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어쩔 수 없지. 영지의 세금을 늘려라.”
“이미 지난 2년 동안 세 배나 올렸습니다. 올릴 대로 올려서 영지민들도 세금을 낼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마른 수건이라도 더 쥐어 짜내면 뭐가 나와도 나오겠지.”
고약한 카빌 후작의 말에 빌푸 마저 혀를 내두르며 답했다.
“……남아 있는 영지민들도 별로 없습니다요. 다 떠났습죠.”
“허, 천하의 배은망덕한 놈들 같으니라고.”
빌푸에게서 재정과 영지 상황을 전해 들은 카빌 후작은 분노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었다. 이내 침통함이 흘렀다.
지난 오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카빌의 자금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빚은 쌓여만 가고 모두가 카빌에게 등을 돌린 상황.
마치 끝나지 않는 암흑 터널을 통과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더는 대출을 낼 곳이 없어 그간 아껴 오던 애장 골동품도 하나씩 하나씩 떠나보냈다.
이제 남은 건, 이 저택과 수입이 점점 줄어 가는 조그만 영지, 그리고 새로 매수한 섬 하나뿐이었다.
사일런트 섬 매수에는 실패했지만 다른 조그만 섬을 샀다. 그곳에서 뭐라도 해 보려고 하는데 역시 자금이 딸렸다.
돈, 돈. 다 돈이었다.
‘프란델 호수만 내 손에 들어왔어도 지금쯤 모든 게 달라졌을 텐데!’
카빌 후작의 눈이 시퍼렇게 빛나면서 파르르 주먹을 쥐었다.
벨슈타인 놈들은 승승장구하는데, 저는 침몰하는 배처럼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벨슈타인이 계속 제 앞길을 가로막는 기분이었다. 프란델 호수 건도 그렇고, 사일런트 섬의 매수도 그렇고.
그렇게 오랜 세월 찾아다녔는데 크리스털 페어리는 결국 세상에 없었던 것인가. 허무하게 시간만 날린 꼴이었다.
‘그나저나 어디 뭐 좋은 게 없을까.’
이제 나이가 들어 머리를 굴리는 일도 확실히 힘들었다.
사업 몇 가지는 완전히 접었음에도 그는 아직 미련이 남아 있었다. 이제 황실에 드나들 수 있게 되었지만, 막상 돈이 없으니 사업 아이템이 있어도 제안하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좋지도 않았고.
카빌 후작은 오랜만에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그동안 고생한 탓에 스트레스로 인한 악성 탈모로 머리가 거의 남지 않았고, 심한 식탐까지 생겨 더욱 살이 뒤룩뒤룩 찌고 있었다.
페넬로페를 데려간 발루크 후작 부인에게서 그간 아무런 소식이 없었기에 제 아내는 딸을 잃어버렸다며 황실의 수사기관이나 사설탐정에도 의뢰를 맡겼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러다 그녀는 몸져눕기까지 했다.
그러던 지난겨울, 발루크 상단의 마차가 와서는 제 딸 페넬로페가 보냈다는 편지를 전달하고 돌아갔다.
「아버지, 어머니.
걱정하실까 봐 편지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발루크 후작 부인이 무척 잘해 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쩌면 곧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때가 되어도 저는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에요. 그냥 그렇게 알아만 두세요. 제가 진짜 어울리는 곳이 어디인지 찾았으니까요.
저는 가난한 건 싫어요. 힘없는 건 더 싫고요. 저는 제국 제일의 레이디가 되고 싶어요.
그럼 건강하세요.
-페넬로페」
틀림없는 페넬로페의 필체였다. 카빌 후작은 딸아이의 마음이 집에서, 아니 카빌 가문에서 완전히 떠났다는 걸 느꼈다.
페넬로페의 편지를 다시 펼쳐 보던 카빌 후작에게 집사가 허겁지겁 와서 고했다.
“주인님, 막시무스 도련님께서 귀환하셨습니다! 어, 어떻게 할까요?”
카빌 후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돈이란 돈은 싹싹 긁어 도박장에 부었던 모자란 아들놈이었다.
