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63)화 (163/282)

<163화>

“……울었어?”

“아니야.”

루시엘이 고개를 살랑 저으며 돌렸지만 키제프가 다가와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슬이 맺히듯 눈물로 아롱진 눈동자를 보자 키제프는 서운함이 폭발했던 감정이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안심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떠나니 슬퍼하는구나 싶어서.

하지만 이 말간 얼굴을 보면 어떤 미운 짓을 해도 사르르 녹아 버릴 터였다.

루시엘은 어느 곳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으니까.

파아아.

루시엘의 심장으로 모인 마나가 또롱, 또롱 허공에 사파이어를 만들어 냈다.

그 어떤 말보다도 솔직한 그녀의 감정이 전해져 왔다. 입은 솔직하지 못하지만. 키제프가 부드럽게 감겨 오는 루시엘의 머리칼을 정돈해 주며 물었다.

“루시엘, 내가 떠나서 슬퍼?”

키제프가 루시엘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검지로 쓸며 다정하게 말했다.

루시엘이 눈물을 매단 채 그를 노려보았다.

“으, 너 진짜 나빠. 당연하잖아…… 키우던 강아지가 집을 나가도 서운한데. 하물며 너는…… 키제프는. 흐끅.”

루시엘이 기어코 눈과 코가 빨개지며 울먹였다. 그 모습이 짠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키제프의 단정한 입매가 올라갔다.

“네 남편이지.”

귓가에 속삭이며 키제프가 루시엘의 자그만 몸을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솜털처럼 보드라운 루시엘의 감촉에 그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등 뒤에 닿는 품의 온기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던 루시엘은 이내 자신의 몸을 감은 단단한 팔을 붙잡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쿵쿵쿵.

높다랗게 심장이 뛰어서 온몸이 울리는 것 같았다.

빨개진 얼굴에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키제프의 품을 루시엘이 낑낑대며 벗어나려다가, 도저히 풀리지 않아 포기했다.

“……남편이라서가 아니라 키제프니까.”

루시엘이 겨우 그렇게 말을 내뱉자, 귓가에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키제프가 말했다.

“……내게는 남편인 것도 중요해.”

“그렇지만……. 우리 8년간의 계약 결혼이잖아. 키제프도 드락카에 가서 그 기간을 빨리 보낼 수 있을 거야.”

“…….”

루시엘의 그 말에 키제프의 얼굴이 굳어진 채로 잠시 무언가를 참는 듯하더니 이를 으득 갈며 말했다.

한결 짙어진 붉은 눈동자로…….

서늘하게 무서운 그 눈빛에 루시엘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루시엘, 계속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할 말이 있어. 내일 밤에 만나자.”

“내일 밤? 할 말은 지금 하면 되잖…….”

“아니. 내일 밤 10시에 천문대에서 만나.”

‘뜬금없이?’

고개를 갸웃거린 루시엘은 괜스레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서 잠자코 있었다. 키제프의 붉은 입술이 루시엘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두근두근.

‘읏, 안 돼. 이러다가 또…….’

루시엘은 볼을 붉히며 설렘에 퐁퐁 차오르는 마나를 느꼈다.

“잘 자.”

심장이 간지럽고 두근거려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키제프가 뒤돌아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

루시엘의 은빛 눈썹이 축 늘어졌다. 도무지 두근거림이 멎지 않았다.

기어코, 키제프가 방을 떠나기 전에 스피넬이 또롱, 만들어졌고 그걸 확인한 그가 입꼬릴 올렸다.

울고 싶어진 루시엘이 이불을 잘근 물어뜯었다.

* * *

다음 날 마련된 식사 자리에서 키제프가 어른들에게 제 뜻을 밝혔다. 루시엘은 늦잠을 자느라고 참석하지 못한 참이었다.

“……어려운 결정이었겠구나. 키제프, 이 할애비는 네 성장을 응원하마. 언제든 도움을 요청해라.”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길리아트가 손주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장차 키제프가 짊어지고 나갈 무게를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직은 가주인 루이비드가 창창하게 젊으니 괜찮았지만, 훗날을 위해 키제프 역시 그와 버금가게 힘을 키우는 건 맞았다.

