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키제프가 루시엘의 허리를 붙잡아 올려 주다가 잠시 그대로 시선을 마주했다.
“루시엘, 아무 일 없을 거야.”
“응. 나 괜찮아.”
그렇게 대답했지만 조금 긴장되는 건 사실이었다.
키제프가 루시엘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올려 준 덕분에 저울 위로 겨우 올라갈 수 있었다.
차가운 금속성의 저울 그릇에 루시엘이 올라가니 흔들거리던 왼쪽 저울이 아래로 쿵 내려갔다.
루시엘은 저울과 연결된 사슬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녀보다도 키제프가 더 초조한 기색으로 지켜보았다.
기사의 투구에서 다시 쩌렁한 음성이 울렸다.
“죄인의 죄만큼 무게 추를 추가하겠다.”
루시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사 석상이 빈 저울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이내 기사의 갑옷 건틀릿 중, 손가락 마디 한 부분이 탱그르, 저울 위에 추가되었다. 갑옷의 일부를 무게 추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끼이이.
저울이 아래로 한없이 내려가나 싶어 루시엘도, 키제프도 마른 침을 삼켰다.
‘제발 멈춰…….’
기사가 고개를 삐그덕 하더니 푸른 안광이 빛났다. 내려가던 저울이 다시 위로 올라갔다.
“……죄인이 아니로군. 다른 죄인을 데려와라. 죄인이 없다면, 나와 내기를 하나 하지. 나를 이기면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에 루시엘과 키제프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루시엘이 저울에서 내려오는 걸 키제프가 받아 주곤, 서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기사의 투구에서 쏟아진 푸른 빛이 두 사람을 비추며 경고했다.
“뒤로 물러나라.”
쿵. 쿵.
기사 석상 역시 한 발 뒤로 물러났고 이내 쿠궁 소리를 내며 커다란 양팔 저울과 처형대는 지하로 다시 사라졌다.
푸른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내기를 시작한다. 나를 이기면 나갈 수 있지만 내가 이기면 처형을 다시 집행한다.”
“……빌어먹을. 어떻게든 죽일 심산인가.”
키제프가 석상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내기일까?”
루시엘도 불안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기사가 발을 쿵 구르자 천장에서 얼음 덩어리와 함께 커다란 망치가 뚝 떨어졌다.
퍼억!
망치를 집어 든 기사가 얼음을 내려치자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주어진 시간 동안, 망치로 내리쳐도 깨지지 않는 얼음을 만들어 내라. 주어진 물건과 지팡이에 기록되어 있는 마법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기사가 재차 발을 쿵 구르자, 이번에는 천장에서 커다란 곰 인형이 떨어졌다. 인형은 바구니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기사 석상이 블루 익스큐션을 뽑아 들더니, 푸른색의 모래시계를 소환했다.
“제한 시간은 이 모래가 다 떨어지기 전까지다.”
모래시계가 팽그르 돌아가며 10이라는 숫자가 떠올랐고,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하며 시간이 흘러갔다.
마음이 급해진 두 사람이 얼른 달려가 잠긴 뚜껑을 열고는 바구니 안을 살폈다.
바구니 안에는 철광석, 금괴, 바위, 다이아몬드, 소금, 조개껍질, 모래, 나무 조각, 물이 든 병, 얼음 틀과 푸른색 지팡이까지 얼음을 만드는 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물건을 살펴보던 키제프가 먼저 말했다.
“철광석이나 바위처럼 단단한 물건들을 전부 넣고, 얼리면 되지 않을까?”
한참 고민하던 루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단순한 접근인 것 같아. 철광석이나 다이아몬드를 넣고 얼린다고 해도, 얼음은 그냥 얼음일 뿐인걸.”
“……그럼 어떻게 하지?”
“얼음은 물을 얼린 거잖아. 얼리기 전에 얼음을 더 단단한 상태로 변형시켜 줄 무언가가 있을 거야.”
루시엘의 말에 무언가 떠오른 키제프가 소금을 들고 외쳤다.
“아, 소금.”
“응?”
“벨슈타인의 사용인들이 눈을 치울 때 소금을 뿌려서 얼음을 더 빨리 녹이는 걸 본 적이 있어……하지만 지금은 반대지.”
그의 말을 찬찬히 들어 보던 루시엘이 말했다.
“그래도 상태를 바꾼다는 비슷한 원리로 생각해 보면…… 으음.”
루시엘은 무언가 생각이 날락 말락 하는데 키제프가 모래가 든 병을 들었다.
“모래 알갱이가 들어가면 얼음의 표면이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음, 얼음의 사이 사이가 더 좁혀져서……?”
“일단 뭐라도 만들자. 아니면 전부 다 시도해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루시엘이 턱을 괸 채 서성이는 사이에 키제프가 푸른색 지팡이를 살폈다. 거기에는 워터 마법과 아이스 마법 옆에 3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기회는 세 번뿐이군. 시간이 없어. 우선 모래로 해 볼게.”
키제프는 얼른 모래와 물을 얼음 틀 안에 넣고, 지팡이의 아이스 마법을 사용해서 단숨에 모래를 섞은 얼음 덩어리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그걸 퍽, 벽에 던지자 깨져 버렸다.
“모래는 아니군.”
다시 다른 물건들을 살펴보던 키제프가 시계를 보았다. 남은 시간은 벌써 5분 35초였다.
“루시엘, 시간이 없어!”
주변을 살피던 루시엘의 눈에 곰 인형이 포착되었다.
