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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29)화 (229/282)

<229화>

벨슈타인의 검은 마차 두 대가 줄지어 브랑카르 학술원을 빠르게 빠져나오는 것을 확인한 한 용병 사내가 눈을 빛내며 수풀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프리다 박사가 만든 인형이었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에 비친 것은 이내 프리다 박사가 지니고 있는 통신구로 전달되었다.

얼음의 제단 앞에서 그걸 확인한 프리다 박사가 냉큼 카일라에게 보고했다.

“카일라 님. 벨슈타인 일가 모두가 탄 마차를 감시 중에 있습니다. 아마도 타운하우스로 돌아갈 예정인 것 같습니다.”

“……참으로 태평하기 짝이 없구나. 이 와중에 가족 모임이라니…….”

카일라의 붉은 입술 위로 조소가 어렸다. 페넬로페가 뭣도 모르고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그래도 그들에게 한 방 먹여 준다니 기대되네요. 루시엘이 붙잡히면 제게도 보여 주세요. 어머니. 아셨지요?”

“후후, 그래. 지난번의 복수를 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네. 루시엘, 그 계집애에게는 늘 당하기만 했으니까요. 억울하잖아요.”

“그랬구나. 걱정 말렴.”

카일라가 적당히 대꾸해 주며 눈동자를 굴렸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지만, 벨슈타인이 마차를 통해 이렇게 대대적으로 움직인다는 소식을 들으니 묘수가 떠올랐다.

평소 그들은 은밀하게 움직였기에 행적이 확실치 않았다. 아무래도 이동마법을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학술원 인근이나 황도의 시내는 보는 눈이 많고 강력한 실드로 보호되어 있어 접근이 어려웠다.

반면에 외진 숲길은 마차를 습격하기에 용이한 위치였다.

“우리가 블루 익스큐션을 구하러 가는 동안, 박사는 벨슈타인 쪽을 마무리하고 제단으로 들어오도록 해라. 우리 먼저 출발할 테니까.”

카일라가 검은색의 긴 손톱을 다듬으며, 프리다 박사에게 명령했다.

“예, 카일라 님. 하지만 저쪽에서 감시를 눈치챌 수 있을 듯합니다.”

벨슈타인은 마법뿐 아니라 기민한 감각을 가진 초월자나 다름없는 인간들이라고 들은 바가 있었다.

“그거야 지금은 모르지. 일단 추적하다가 눈치챈 것 같으면 그때 마차를 공격하도록 해. 이것으로 말이야.”

카일라가 품 안에서 아껴 둔 마법 아이템을 꺼냈다. 지진을 일으키는 어스퀘이크 마법이 담긴 스크롤이었다.

“제아무리 벨슈타인이라도 달리는 마차에서 지진까지 일어난다면 당황하겠지. 혼란이 일어나면 그때 루시엘 그 아이만 빼내 오는 거지. 안타깝구나. 하필 제단에 가는 중요한 날과 겹치다니…….”

“알겠습니다. 이따 뵙지요.”

카일라 자신이 직접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일이 더 쉬웠을 터였다. 그 속내를 아는 크루거 백작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

“박사께서 진작에 카일라 님의 새로운 몸을 완성시켜 주었더라면, 마음껏 움직이셨을 텐데 이거 아쉽습니다.”

백작 말대로 프리다 박사는 믿을만한 실력을 가졌지만 가끔은 너무 굼뜬 감이 있었다.

카일라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얼음의 제단 입구로 가서 얼어붙은 바위 앞에 섰다.

이내 그녀가 제 손톱으로 긁어 손목에 피를 내자, 검은 소환진이 바닥에 생성되었다. 이내 시커먼 형상의 골렘이 나타났다.

쿵쿵!

붉은색으로 불타오르는 주먹을 가진 화염 골렘이 얼음 바위를 박살 냈다.

쿠구궁 입구가 열렸다.

“과연 카일라 님이십니다.”

크루거 백작이 카일라를 추켜세웠고 페넬로페도 그녀를 동경하듯 바라보았다.