“어쩌긴. 제 발로 들어왔으니 잘됐군. 거꾸로 매달아 놔라!”
“……도련님만 온 게 아니라, 손님도 같이 왔습니다.”
“손님이라고? 웬 놈들인데?”
“와이번 양성 사업 후원 투자 매니저라나, 뭐라나.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와이번은 박쥐 날개를 가진 도마뱀 마물 아닌가?”
“예, 요즘 경마 대신 와이번 경주가 제국에 새롭게 유행 중인 모양입니다.”
“끄흠. 일단 서재로 들어오라고 해.”
이번에는 또 무슨 개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하는 심정으로 흐린 눈을 하며 카빌 후작이 팔짱을 끼고 그들을 기다렸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막시무스가 환하게 웃으면서 와이번 후원 사업 사무소 담당 매니저 세 명과 함께 나타났다.
장장 세 권의 보고서와 와이번의 자료를 가져오는 등.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춰 왔다.
존(노아)의 이야기를 들은 막시무스가 사육장에 방문해 마음을 굳히고 나서는 거액을 투자하겠다며, 대신 자기 아버지에게 후원 투자를 설명해 달라고 입을 털어 놨던 터였다.
저 혼자 나서면 아버지는 결코 믿어 주지 않을 테니 막시무스가 머리를 굴린 것이다.
한참 그들의 이야기에 경청하던 카빌 후작이 말꼬리를 잡았다.
“……그러니까, 잘만 골라 후원하면 수십 배의 수익이 날 수도 있는 구조라는 거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잘 고르지 못하면 돈을 다 날리게 될 텐데 위험부담이 너무 큰 것 같소.”
“그런 분들을 위해, 배수가 낮은 단기 후원도 있습니다. 원금을 보장하는 대신 수익률이 낮은 편입니다. 또한 이번 후원 투자는 벌써 1억 틸링 이상의 거액 투자를 결정하신 분들도 있을 정도로 신뢰도와 장래가 촉망되는 투자입니다.”
“허, 거참. 뭐, 일단 개념은 알았으니 이만 돌아들 가 보시오.”
사무소 사람들을 보내고 막시무스가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아버지, 그래도 전망이 밝아 보이지 않나요?”
“글쎄다. 어떤 와이번이 우승을 할지 알지도 못하는데 뛰어드는 건 도박장에서 룰렛 돌리는 거랑 뭐가 다르냐?”
“아닙니다. 도박이랑은 달라요. 저도 이번에 공부 좀 많이 하고 결정한 투자입니다.”
막시무스는 존에게서 들은 와이번의 정보를 카빌 후작에게 나불나불 전했다.
“……그래서 스칼렛코브라가 제일이라?”
“예, 와이번 사냥꾼이 몸소 경험한 거니 확실합니다. 게다가 그 어미는 지금 벌써 연속 5경기째 승리하고 있다니까요. 아, 오늘은 참여 못 했는데 아까워 죽겠네.”
“끄흠. 일단 알았으니 대기해. 나도 당장은 현금이 없다.”
“엥. 왜 없어요?”
“이놈아, 어디 돈 나오는 구멍이라도 있는 줄 아느냐?”
“……그, 그럼 투자 못 하는 건가요?”
“아, 있어 보래도.”
카빌 후작이 빌푸를 호출했지만 역시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막시무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면요?”
“네 어머니가 기절할 텐데?”
“아이, 그럼 저 도자기나 내다 팔아서 소액만 투자하죠, 뭐.”
막시무스의 말에 카빌 후작은 결국 고민 끝에 금고를 열어 집문서를 꺼내 왔다. 손이 덜덜덜 떨려 왔다.
“한 삼 년만 묻어 놓자고요. 아버지. 그러면 우리 카빌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불안하긴 했으나 카빌 후작도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었다. 이걸로 돈을 조금이라도 불릴 수 있다면, 한시름 덜 수 있을 터였다.
며칠 후, 루시엘은 카빌 후작가가 집을 담보로 해서 무려 10억 틸링을 마련해, 스칼렛코브라에 투자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안전한 단기 후원도 있었지만, 원금이 보장되지 않는 장기 후원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럴 줄 알았지. 역시 제정신이 아니야.’
