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우여곡절 끝에 노아는 막시무스를 따라 경매장 뒤편에 있는 골목으로 가며 주변을 힐끔거렸다.
살면서 이렇게 시끄럽고 화려한 곳은 처음이었다. 여기저기서 술과 돈, 시가 냄새가 풍겼다.
막시무스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거들먹거리면서 걷다가 뒤따라오는 노아를 힐끗 봤다.
“아까는 오해해서 미안, 형씨. 근데 인상이 좀 그래. 그…… 얼굴에 흉터도 있어서. 아무튼 저기가 내 단골인데 들어가자고. 술은 그쪽이 사는 거지?”
“네? 그, 그럼요. 제가 사야지요.”
“아, 여기 있는 동안은 말 편하게 하쇼. 원래 투자하는 사람들끼리는 친구지. 내가 누군지 알면 그때부터 납작 엎드려야 하겠지만 일단은 봐줄게. 아~ 천하의 막시무스 성깔 많이 죽었네.”
“그, 그럴까.”
막시무스의 말에 노아가 머쓱하게 대답하며 가게의 유리문에 제 얼굴을 비춰 보았다.
왼쪽 뺨에 생긴 자상.
날카로운 고아원의 철조망을 넘어가다가 찔려서 생긴 상처였다.
‘눈 쪽을 찔렸더라면 실명했을지도 모르지.’
주점 안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때문일까. 술이 들어가니 그를 꼬시기가 더 편해지는 듯했다. 막시무스는 조금만 띄워 주면 잘난 척을 해 대서 들어 주기 좀 괴로웠지만 슬슬 본론을 다시 꺼낼 시간이었다.
“아까 그 안내 들었지?”
“안내?”
“와이번 후원 투자가 시작된다는 안내 말이야.”
“아아, 들었지. 근데 당장에 결과를 내야 흥이 나지. 레드스네이크 봐 봐, 기가 막히잖아! 완전 미쳤어, 그놈! 나는 그놈한테 올인이다!”
막시무스가 홀린 듯한 눈으로 말하자, 노아가 신중한 척 깍지 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말했다.
“레드스네이크도 좋지. 좋은데, 난 좀 더 미래를 보려고.”
“미래?”
“레드스네이크의 새끼 와이번. 스칼렛코브라라는 녀석. 그 녀석이 자라면, 제 어미보다 더 강하고 빠를 것 같아서.”
“그걸 지금 어떻게 알아??”
“그게……. 먼 친척이 와이번 사냥꾼이라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거든. 정말 빠른 놈들은, 새끼 때부터 티가 난다더라고.”
노아가 목소리를 더욱 줄이자, 막시무스는 바싹 붙어 집중했다.
“그으래?”
“응. 내가 보기엔 어미보다 그 새끼가 완벽한 놈이야. 수십 배는 우스울 거야.”
노아의 추측에 턱을 문지르던 막시무스도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물었다.
“이봐, 존. 그럼 자넨 얼마나 투자할 건데?”
“난 천만 틸링 정도?”
그 말에 막시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겉보기엔 가난뱅이처럼 생겼는데, 나름 돈이 있는 모양이었다.
“크흠. 천만 틸링을 후원하고 최종적으로는 얼마 수익을 바라는 거지?”
“나는 그냥 가볍게 열 배만 먹으려고. 자네도 생각 있어? 아, 근데 수중에 돈이 없다고 그랬지. 아쉽게 됐다. 눈앞에 돈이 그냥 떨어져 있는 수준인데…….”
노아의 말에 막시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뭔 소리야.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 * *
루시엘과 상의를 마치고 마차 밖으로 나온 엘링턴이 담당 매니저에게 말했다.
“지난번 약속한 그대로 후원을 진행하겠네.”
“아아, 금액 그대로 유지하시겠습니까?”
“그렇다네.”
엘링턴이 장갑을 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서류는 준비되어 있으니 바로 사무실로 가서 진행하시면 됩니다.”
예기치 못한 돌발 사고에도 후원을 결정해 준 것이 그는 못내 고마웠는지 더욱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저 와이번을 잠시 데려가고 싶소.”
“……예에? 그, 그건 내부 규율상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매니저의 얼굴이 흐려지자, 루시엘이 엘링턴에게 손짓했다. 금액을 올리라는 제스처였다.
“지난번 약속한 금액의 두 배로 후원을 진행하지.”
“……1억 5천만 틸링이었으니, 두 배면 3억 틸링을 말씀이십니까?”
매니저의 눈과 입이 몹시 커다래졌다.
“하면 얼마나 데리고 있으실 참입니까?”
엘링턴이 이마를 톡톡 두드리면서 루시엘의 손짓을 기다렸지만, 루시엘도 블랙스콜피온을 얼마 만에 길들일지는 미지수였다.
“그건 차후에 알려 주겠소. 아마 며칠이면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이번 일은 절대로 다른 곳에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이오.”
결국 안전을 위해 전담 사육사와 하루 한 번 영상구를 통해 와이번의 상태를 보내 주기로 했다. 추가로 와이번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시에는 보상하겠다는 계약서까지 작성한 후에야 겨우 ‘블랙스콜피온’을 타운하우스의 정원으로 옮겨 올 수 있었다.
경주장 측에서 커다란 대형 마차에 천막을 씌워 제공한 탓에 이동은 수월했다.
그리하여 루시엘은 그날 저녁 철제 우리 속에서 길길이 날뛰는 블랙스콜피온과 둘이서 마주할 수 있었다.
노랗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루시엘이 다가가자 더욱 부릅뜨며, 울부짖고 꼬리를 쇠창살에 부딪치면서 난리였다.