“모두 안으로 들어가라.”

카일라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페넬로페를 포함해서 희생될 제물들이 모두 제단 내부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도 따라서 들어갔다.

이내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모두 사라진 후에야 은신해 있던 검은 날개의 정찰조들이 서둘러 보고했다.

* * *

공작성의 회의실을 밝히는 마법 랜턴이 잠시 깜빡거렸다.

“지금쯤이면 그게 빈 마차라는 걸 눈치챘을 법도 하지요?”

가족들을 돌아보면서 루시엘이 불안하게 진홍 눈동자를 굴리며 물었다.

“어디 모자라지 않으면 곧 알게 되겠지. 자, 루시엘. 네 차례로군.”

공작이 카드를 손에 쥔 채, 낼 패를 훑어보다가 루시엘에게 알려 주었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도 여유로운 공작의 태도에 존경심이 솟았다. 루시엘은 초조함에 눈동자를 굴리다가 카드의 패를 냈다.

클로버의 10, J, Q, K, A가 맞춰졌다. 로열스트레이트 플러쉬, 가장 좋은 패가 나왔으니 게임 끝이었다.

“앗, 죄송해요! 다들.”

“허……. 우리 루시엘은 도박에도 재능이 있군.”

루시엘에게 감탄하는 공작을 비롯해 테이블에 앉은 솔리아페와 이벨린도 카드를 내려놓았다.

이벨린이 웃으면서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손주 며느리는 못 하는 것이 없구나.”

“……다음 게임 바로 가 볼까.”

솔리아페는 승부욕이 불타오른 듯했다.

하지만 긴장을 풀자며 시작한 카드게임을 하면서도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가중되는 것 같아 루시엘은 게임에 집중할 수 없었다.

레오니의 입학식이 끝나고 빠르게 들어오는 제단의 소식들에 루시엘은 자꾸만 걱정되어 심장이 두근거리는 중이었다.

물론 제단은 완벽히 복원되었고, 가짜 블루 익스큐션과 아르제온이 마녀로 잠입해 있기까지 했다.

그리고 공작과 길리아트가 그들의 발을 묶어 둘 미끼도 곳곳에 설치해 두었다고 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아까 영상구 속 그 장면을 보았기 때문일지 몰랐다. 크루거 백작이 모아서 데려온 십여 명의 사람들.

‘이 일이 잘못되면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칠지 몰라.’

“저는 그만할래요.”

루시엘이 빠지자 세 사람은 아쉽지만, 새롭게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테이블에서 일어난 루시엘은 길리아트와 키제프가 지켜보고 있는 영상구 쪽으로 다가갔다.

이 회의실 안에는 가족들만이 있었고, 캐서린과 엘링턴, 아흰도 다른 방에 모여서 영상구를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이렇게만 있어도 괜찮나요?”

루시엘이 걱정스레 묻자 길리아트가 답했다.

“현장은 대부분 검은 날개가 움직이는 중이란다. 지켜보고 있다가 필요할 때 언제든 이동하면 된다.”

“네.”

루시엘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폐지하도의 이동포탈에 설치해 둔 영상구에 카일라 일행의 움직임이 포착된 후로는 계속 정신이 없어.’

그것과 페넬로페가 가진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함께 비교하며 추적이 계속되었다.

이어 벨슈타인의 마차에 따라붙은 감시망을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프리다 박사가 사용하는 인형들 역시, 제르다가 만든 것처럼 강한 마정석을 사용하고 있었어.’

그걸 눈치채고 레오니의 졸업식을 마치고 가족들은 마차에 오르는 대신 캐서린을 따라서 벨슈타인의 본성으로 이동한 참이었다.

몰아치듯 그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어서 루시엘은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곧 얼음의 제단 입구로 들어서는 카일라의 모습이 영상구에 비쳤고, 지켜보던 길리아트의 주름진 눈이 깊어졌다.

“제발 저놈들이 우리가 뿌려 놓은 미끼에 하나라도 걸려들면 좋겠구나.”

