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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81)화 (181/282)

<181화>

“어떤 스타일이 마음에 드시나요? 요런 백합 같은 청순한 스타일도 잘 어울리실 듯하고 아니면 아직 나이가 어리시니 귀여운 스타일도 좋겠어요.”

캐서린은 마법 매거진을 넘겨 베아트리체의 드레스를 몇 벌 보여 주었다.

“우리 손주 며느리는 뭘 입든 다 어울리지. 하지만 나는 고전적이고 우아한 레이디 룩이 좋겠구나.”

뒤에서 지켜보던 이벨린도 매거진을 톡톡 두드리더니 검은색 실크 드레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머, 이것도 정말 예쁘겠어요.”

캐서린과 이벨린이 함께 손을 맞잡으며 루시엘을 보면서 눈을 반짝였다.

“음, 저는…… 마음에 드는 걸 조금 더 찾아볼게요.”

이 분위기에 영 적응이 어려웠지만 이벨린이 무척 즐거워 보여서 루시엘도 그냥 즐기기로 했다.

매거진을 계속 넘기던 루시엘은 마음에 드는 스타일의 원피스를 찾았다.

팔을 끼우는 부분이 망토처럼 생긴 민트색의 단정한 원피스였다. 둥근 넥 라인에는 진한 녹색의 리본이, 여미는 부분은 금장 단추가 달려 한층 고급스러워 보였다.

“할머니, 이따 외출 가는 게 중요한 자리가 아니라면 저는 이 원피스로 할게요.”

“아주 귀여운 원피스로구나, 그렇게 하렴. 루시엘.”

“민트색은 흰색과 조화가 좋으니 하얀색 모자를 쓰면 더 예쁘겠어요. 가방과 구두도 하얀색으로. 머리는 끝부분만 컬을 넣어 길게 내리시고, 화장은 연하게.”

루시엘이 원피스 하나를 고르자 캐서린이 그에 어울리는 소품과 머리, 화장까지 툭툭 매치해 주었다.

“역시 전문가시네요.”

“자, 그러면 입어 보실까요.”

캐서린과 이벨린은 루시엘보다 더 설레하는 얼굴이었다. 뒤에서 베시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위로 올라오시겠어요?”

“네.”

하얀 가운 차림의 루시엘이 그녀가 만들어 놓은 분홍빛 소환진 위로 올라섰다.

캐서린이 가느다란 지팡이를 이리저리 섬세하게 움직여, 마법 매거진에 코디한 대로 아이템을 하나씩 루시엘에게 입혀 주었다.

원피스부터 모자, 가방, 구두까지.

머리 모양이나 화장은 조금 더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직접 하는 것보다는 훨씬 편리했다.

“자, 다 되었어요. 아, 마지막으로 볼을 핑크로 물들일게요.”

거울을 들여다본 루시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민트색이 낯빛을 환하게 밝혀 주는 것 같았다.

“예쁘고 마음에 들어요.”

“우리 루시엘, 귀여운 소공녀가 따로 없구나. 민트색이 이렇게 예쁜 색이었나? 흠흠, 나도 비슷한 스타일로 맞춰 입고 싶은데.”

“호호, 대부인께 어울리는 민트색 드레스를 찾아 드리겠습니다.”

“그래, 하지만 오늘은 루시엘 때문에 왔으니 이 아이 먼저 신경 써 주시게.”

“아가 마님의 피부는 워낙 하얗고 매끄러우셔서 오늘은 딱히 관리가 필요 없을 듯해요. 중요한 날에 받으시면 되겠어요. 그나저나 다른 옷도 입어 보시겠어요? 마법이라 간단하니 얼마든지 입어 보셔도 되니까 말이지요.”

캐서린의 제안에 루시엘은 고민하다가 입기 무척 까다롭지만, 아름다운 드레스를 하나 골랐다.

목선이 드러나고, 가느다란 허리선이 돋보이는 진줏빛의 우아한 펄 드레스였다.

“이런 드레스는 자신 없었는데 한번 입어 볼게요.”

“어머, 루시엘. 이건 좀 어른스럽고 성숙한 디자인이구나. 살이 많이 보여. 이건 언제 입으려고 하니?”

