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209)화 (209/282)

<209화>

“이제 남은 건 여기뿐이군. 가자.”

“응.”

쿠웅.

거대한 푸른 문을 키제프가 밀자 정적과 냉기가 감돌았다.

커다란 방은 마치 홀에 가까웠다. 푸른 카펫이 길게 깔려 있었고 그걸 따라 계단 위까지 올려다보니 석상이 하나 있었다.

이내 열고 들어왔던 문이 다시 쿵 소릴 내며 닫혀 루시엘은 깜짝 놀랐다.

단단한 갑옷과 투구를 쓴 채 서 있는 기사의 석상이었다. 어찌나 큰지 한참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기사의 허리춤에는 푸른 칼날과 검은색 오러를 뿜어내는 검이 꽂혀 있었다.

‘저건 블루 익스큐션!’

키제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숨을 꼴깍 넘기며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석상일 뿐이지만, 그대로 접근하면 뭔가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쿵쿵쿵.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은 강력한 마나가 느껴졌다.

키제프가 루시엘을 데리고 얼른 커다란 기둥 뒤로 몸을 숨기고는 검을 보며 낮게 속삭였다.

“석상의 허리춤을 부수어서 가져올 순 없을까.”

루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쉬울 리 없어. 위험할 것 같아. 저게 평범한 석상이 아닐지도 모르니까.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루시엘이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하지만 여기에 뭐가 있는지는 움직여서 알아봐야 해.”

키제프가 루시엘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내가 하이드 마법으로 기척을 숨기고 다녀올게. 루시엘은 여기 있어.”

루시엘이 그의 옷깃을 붙잡아 핑크 다이아몬드를 건넸다.

“키제프. 조심해. 그리고 이거 내 보석인데 석상 앞에 몇 개 깔아 줘.”

“핑크 다이아몬드?”

“응. 파괴시킨 자가 꿈꾸는 환상을 잠시 보여 주는 것 같아.”

“그렇군. 좋아, 해 볼게.”

키제프가 이내 하이드로 모습과 기척을 감추고는 석상 가까이 다가갔다.

데구르르, 툭.

핑크 다이아몬드를 던지고 민첩하게 뒤로 빠진 키제프는 주변에 특이한 것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쉬이 보이지 않았다.

키제프가 탐색하는 동안 루시엘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

‘블루 익스큐션은 처형 검이었지. 그리고 이곳은 제단. 그렇다면 저 갑옷을 입은 기사야말로……. 심판자 혹은 처형자이려나? 죄인을 처형해 검에게 제물로 바친 것이 아닐까?’

루시엘은 입술을 꾹 깨물며 추측했다. 잔뜩 찌푸린 미간은 풀리지 않았다.

‘뭔가 단서가 더 있을 텐데 내가 뭘 놓친 것일까?’

바지런히 눈동자를 굴리던 루시엘은 검에 처음부터 파여 있던 홈과 소울 이터, 그리고 기괴한 인형극에 대한 것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제 보석을 박기 전에도 이미 홈이 파져 있었어요. 거기에 비밀이 있지 않을까요?’

‘이건 마검을 소울 이터로 만드는 방법이다. 네가 말한 보석이 들어갈 구멍, 그건 누군가의 영혼을 삼켜 만들었다는 흔적이지.’

‘제자들을 하나, 둘, 셋…… 열둘을 모아서 죽였대요.’

저 커다란 석상은 옮기는 것도, 부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석상이 지키고 있는 블루 익스큐션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제물을 바쳐야 한다.

생각을 정리하던 루시엘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제물이 바쳐지는 의식이 바로 여기에서 일어났던 거야.’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끼쳤다.

그래서 미리 이 검을 곁에 두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폐지하도의 이동포탈을 만들어 둔 것도 카일라 황비가 벌인 걸까?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이 사실을 키제프에게도 알려야 했다.

마침 곁으로 돌아온 키제프에게 루시엘이 추론한 것들을 알려 주자, 심각하게 표정이 굳어졌다.

“루시엘, 네 추측이 맞다면 여기에 제단의 흔적이 있겠군.”

“맞아.”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걸 찾아보자. 지금 저 문이 닫혔고 우리는 나갈 수 없어. 제단에 무언가를 바쳐야만 해.”

루시엘이 무겁게 말했다.

“카일라 황비와 레이놀드 황자는 사람을 바치고 검을 얻었어. 그리고 내 권속 피닉스의 깃털은 부활의 힘이 있잖아. 그러니까…….”

그녀의 말에 키제프의 표정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하…… 루시엘. 지금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야. 너를 제물로 바쳐 내가 살고 저 검을 얻으면 내가 기뻐할 것 같아?”

순간 몹시 화가 나고, 목이 매어서 키제프는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다.

“그리고 권속의 주인인 네가 죽는 거라면, 피닉스가 널 살리지 못할 수도 있잖아. 스스로의 생명을 걸고 도박을 하고 싶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앞에서?”

루시엘이 눈앞에서 죽는 꼴을 다시 한번 보면, 그는 정말 돌아 버리고 말 테니까.

“앗…… 키제프. 진정해.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내가 죽는다는 말은 안 했거든?”

아직도 서늘하게 굳은 얼굴이 풀리지 않은 키제프가 물었다.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말이었어. 제단에 바쳐야 하는 것이 반드시 생명은 아닐지도 몰라.”

“……좋아. 약속하자.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둘 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겠다고.”