더욱이 루시엘과 벨슈타인을 노리는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키제프가 제아무리 벨슈타인의 핏줄을 타고나 강하다지만 속은 아직 여린 아이였다. 조금 더 단단해져서 돌아오길 바랐다.

그러나 솔리아페와 루이비드는 생각이 다른 듯했다. 키제프의 이야기를 듣고는 식사를 완전히 멈췄다.

“키제프, 네 의견은 존중하지만 그 먼 땅에 혼자서 간다니 걱정이 앞서는 건 사실이야. 괜찮겠니? 네 스승인 쿠란티엘만 믿고 따라가도?”

“예, 믿고 따를 수 있는 분입니다.”

내내 표정이 안 좋던 공작도 서운함에 와인을 목구멍으로 넘기고는 삐딱하게 입을 열었다.

“부모와 가족보다 더 믿고 따를 수 있다는 뜻이냐.”

“……아버지.”

“네가 살갑지 않은 성격이란 것은 알지만 적어도 그 일을 결정하기 전에 한마디라도 꺼내 줄 수 있었을 게 아니냐.”

그의 말에 키제프도 잠잠해졌다.

“……적어도 아버지라면 미리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자르가 단장에게 전해 들어서 말이지. 그래, 그런 식으로는 알고 있었지.”

“……먼저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그만해라, 루이비드. 이 일은 사실 오래전부터 내가 제안한 거였다. 네가 드래곤의 힘을 이어받는 일을 내켜 하지 않으니, 키제프도 조심스러웠던 게지.”

전부터 키제프의 장래를 함께 고민해 왔던 이벨린이 나서자 공작이 놀라 물었다.

“어머니가 제안하신 거였습니까?”

“그래.”

“하지만 키제프는 지금도 마족의 핏줄을 이어받았지 않습니까. 굳이 그 먼 곳까지 가서 드래곤의 힘까지 이어받지 않아도…….”

그가 말끝을 흐렸다. 키제프가 빠르게 대답했다.

“아뇨. 루시엘과 벨슈타인을 지키려면 아직 부족합니다. 힘을 키우고 싶습니다.”

“……여기서도 충분히 단련하면 성장할 수 있다.”

“아니요. 한계가 있을 겁니다. 저는 그 한계를 뛰어넘을 거고요.”

“아무리 그래도 그 험하고 먼 곳으로 너를 혼자 보낼 순 없다.”

공작이 어두운 낯으로 더욱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쿠란티엘은 믿을 수 있는 자이지만, 키제프를 혼자 보내는 건 나도 생각할수록 불안하긴 하구나.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내가 따라가서 적응할 동안 키제프를 보살펴 주고, 돌아오는 거란다. 어떠니?”

이벨린의 의견에 길리아트와 솔리아페는 얼굴이 밝아졌다.

“오, 그러면 확실히 걱정을 덜 수 있겠군.”

“……그래 주시겠어요, 어머님?”

“물론이지. 나도 고향에 한번 갈 때가 되었으니까. 루이비드, 그럼 안심할 수 있겠지.”

“……어머니가 가신다면 일단은 안심하겠지만. 적어도 반년 이상은 보호자 노릇을 해 주셔야 합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로구나. 그런데 키제프, 토끼 같은 네 아내를 혼자 남겨 두고 갈 수 있겠니?”

이벨린의 걱정 어린 말에 키제프의 얼굴빛도 어두워졌다.

* * *

“아가 마님, 오늘은 푹 주무셨네요.”

“응. 늦게 잠들었어.”

“왜요,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셨어요?”

베시가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어 주며 말했다. 루시엘이 가만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가 팔랑거리는 파자마를 입은 채, 도도도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맑게 비치는 정오의 햇살이 길게 뻗치고 바람이 뺨을 스쳤다.

“베시, 있잖아. 심장이 막 간지러운 증세는 뭐라고 할까. 가끔은 답답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또 숨고만 싶어.”

루시엘의 말을 들은 베시가 쿡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키제프 도련님과 있을 때 그런 것이죠?”