“직접 가서 처리하는 게 빠르지 않겠습니까.”

게임에 집중하던 공작이 슥 고개를 돌려 아들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있어 봐. 제단에서 놈들이 기어 나오면 그때 움직여도 늦지 않다.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이지.”

태평하게 말하는 아버지의 여유가 부러웠다.

대비를 해 두었는데도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는 건 루시엘과 키제프 둘뿐인 것 같았다.

길리아트가 두 아이의 어깨를 감싸면서 말했다.

“잠시 밖으로 가련.”

“네, 할아버지.”

먼저 앞장서서 가던 길리아트가 두 아이를 데리고 다다른 곳은 공작성의 숨겨진 마법 통로였다.

회의실 앞 복도를 빙빙 돌고 나타난 계단을 세 번 오르자 어느새높다란 첨탑의 꼭대기였다.

흐린 하늘은 먹구름이 껴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세찬 바람이 길리아트의 로브며, 긴 백금발을 흩뜨려 놓았다.

“할아버지.”

“우리 어른들도 불안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저 감추고 있을 뿐이지. 불안은 불씨 같아서 잘 옮겨붙거든.”

그제야 루시엘과 키제프도 깨달았다. 조급해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알겠어요, 할아버지.”

키제프와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였다. 이내 흐린 하늘을 보던 루시엘이 물었다.

“그럼 어쩌지요?”

“믿어야지. 믿음은 빗물 같아서 처음에는 아주 작지만 모이고, 또 모이면 불안의 불씨를 꺼 준단다. 그러다 한바탕 쏟아지기도 하고, 무지개도 뜨겠지.”

“모두 무사했으면 좋겠어요.”

할아버지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담아 두며 루시엘이 말했다.

“그렇게 될 거다. 너희들은 여기서 바람을 조금 더 쐬고 오겠느냐? 어차피 제단의 상황은 통신구로 계속 보고가 될 테니까.”

“네, 감사해요. 할아버지.”

길리아트가 마법 통로를 따라서 가 버리자, 남은 둘은 눈을 마주치고는 나란히 걸터앉았다.

어느새 잿빛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키제프가 루시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시엘, 얼음의 제단은 이제 우리가 더 잘 아는 곳이야. 그들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야.”

“응. 할아버지 말씀처럼 불안해하는 건 그만둘래.”

키제프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루시엘이 맑게 웃었다. 그러다 이내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그 크루거 백작이 데려온 사람들 말이야. 모두 작업복을 입고 있었어. 그리고 아까 그가 그랬어. ‘새로운 작업을 하게 될 거다.’라고, 그들은 전부 어디에서 데려온 걸까?”

“죄인들을 제물로 쓰려고 했을 테니 아마도 부랑자나, 진짜 죄수이지 않을까.”

키제프의 추측에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였다.

“아, 아니. 그거 말고…… 그 사람들이 어디에서 작업했는지 말이야.”

아까 영상을 통해 보았던 그들의 옷은 붉은 보라색으로 얼룩덜룩 물들어 있었다.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 이제 뭔가 알 것도 같아. 바로 와인이야!”

발루크 상단이 취급하는 품목이기도 한 와인.

와인 재배지, 시칠렌.

황성의 와인이 들어가는 지방.

그동안 몇 번이나 들었는데도 간과하고 있었다.

힐다 볼라디가 거기서 일했었고, 과거 회귀 전 레이놀드가 사라졌다가 돌아오면 와인 냄새를 풍기곤 했었다.

게다가 레이놀드가 정무를 처리하게 될 때쯤에는, 황제의 병색이 완연해졌다.

그리고 황제에게 독을 먹였다는 죄를 뒤집어쓴 것이 바로 약제사 시클라인이었다.

그 독이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된 계획이었을지도 몰랐다.

‘오늘은 아주 좋은 날이니 와인을 준비해야지.’

벨슈타인을 치러 가기 전.

황제의 생일 연회 직전.

그렇게 말하던 레이놀드의 목소리가 문득 떠오른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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