“어, 잠깐만. 저 곰 인형도 함께 떨어졌으니까 재료로 사용할 수 있는 거겠지?”
“그야 그렇지만, 곰 인형이 도움이 될까?”
순간 루시엘의 머릿속에 마탑에 있던 시절 에리카가 알려 준 기억이 떠올랐다.
‘루시엘, 졸지 말고 잘 봐 봐. 얼음을 얼리기 전에 이렇게 요 배때기를 째서 솜을 찢어서 넣어 주면…… 솜의 섬유 조직과 물이 결합하면서 거대한 그물망을 형성하거든. 그럼 아주 단단한 최강 얼음이 된다구! 거의 무기나 다름없다니까!’
“응, 곰 인형을 뜯어서 저 안의 솜이 필요해! 솜을 찢어서 물과 함께 얼릴 거야.”
“솜……?”
시계를 다시 확인했을 때는 3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일단 빨리!”
“어어.”
두 사람은 곰 인형에게 다가가서 커다랗게 부푼 배를 검으로 갈랐다. 하얗고 몽글몽글한 솜이 이리저리 쏟아져 나왔다.
솜을 손으로 마구 찢은 다음, 틀 안에 넣고 워터 마법과 아이스 마법을 사용해서 얼음으로 만들기까지 3초를 남기고 겨우 완성했다.
“휴, 됐다.”
두 사람은 만들고 난 다음, 긴장감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쿵. 쿵.
기사 석상이 해머를 들고 다가와서 얼음 틀에서 얼려진 사각형의 얼음을 내리쳤다.
퍽, 퍽!
아무리 내리쳐도 얼음은 단단한 그대로였다. 기사 석상은 얼음을 집어 들더니, 이번에는 벽과 바닥에 마구 내동댕이쳤다.
그렇게 해도 얼음은 녹아서 물이 살짝 생길지언정, 부서지지는 않았다.
기사 석상이 얼음을 파괴하는 걸 멈추고, 해머를 쿵 내려놓았다.
“……패배를 인정한다.”
“성공이네, 루시엘.”
키제프가 루시엘의 손을 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내 닫혀 있던 방 안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드디어 나갈 수 있겠다.”
키제프가 어서 이 지긋지긋한 곳을 빠져나가려는데, 루시엘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키제프.”
루시엘은 바닥에서 아직도 빛나고 있는 자신의 핑크 다이아몬드를 바라보았다.
석상이 뒤로 물러나며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루시엘은 얼른 핑크 다이아몬드를 전부 주워 석상이 움직이는 근처로 다가갔다.
“루시엘, 위험해!”
키제프의 만류에도 루시엘은 석상이 밟을 만한 위치에 핑크 다이아몬드를 다시 놓았다.
파삭, 파사삭.
핑크 다이아몬드가 부서지면서 아름답게 빛났다.
“좋아, 됐다. 키제프, 잠시 환상이 시작될 거야.”
쿠구구구, 쩌억.
루시엘의 외침과 동시에 환상이 시작된 듯 순식간에 천장이 무너지고 바닥이 갈라져 내리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벽도, 바위도 전부.
얼음의 제단이 통째로 뒤흔들렸고, 기사 석상 자신마저도 무너진 잔해에 깔렸다.
“루시엘!”
키제프가 얼른 루시엘의 몸을 안고는 플라이 마법으로 날아, 떨어지는 잔해들을 피해 다녔다.
파아앗.
루시엘이 실드를 만들었다. 기사가 만들어 낸 환상이지만, 환상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실제와 같은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기사의 온몸이 조각났고, 그가 지니고 있던 블루 익스큐션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쩌면 이 석상이 가장 꿈꾸었던 건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었을까.
어느새 무너져 내려가던 제단은 다시 원상태로 보였고, 기사 석상만이 아직 꿈꾸듯 정말 부서져 내린 것처럼 쓰러져 있었다.
모든 환상이 풀렸지만, 그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다.
‘핑크 다이아몬드가 여러 개라 더 강력한 환상을 보여 주는 걸까?’
그저 환상으로 끝나지 않게 해 주자.
강제로 누군가를 처형하는 것도 고통스러웠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저런 위험한 검을 이곳에 두고 갈 수 없었다.
루시엘은 여전히 쓰러져 있는 기사 석상에게 다가가서 스피넬을 꺼냈다.
그러곤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에게 자유를 허락해 주세요.”
스피넬이 분홍빛을 뿜어내며 이내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기사 석상의 거대한 몸이 재가 된 듯이 가루가 되어 날아가며 소멸하기 시작했다.
루시엘은 천천히 걸어가, 바닥에 놓인 블루 익스큐션을 들었다.
순간 심장이 욱신거릴 정도로 엄청난 마나와 함께 냉기와 어둠이 루시엘의 몸속까지 퍼졌다.
“윽…….”
어둠의 기운이 그녀의 손에 감겼고, 기분 나쁘게 소름 끼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자그만 소리들이 귓가에 속삭였다.
마치 저주받은 물건처럼.
루시엘은 블루 익스큐션을 손에서 놓쳤다.
탱그랑!
“키제프, 이 검 이상하고 기분 나빠…….”
“루시엘! 만지지 마. 나는 어둠의 힘을 가졌으니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한 키제프가 조심스레 블루 익스큐션을 들었다.
“역시 난 괜찮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서 살아서 나가는 것조차 힘들 것 같았는데, 결국 해냈어. 다행이야, 우리 둘 다 무사해서…….”
루시엘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그래도 검을 찾아서 안심이야. 이제 가족들과 아르제온을 찾으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