하면 걸리는 병이라고 했다.
억울하고 원통했던 탓일까.
카일라는 죽어서도 황궁과 레이놀드를 떠나지 못했다.
‘이대로는 떠날 수 없어! 하지만 소울 이터만 완성한다면.’
하루하루, 어린 레이놀드를 곁에서 지켜보았다. 훔친 블루 익스큐션을 제 아드님의 손에 쥐여 주어야 했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세상을 떠돌던 카일라는 제국의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크리스털 페어리를 만났다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감정으로 보석을 만들어 내는 요정, 크리스털 페어리.’
이종족 요정이 만들어 낸 보석은 신비롭고 강한 마법의 힘을 머금고 있으며, 그들의 보석이 박힌 물건 역시 강해진다고 했다.
그 순간 카일라는 깨달았다.
소울 이터로 만들어진 그 홈에는 크리스털 페어리의 보석을 박아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