“……아, 그게요, 할머니.”

이벨린의 물음에 루시엘이 볼이 붉어졌다. 분홍빛 볼 터치를 해서인지 더욱 복숭아처럼 사랑스러웠다.

쉬이 말을 하지 못하는 걸 보니 무언가 수줍은 이유인 모양이었다.

“……혹시 네 남편에게 보여 주려고?”

눈치 빠른 이벨린이 묻자, 루시엘이 고개를 살랑 끄덕였다.

“……네.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어머, 남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그 마음을 내가 모를까. 나도 마찬가지거든. 그이에게 내가 언제나 예쁘게 보였으면 한단다.”

이벨린이 곱게 웃으면서 말하자, 루시엘도 훈훈해졌다.

“두 분은 오래 알고 지내셨는데도 너무 사이가 좋으셔서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요. 행복이 눈에 보인다면 소복하게 쌓일 만큼이요.”

“세월이 지나도 설렘을 유지하는 건, 관계를 오랫동안 좋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지. 루시엘 네 나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설렐 때이겠지만.”

이벨린의 조언에 루시엘이 진홍빛 눈을 초롱이며 귀 기울여 들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명심하겠어요.”

루시엘은 이전 생의 기억이 있긴 했어도 사람들과 깊은 유대를 나눈 적이 없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아는 것이 적었다.

그래서 이벨린의 연륜이 묻어나는 이런 조언들이 더욱 와닿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을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던 캐서린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 데뷔탕트 볼이 멀지 않았네요. 아가 마님께서도 이제 참가하셔도 될 나이 아니신가요?”

“데뷔탕트 볼이라. 루시엘이 곧 열다섯 살이니, 아직 이르지만 사교계에 데뷔해도 될 나이가 되었구나.”

“그치만 문학 살롱을 통해서 대부분 저를 알게 된 것이 아닌가요?”

지난 문학 살롱이 워낙 화제였던 덕에 사교계에 웬만한 사람들은 루시엘을 이미 알고 있기는 했다.

“그건 그렇지만 본격적인 사교 데뷔 무대를 따로 가져서 모든 귀족 사회에 알리는 것이 관례란다. 무엇보다 그동안 너와 우호적으로 지내고 싶은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거란다. 그리고 네 이름으로 된 파티를 주최할 수도 있고, 보다 사교계 활동을 넓힌다는 포지션을 취할 수 있지.”

이벨린의 말에 캐서린도 말을 보탰다.

“모든 소녀가 가장 꿈꾸는 데뷔 무대인걸요. 문학 살롱에서의 첫 인상이 눈부시긴 했지만, 사 년이나 지났으니 이제 조금 흐릿해지기도 했어요. 다시 한번 존재감을 보여 주실 때가 되었지요? 사실 저도 아가 마님의 사교계 데뷔를 기다리는 사람 중 하나랍니다.”

“……저를요?”

“네, 사교계를 이끌어 줄 새로운 얼굴이 필요하니까요.”

“사교계의 꽃은 세리안 백작 부인인 라리에트 님이 아니신가요?”

루시엘이 알고 있기로는 그랬는데,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젊었다.

“10년 넘게 사교계의 꽃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물론 지금도 그분은 최고지만, 사교계에서는 늘 새로운 선망의 대상을 찾지요. 모든 이가 동경하는 레이디가 되고 싶지 않으신가요? 유행을 선도하는 건요?”

캐서린이 양손을 포옥 잡고는 루시엘에게 물었다.

“글쎄요. 저는 그런 것보다는 할 일이 많아서…….”

문학 살롱에 참여했던 일로 이미 유명세는 한번 치른 것 같았다. 루시엘은 사실 그런 인기인의 자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루시엘, 유행을 선도할 만큼 네 영향력이 커지면 많은 것들을 시작할 수도 있지. 그때 그 유리공예처럼.”

그건 이벨린 말이 맞았다.

“그 말씀에는 공감해요. 다만 지금은 시기가 적절한 것 같지 않아요. 조금만 더 나중에요.”

루시엘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래, 이 할미도 하나 구상하고 있는 것이 있거든. 루시엘이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리마.”