“어? 아, 아니. 그…… 그냥 보편적으로 그런 건 어떤 건가 해서. 이런 적은 처음이라.”

루시엘의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우리 아가 마님, 겉모습은 이렇게 아기이신데 감정은 꽤나 조숙하신걸요? 그런 걸 두고 이렇게 말해요. 좋아한다고.”

“……어? 아아, 그렇구나. 그러면 난 베시를 좋아하나 봐!”

루시엘이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맑게 웃으며 베시의 품에 와락 안겼다.

“제가 아니라 다른 분인 것 같지만 오늘은 넘어가 드릴게요.”

베시는 루시엘을 토닥인 다음, 평소보다 신경 써서 갈아입을 원피스들을 골라 왔다.

하나같이 달콤한 색들이었다.

하늘색, 분홍색, 노란색, 민트색.

루시엘은 거울을 보며 제 몸에 원피스를 대보았다.

키제프와 만나기로 한 건 밤인데도 왠지 신경 써서 고르게 되었다.

루시엘이 프릴과 리본 매듭 장식이 사랑스러운 하늘색 원피스를 고르자, 그에 어울리는 리본을 가져온 베시가 말했다.

“뽀얀 피부와 은발에 하늘색이 너무 예쁘게 잘 어울리세요. 양 갈래로 묶어 드릴게요.”

“으응.”

예쁘다는 칭찬에 루시엘이 볼을 수줍게 물들였다.

루시엘은 브런치를 먹고 오후에는 장서관에 들러 책을 읽은 다음, 솔리아페와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고 산책도 했다.

중간에 피닉스가 마나를 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일찍 방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모처럼 느긋하고 여유로운 하루였다. 어느샌가 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어 갔다.

그러고 보니 휴일인데도 키제프가 종일 보이지 않았다. 기사단에도 식당에도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루시엘은 저녁을 다 먹고도 소파에 앉아 어쩐지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제 곧 키제프와 약속한 밤 10시, 괜스레 가슴이 콩닥거렸다.

“아가 마님, 주무실 시간인데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으셔야지요?”

“아, 아니…… 나 아직 잠 안 오는데.”

루시엘이 눈을 말똥말똥 뜨며, 자신이 졸리지 않다는 걸 보여 주었다. 슬슬 무언가를 눈치챈 베시가 물었다.

‘약속이라도 있으신 모양이네.’

“으음. 알겠어요, 그럼 필요하실 때 불러 주세요.”

드디어 시침이 밤 10시를 가리키자 루시엘이 거울을 본 다음, 랄프의 호위를 거절하고 별궁을 나섰다.

가는 동안 천문대가 개방을 안 했으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도 하며 그 앞에 다다랐다.

층계를 따라 올라가려는데 뜻밖에도 천문대의 둥근 지붕에서 무언가 소리가 났다.

닫혀 있던 지붕이 열리면서 그 안에서 알록달록 예쁜 종이풍선들이 일제히 하늘로 솟구쳤다.

“헉, 너무 예뻐. 근데 이게 다 뭘까?”

루시엘은 멍하니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중에 가장 커다란 토끼 얼굴 모양의 풍선이 둥실둥실 바닥으로 내려왔다.

정확히 루시엘이 있는 곳으로 내려온 토끼 풍선에는 분홍색 카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루시엘이 카드를 펼쳐 확인해 보니 작은 여자아이가 그려져 있었다. 자신을 꼭 닮은 여자아이.

카드에는 유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너를 처음 본 순간을 기억해. 사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몰랐어. 지금껏 그 누구도 내 마음에 담아 본 적이 없으니까. 한눈에 깨달았어. 너는 남들과는 다르단 걸.

돌이켜 보면 너와 만날 수 있었던 이번 삶의 인연은 신이 나에게 준 선물이 아니었을까. 종종 그런 생각을 해.

그만큼 특별하고 소중해. 어쩌면 운명으로 느껴질 만큼.

항상 혼자였던 나에게 네가 별이 되어 줬어. 그때부터…… 난 너만 보였어.」

슈우우.

루시엘이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천문대 꼭대기에서 무언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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