“응. 나도 키제프가 죽는 거 보고 싶지 않아.”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이 서로를 눈에 담았다.

키제프와 루시엘이 함께 하이드로 모습을 감춘 채 다시 카펫이 깔린 곳으로 다가갔다.

카펫을 들추자 그 아래에 푸른색의 둥근 돌이 있었다. 그걸 들어 올리자 이내 바닥 전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돌바닥에서 먼지가 뿌옇게 올라왔다.

“콜록.”

루시엘이 기침을 한 입을 손으로 막으면서 키제프와 함께 앞에 생성된 것을 지켜보았다.

무시무시한 기구들이 있었다.

검은색의 커다란 양팔 저울과 처형대.

두 사람이 침을 꼴깍 삼키자 이내 그들의 예측대로 석상의 투구 속에서 푸른 안광이 밝혀졌다.

쿵. 쿵.

석상이 기어이 움직여 발을 내디뎠다. 아까 깔아 놓은 핑크 다이아몬드는 아직 부서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목뒤에 서늘한 공포감이 내려앉더니 곧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얼음 제단의 집행자. 죄인은 저울에 올라라.”

“……아, 안녕하세요. 집행자님?”

루시엘이 석상에게 말을 걸어 보았지만, 이지가 있어 대화가 통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살아 있는 마물이 아닌 점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루시엘, 저울에 뭐라고 적혀 있는데.”

먼저 저울을 살펴보던 키제프의 말에 루시엘이 다가갔다. 그림이 있는 상형 문자, 타이라 제국의 고대어였다.

루시엘이 이전 생에 익혀 둔 고대어였다.

“하나. 저울의 왼쪽에 올라가면 오른쪽에 그 죄만큼 무게추가 떨어질 것이다.

둘. 오른쪽 저울이 아래로 기울어져 바닥에 닿은 자는 처형되고 그 영혼은 검에 깃들 것이다.

둘 반. 오른쪽 저울이 바닥에 닿지 않을 경우, 집행자와 내기해서 이기면 나갈 수 있다.

셋. 열두 개 영혼의 무덤, 소울 이터가 완성되면 집행자는 소멸하고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드는 검은 모래시계가 작동할 것이다.”

저울의 세 번째 사용법을 읽어 내린 루시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죄인을 열두 명, 제물로 바치면 전부 해결되는 거였구나. 저 집행자를 소멸시키고 검을 얻는 것도. 죽은 카일라 황비의 부활도 말이야!”

“정말 끔찍하기 그지없군. 루시엘,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하지? 저울에 올라가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건가?”

“하지만 우리는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건 아니겠구나. 죄의 기준을 모르니까 그건 단언할 수 없어. 아!”

루시엘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그의 팔을 흔들면서 말했다.

“레이븐이 사신이니까 불러내서 물어보자. 그는 인간의 악행 목록을 가지고 있잖아. 그러고 나서 우리 둘 중에 악행이 덜한 쪽이 저울 위로 올라가자.”

과거 피로연에서 레이븐을 처음 만났을 때, 막시무스의 악행 목록을 읽어 주던 것을 루시엘도 들었다.

“좋아, 네 말대로 그러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앞이 캄캄하기만 했는데 그래도 조그만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키제프는 얼른 레이븐을 불러냈다.

스르르.

루시엘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가련하고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레이븐, 또 부탁이 있어.”

“……저 기분 나쁜 놈은 또 뭐야?”

“내 정신과 연결해 봐.”

키제프의 머릿속에 있던 기억들과 경험들, 루시엘과의 대화를 다 전해 받은 레이븐이 말했다.

“저거 진짜 기분 나쁜 석상이네. 지가 뭔데, 사람을 심판하고 죽이는 거야.”

“빨리 악행 목록 좀 보여줘.”

“잠깐만.”

레이븐이 머리카락을 넘기더니, 소매를 뒤적뒤적해 두루마리를 하나 꺼냈다.

슥 살펴보던 레이븐이 말했다.

“키제프, 너는 안 되겠는데……? 바로 죽을 것 같아.”

“왜? 혹시 마물을 죽여서인가?”

“그것도 그렇고. 사신과 영혼을 걸고 계약을 했으니까. 그건 지옥에서는 금기시된 일이지.”

“……그렇군.”

키제프가 씁쓸하게 입매를 틀며 답했다.

“그럼 더 추가해도 상관없겠다. 그럼 루시엘은……?”

“어디 보자아. 아가 마님은…… 어, 음. 몇 번의 거짓말과 마물을 죽였지만, 감점이 없고 오히려 플러스인데? 네가 구한 생명이 엄청난가?”

“정말? 내가?”

루시엘이 놀라 진홍빛 눈망울을 깜빡였다.

‘내가 구한 생명이라……. 회귀하면서 원래 죽을 사람들을 도와서 그런 걸까?’

당장 떠오르는 건 시클라인과 벨슈타인 공작가의 가족들. 레이븐이 금빛 눈을 갸름하게 뜨면서 말했다.

“네가 올라가. 안 죽을 거 같아. 선행이 악행을 이긴 모양이니까. 자, 그럼 정리 끝이지?”

그가 씩 웃으면서 그대로 검은 연기가 되어서 사라졌다.

‘그래, 나 자신을 믿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파아아, 그녀의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 보답하듯 심장이 물결치며 핑크 다이아몬드가 만들어졌다.

루시엘은 용기를 내서 저울의 왼쪽으로 다가갔다.

“키제프, 나 여기 올라갈 수 있게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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