아까의 그 난동으로 발목과 꼬리에도 쇠사슬로 묶여있었지만 그럼에도 얌전해지지 않았다.
―쿠와왕!
타앙, 탁탁!
“안녕.”
루시엘은 조심스럽게 와이번에게 다가가면서 말을 걸었다.
―쿠와와왕! 쿠앙!
루시엘을 보고 더욱 거칠게 반응하는 것을 보니, 오늘 부린 그 난동의 원인이 자신 때문인 게 맞는 모양이었다.
“……배고프지 않아?”
―쿠앙?
와이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루시엘은 사육 매니저가 알려 준 대로 준비한 통 안에 있던 생고기를 던져 주었다.
그러나 눈을 부릅뜨더니, 그것을 두툼한 발로 탁, 쳐 냈다.
“……배고픈 게 아니야? 그럼 이건 어때?”
파아앗.
루시엘이 마나를 모아 구체로 만들어서 와이번에게 둥실 띄워 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앞발로 그걸 톡 터트렸다.
‘내 마나가 싫지는 않은 기색인데?’
루시엘은 주머니에서 토파즈를 하나 꺼내서는 와이번에게 던졌다. 그러자 입을 벌린 와이번이 그걸 날름 받아먹었다.
꿀꺽, 식도로 보석을 넘기는 소리까지 났다. 입맛을 다시 다신 블랙스콜피온이 이젠 그녀의 손만 빤히 보고 있었다.
“……간에 기별도 안 가는 거야?”
아까보다는 한결 얌전해진 녀석의 모습에 루시엘은 조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에메랄드와 루비를 하나씩 더 주고 나니, 와이번은 보다 더 순해졌다. 하지만 그 이상 보석을 주지는 않았다.
‘배고파서 보석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보석 먹는 버릇이 들면 곤란할 듯해.’
루시엘의 손만 쳐다보는 녀석의 동그란 눈동자를 애써 외면하자 블랙스콜피온은 아까 던져 준 고깃덩이를 순식간에 씹어 삼켰다.
밥도 잘 먹고, 꼬리도 얌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아직 조그만 박쥐를 닮은 날개는 이따금씩 파닥거렸지만, 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얼마가 흘렀을까.
다음 날 아침에는 루시엘이 철제 우리 안으로 손을 뻗어도 가만히 있었다.
앞발을 만질 수 있게 허락도 해 주었다. 아직 얼굴까지 접근하는 건 어려울 것 같지만.
“옳지, 착하다.”
―꾸앙!
제 말에 대답하듯 입을 벌리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근데 이름 진짜 안 어울리는걸? 이렇게 귀여운데.”
루시엘이 온종일 와이번을 들여다보고 있자, 엘링턴이 철제 우리 주변으로 둘러놓은 천막 안으로 들어와 물었다.
“아가 마님, 와이번이랑은 어떻게 되셨…….”
와이번의 꼬리가 살랑 흔들리는 걸 보면서 엘링턴이 중얼거렸다.
“역시 요정의 마성은 최강이로군요…….”
“보석을 주니까 얌전해졌어요.”
“아 이번엔 마나가 아니라, 보석 때문이군요? 이놈, 자본주의 와이번이구나.”
엘링턴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노아랑은 연락이 되었나요?”
“음. 안 그래도 그 친구. 어제 외박까지 하길래, 조금 걱정이 되어 이네스를 감시 차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래요? 그럼 조금 안심이네요. 앗, 와이번이 잠들었어요. 우리 나가 줄까요.”
구루룩, 괴이한 코골이를 하면서 잠든 와이번을 보고 루시엘이 엘링턴과 함께 응접실로 들어갔다.
“저 와이번은 얼마나 더 데리고 있으실 겁니까?”
“조금만 더 있다가 데려다줄게요. 아직 하루밖에 안 되었잖아요.”
루시엘이 맑게 웃자, 엘링턴이 조바심에 말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너무 정붙이시진 마시고요. 저 녀석은 어차피 경주장 주인의 소유이니까요.”
“응, 나도 알아요.”
“알겠습니다. 일단 그건 그렇고, 각하께서 간밤에 다녀가셨습니다.”
“앗, 아빠께서요?”
“네, 새로운 정보상을 찾으셨다고 합니다.”
“그건 잘된 일이네요. 정보는 많을수록 좋은 거잖아요.”
엘링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시엘이 반색했다.
“예, 그야 물론입니다. 그렇지만 심각하긴 합니다. 황자가 신전으로 가면서 발루크가 완전히 종적을 감췄고, 작은 흔적 하나 발견할 수 없다는 건 각하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자존심이 많이 상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새로운 정보상을 만나 볼 생각이라고 하십니다.”
“음, 저도 걱정스러운 일이긴 해요.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루시엘의 표정도 자못 심각해졌다.
“아, 지난번에 길리아트 할아버지께서 추적 마도구에 무언가 기록이 하나 잡혔다고 했잖아요.”
“예, 조사해 보니 별건 없었긴 한데. 브로치가 황도의 시내 거리를 잠시 비추었다고 합니다.”
“……그게 다인가요?”
“네. 그 거리 위치는요?”
“베아트리체 건너편 카페 거리였다는데요?”
‘베아트리체’라면 과거에 솔리아페와 함께 간 적이 있던 황도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오트쿠튀르였다.
“정말요? 제가 아는 의상실이네요. 여자들의 천국…….”
“무슨 말이에요?”
“응?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시엘이 얼버무리면서 생각에 젖었다.
베아트리체라면 과거에 페넬로페도 왔던 곳이었다. 그곳을 지나가기라도 한 걸까?
‘페넬로페, 그리고 발루크 부인. 도대체 어디로 숨어 버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