미안하지만 스칼렛코브라는 제 어미처럼 승승장구하지 못한다. 단기간 성장해 1년 후 4연승을 거두긴 하지만, 그 후부터는 다른 와이번들에게 승리를 내주면서 뒤로 밀려난다고 했다. 막시무스도 거기 투자할 뻔했다면서 과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었다.
‘4년간 한 번도 우승을 못 하는 저주받은 코브라지.’
빠르게 망하는 마차를 탄 격이랄까.
저택이 넘어가면 조그만 영지 하나와 섬밖에 안 남을 터였다.
그 섬에선 아마도 그 일을 벌일 테지. 하지만 자금이 말라 당장은 시도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만 처리하면 카빌은 정말 빈털터리지. 아니, 애초에 가져서는 안 될 재물이었어.’
카빌의 그 부는, 남을 착취해서 가진 것이었으니 제대로 사용되지도 않았던 돈이었다.
루시엘이 정원을 가볍게 돌면서 생각하다가 블랙스콜피온이 있는 천막을 들여다보았다.
루시엘을 보자 블랙스콜피온이 꾸앙, 하면서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루시엘이 보석을 던져 주자, 와그작 씹어먹었다. 이빨이 제법 촘촘하게 나 있었다.
‘어? 원래 이 크기였어?’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와이번의 몸집이 약간 더 커진 것 같기도 해서 루시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우리 슬슬 헤어질 때가 와 가네.”
루시엘이 손을 우리 안으로 뻗자, 와이번이 다가와 머리를 내밀었다.
그때 천막 안으로 이벨린이 고개를 빼꼼 내밀면서 다가왔다.
“루시엘, 요즘 바빠 보이는구나. 이게 그 와이번이니?”
“앗, 할머니!”
요즘 이벨린은 솔리아페와 항상 같이 어딘가를 바삐 다녀서 황도에서도 마주치는 건 근 이틀 만이었다.
“네. 이미 후원은 진행했고, 지금은 와이번을 길들이는 중이에요.”
“오호, 보아하니 거의 다 된 듯싶구나?”
이벨린이 루시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네, 할머니 말씀대로였어요. 저 와이번도 저를 잘 따르는 것 같아요. 물론 보석을 더 좋아하지만요.”
루시엘의 말에 이벨린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랬구나. 어디 나도 한번 볼까?”
그러나 이벨린이 한 발자국 다가가자 와이번이 꿍, 소리를 내면서 겁에 질려 꼬리를 몸에 둘둘 휘감았다.
“호호, 드래곤은 무서워하는구먼. 루시엘, 오늘 바쁘지 않으면 시간 좀 내어줄 수 있겠니?”
“할머니랑 함께면 뭐든지 좋아요.”
“그래. 모처럼 황도에 왔는데 서로 같이 시간도 보내지 못하고 말이지.”
“엄마도 같이요?”
“솔리아페는 선약이 있다는구나. 오늘은 이 할미랑 둘이 데이트 가자꾸나. 참, 황도에서 지내는 동안 새로 고용한 테일러가 이따 방문하기로 했는데 루시엘, 너도 같이 단장을 받으면 좋겠는데?”
“알겠어요.”
“센스도 좋고, 테일러 마법도 제법 하던걸? 눈치도 빠르더구나. 방문 테일러는 처음인데 제법 만족스러웠지.”
“그렇군요. 방문 테일러라……. 그럼 여러 귀족가를 돌아다녀서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겠어요.”
“그렇지. 라리에트가 소개해 줬으니 그녀 이상으로 잘 알 거란다.”
이벨린의 말에 루시엘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녀라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엇, 잠깐만.’
루시엘은 엘링턴이 적어 주었던 공작이 만나기로 했다는 정보상의 이름을 가방에서 뒤적거려 꺼냈다.
메모에는 한 여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엘리샤 리즈벳.
루시엘은 이벨린에게 보여 주며 물었다.
“할머니, 혹시 그 테일러 이름이 이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