“앗……. 나중에 살짝 말씀해 주세요.”

그러나 사교계의 유명세가 필요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그래. 지금은 더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

캐서린 앞이라 이벨린은 다른 말은 삼갔다. 루시엘은 목선이 우아하게 드러난 드레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캐서린, 저 이거 입혀 주세요.”

목선이 드러난 진주빛 드레스를 입은 루시엘을 보고 두 사람은 꺄악 비명을 질러 댔다.

“이건 우리 루시엘을 위해 만들어진 옷이 아닐까. 감격스러울 정도로 너무 예쁘구나.”

“천사가 따로 없으셔요, 흑흑.”

그 반응에 안심하면서 루시엘은 그 드레스는 나중에 입어야지 생각했다. 키제프는 뭐라고 할지 반응이 기다려졌다.

다시 민트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이번에는 이벨린의 우아한 민트색 투피스 드레스까지 다 고르자 루시엘은 던컨에게 부탁해, 그녀에게 시원한 음료와 딸기 타르트를 권했다.

모름지기 상대의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은 가식이 아닌 진심 어린 칭찬.

‘그리고 맛있는 것이 기본이지.’

루시엘은 말갛게 웃으면서 캐서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캐서린 부인은 센스와 안목이 참 뛰어나시네요. 많은 귀족의 의뢰를 받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칭찬 감사드려요. 오, 이것 정말 상큼하고 맛있군요.”

“네, 벨슈타인의 제 영지에서 재배한 딸기로 만든 거예요.”

“오호, 영지를 가지고 계신가요?”

“네. 작은 과수원에 가깝지만요.”

루시엘이 자랑스레 말했다.

“대단하군요.”

그녀가 타르트를 한 입 더 먹더니, 황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캐서린 부인이 제 전담 테일러가 되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오, 아가 마님의 전담 테일러라면 아주 기쁘게 받아들이지요.”

캐서린 부인이 처음보다는 한결 부드럽게 풀어진 눈으로 말했다.

루시엘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명함을 주시겠어요?”

“예, 잠시만요.”

그녀는 가져온 가방에서 작은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캐서린 몽트엘, 테일러(Tailor).

‘역시 똑같이 명함 옆에 직함이 적혀 있네. 이걸로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렇다면 직접 확인해 볼까?’

“한 가지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네, 얼마든지요.”

캐서린이 몸을 느긋하게 기대면서 대답했다.

“엘리샤 리즈벳이라는 사람을 알고 계세요?”

“……!”

딴청을 피울 새도 없이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표정이 무너졌다는 걸 스스로도 아는지 캐서린이 말했다.

“네, 같은 소속의 테일러랍니다. 그녀는 제 동료예요.”

‘그냥 동료일 뿐이라면, 왜 그렇게 놀라는 걸까?’

“그렇군요. 같은 소속의 길드인가요?”

“예, 그런 셈이지요.”

캐서린이 빙그레 웃었고, 이벨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엘리샤 리즈벳이 정보상이라고 소개를 받았는데, 자네도 마찬가지인가?”

그러자 캐서린은 조금 전의 사근사근한 인상이 사라지고, 당황해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이 되었다. 여기서 발뺌해도 이미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난처한 기색이 가득했다.

“……어떤 경로로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테일러는 본인이 정보상이라는 것을 절대 밝히지 않습니다.”

“어쨌든 맞다는 거네요?”

루시엘이 미소를 지으며 묻자,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마스터의 귀에 이 사실이 들어가면 저는……. 절대로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캐서린이 간곡하게 부탁해 왔다. 정보상이라는 신분이 의뢰인이 아닌 외부인에게 드러나면, 조직에서 스스로 나가게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달칵 열렸다. 익숙한 저음과 함께 공작이 비스듬히 입구에 기대고 서 있었다.

“실례하지.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니지만 그것은 걱정 말게. 마스터가 직접 알려 준 정보이니.”

“……아빠?”

“루이비드, 언제 등장할지 궁금했다.”

이벨린은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헛기침을 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훤칠하게 큰 키와 수려한 외모의 공작을 코앞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에도 놀란 캐서린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동자만 데룩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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